BEST 이궁의 변때 육손이 전종의 아들이 자꾸 손패한테 빌붙으니까 전종에게 김일제의 일을 본받으라고 한거
전종한테 심한 말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전종한테 김일제를 본받으라고 했으니 손권을
김일제 당시의 황제였던 한무제에 비교한거다! 선 넘었다!' 라는 해괴한 내용이 있었음
배경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군용물품이 부족해서지 딱히 민생 챙긴거 아님
결말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민생?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지
직백전 기록이거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면 기록이라도 더 있었야 할텐데
결말도 본인들 원하는 결과만 봤다고 할 수 있고
(촉한 쇠퇴기에 화폐품질이 저화됬다는 걸 근거로함)
+(촉한의 화폐가 타국에서 발견되는 것 또한 그저 화폐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며 한쪽의 주장만 말함)
배경도 본인들 원하는 부분만 쏙 뺐다고 할 수 있음
(동탁이 화폐가치를 똥값으로 만들어서 새롭게 안정젇인 화폐를 만들 이유가 있었음에도 동탁이랑 같은 일한거라며[있는 동전 쪼개서 일부러 악화 만드거랑 새로 동전 만든거랑 뭐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됬던 같은 짓이라고 함]깜)
당연 할수 있는 주장이고 나올수 있는 말이긴 한데 정설로 취급하고 딱 박아둘건 아니지?
그래서 내가 이건은 딱히 어느 쪽이 맞다고 안함
기록만 신뢰하는 건 아니잖아? 타국에서 화폐가 발견됬다는 점도 이유로 들고 그것얘기하면 '화폐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라는 개인판단일 뿐이고
애초에 동탁이랑 동 케이스라고 주장 하기에도 배경도, 방법도 다르다고 반박했고
당백전 이야기나오길레 그건 또 디플레이션 상황이라 또 다르다고 반박을 했음
사례에 있어서 아무래도 화폐개혁자체가 성공하기 힘든 사례 그 자체다 보니 이 쪽에 깊게 파보지 않은 나로선 가져오기 힘들긴 함
다만 한가지 말하자면 손오나 조위나 촉한이나 결국 시행했던 화폐개혁의 틀은 비슷하다는거
적어도 매우 질이 낮아진 동탁의 오수전을 바로잡을 화폐를 발행했음이 보임
세 나라가 갑자기 수탈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도 하고
시행한 정책이 비슷하다면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은 전부 똑같이 구상 한것으로 보임
하지만 조위나 손오의 환경엔 딱히 알맞지 않았고 촉에는 그게 맞았다고 생각
직백전 관련 기록이 영릉선현전에 기록된거 말고 없는데
여기서 목적자체가 군용물품을 보충할려고 만든거라고 나왔는데
직백전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인데
주목적이 주조차익말고 순전히 민간경제 안정화로 수개월만에 안정화된거라면
그런 대단한 물건의 기록이 이정도고 다른나라가 모방이라도 안할이유가 있나?
영릉선현전 기록을 부정하면 모르겠지만
영릉선현전 기록만 보면 주조차익 목적이 너무 선명한데
아니 그렇게 대단한 성공사례면 무슨무슨사례를 따라서 모방이라도 하자 이런 기록이라도 있어야 아닌지? 영릉선현전 기록대로라면 수개월만에 관부가 충실해진 대단한 경제정책인데 그게 아주 긍정적이었으면 다른시대의 다른군벌들이 유파의 사례를 응용해서 직백전같은 화폐를 발행하자 이런것은 있어야죠
조원명이 아뢰기를,
“처음엔 4문이 1푼이었다가 그 뒤엔 2문이 1푼이었는데도 이로움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대전을 통행하여 이제까지 쓰고 소전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로 보더라도 대전을 통행한다면 소전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錢貨)의 법은 가치가 알맞으면 나라와 백성들 모두에게 이로우나, 너무 흔하거나 비싸면 백성들이 불편하게 됩니다. 유파의 법 같은 경우는 실로 백성들을 속여 나라를 부유하게 한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유장(劉璋) 때엔 화폐 제조의 권한이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유파가 당백전을 통행하게 하여 권한을 거두었으니, 선유가 인력(人力)으로 조화(造化)를 뺏었다고 한 말이 옳습니다. 손권의 당천전 같은 경우는 액수가 너무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조원명이 아뢰기를,
“대전은 한때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하고, 나중에 폐단이 생긴다면 또 소전을 다시 쓸 것입니다. 지금은 소전을 대전으로 바꾸므로 이문이 남겠지만 다시 소전을 주조할 때에는 줄어들어 모자라는 비용이 필시 반은 넘을 테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손실이 어찌 작겠습니까. 이는 우려해야 할 바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11년12월10일
https://sjw.history.go.kr/id/SJW-F11120100-02200
조원명같은 사람은 유파가 사람을 속였고 오래갈 정책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유파의 경제정책을 백성들한테 좋았다 이런기록을 가지고 오시면 좋겠습니더.
https://db.itkc.or.kr/search/group?q=query%E2%80%A0%E5%8A%89%E5%B7%B4
덕분에 재밌는 기록을 보고왔어 고마워
이것 때문에 역시 좀 더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됬음
기록을 보아하니 우리가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게 없더라
누구는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서
누구는 당시 시장경제에 알맞는 화폐로서
긍정적으로 적힌 것도 있고 부정적으로 적힌 것도 둘다 존재함
뭐 말 했듯이 결국 '어느 한 쪽을 섣불리 택할 수 없다.' 라 말하고 싶어지네
옛날 사람들도 한가지면만 보고 고려하는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당시 경제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에 고려해서 언급하는듯
유비가 촉을 오래다스린것도 아니고 정복자로 3년의전쟁끝에 성도에 입성했는데
겨우 직백전 제조로 경제 안정화라고 해주는 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봐주는거 같음
전근대에서 농업이 주요산업인데 고액권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괸부의 부고가 가득찼다는게 주조차익으로 이득본거 말고 뭐라 하기 좋게 말해주긴 힘들다고 생각함.
일단 제시해준 기록을 봤는데 백성들이 부유해졌다라는 언급은 안보이는데
주조차익이라는게 옛날에는 필요하면 하는거라서
약간 팬심이 더해진거 같음
무릇 재화를 조종하는 권한은 국가에 있으니, 그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거푸집으로 만들거나 닥나무를 재단하여 돈을 만들더라도 은(銀)과 포(布)도 함께 써야 하니, 하물며 크기가 조금 크거나 작은 동전이겠습니까. 옛날 유파(劉巴)가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 것은 재화를 제어하는 권한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제갈량(諸葛亮)도 취하여 썼으니, 역사에서는 물가를 균평하게 하고 창고를 채웠다고 일컬었습니다
(중략)
만약 대전을 주조한다면 10년 안에 부유한 백성과 상인들이 숨겨 둔 저화와 쌓아 둔 돈꿰미들을 조정에서 굳이 명령을 내리고 법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거의 다 뽑아낼 것이고, 공사(公私)의 창고도 조금 넉넉해지는 방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시대의 알맞음과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다시 고금에 교자무(交子務)를 운영했던 방법들을 고찰하거나 혹 요즘 중국에서 통행하는 동전의 예를 따라서 또 줄여 작게 한다면 나라는 이로움을 거둘 수 있고 백성들은 감히 권한을 훔치지 못할 것이니, 화폐를 유통하는 도리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영조11년 12월 10일
고액권이라는게 서민들이 많이 쓰는 물건도 아니고
부유층이 제일 많이 쓸 물건이라서 유파의 정책을 칭찬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들이 쌓아 둔 돈을 뽑아낼 수 있다라고 언급함
범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부분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반대측이 서현이 사라진 자리를 독점하고 통제했다는 주장도 잘못됨. 마음에 안들 것이라 생각되는 촉한멸망전 항목을 보더라도 나름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사항이 마련되었음. 조비 항목 같은 경우에는 긍정적 평가 부분을 반달리즘으로 삭제했다가 작성자가 토론을 걸고 상대가 거기에 불응하면서 마무리됐고. 서현이 여기서도 까인 건 아이디를 수십개씩 파면서 달라붙는 모습이 누가 봐도 혐오스러웠기 떄문인 거지 그 수많은 아이디들이 다 다른 사람이고 촉빠 의견을 가진 집단지성이었다면 굳이 까이거나 저격당하지도 않았을 거임.
이궁의 변때 육손이 전종의 아들이 자꾸 손패한테 빌붙으니까 전종에게 김일제의 일을 본받으라고 한거 전종한테 심한 말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전종한테 김일제를 본받으라고 했으니 손권을 김일제 당시의 황제였던 한무제에 비교한거다! 선 넘었다!' 라는 해괴한 내용이 있었음
본래 삼국지 팬덤 싸움은 '한 쪽만 억울하다.'는 소리같은건 들으면 안 됨 걍 똑같은 짓 반복하면서 싸이클 도는 판이라... 나도 거기에서 못벗어나는 기분도 있고
손권 한무제는 뭐임?? 전혀 칭찬이 아닌거같은데
이궁의 변때 육손이 전종의 아들이 자꾸 손패한테 빌붙으니까 전종에게 김일제의 일을 본받으라고 한거 전종한테 심한 말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전종한테 김일제를 본받으라고 했으니 손권을 김일제 당시의 황제였던 한무제에 비교한거다! 선 넘었다!' 라는 해괴한 내용이 있었음
공허한 주장이네 ㅋㅋ
본래 삼국지 팬덤 싸움은 '한 쪽만 억울하다.'는 소리같은건 들으면 안 됨 걍 똑같은 짓 반복하면서 싸이클 도는 판이라... 나도 거기에서 못벗어나는 기분도 있고
한무제 드립은 ㅈㄴ 뇌절 ㅋㅋㅋㅋㅋㅋ
유파의 화폐개혁은 배경과 결말을 생각하면 주조차익이 목적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어서
배경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군용물품이 부족해서지 딱히 민생 챙긴거 아님 결말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민생?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지 직백전 기록이거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면 기록이라도 더 있었야 할텐데
결말도 본인들 원하는 결과만 봤다고 할 수 있고 (촉한 쇠퇴기에 화폐품질이 저화됬다는 걸 근거로함) +(촉한의 화폐가 타국에서 발견되는 것 또한 그저 화폐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며 한쪽의 주장만 말함) 배경도 본인들 원하는 부분만 쏙 뺐다고 할 수 있음 (동탁이 화폐가치를 똥값으로 만들어서 새롭게 안정젇인 화폐를 만들 이유가 있었음에도 동탁이랑 같은 일한거라며[있는 동전 쪼개서 일부러 악화 만드거랑 새로 동전 만든거랑 뭐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됬던 같은 짓이라고 함]깜) 당연 할수 있는 주장이고 나올수 있는 말이긴 한데 정설로 취급하고 딱 박아둘건 아니지? 그래서 내가 이건은 딱히 어느 쪽이 맞다고 안함
목적부터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된거 보충할 목적이라고 사서에 기재되어 있고 결말도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인데 기록대로라면 정설이 아니라고 할려면 다른 기록이라도 제시해야한다고 생각함 비슷한 짓거리한 손오도 화폐 폐지했는데
물가 평정, 안정화 이야기는 적혀있는지라 이상할 건 없음 촉한이 자급자족보단 수출로 벌어먹을만한 곳이기도 하고
그냥 손오랑 조위가 실패했다고 보면 그만인 이야기잖아 오히려 그 두나라가 실패했으니 촉한도 당연히 실패했다는 기정사실 깔고 들어가며 폄하하는 거 아니냐고 말 나올수도 있는건데 말야
물가의 안정은 부가적인 효과고 주된 목적은 군용물품 충당인데 약간 핀트를 잘못 잡으신듯
직백전같은 화폐를 발행해서 경제안정화한 사례를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화폐로 물가를 안정화 시키는 것 부터가 동탁의 오수전 발행이랑은 비교 안되는거 아닌가?
님은 직백전의 목적이 주조차익이 아니고 경제 안정화라라는데 직백전같은 화폐를 찍어서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지고 경제안정화가 되었다는 사례를 제시해주세요
나도 이 쪽 계열은 공부해본건 아니라 사례로 대답하는 건 힘들긴 해 다만 주조차익에 대한 주장에 반박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고
화폐로 관부가 수개월만에 충실해진다는게 주조차익 말고 사례를 제시해주세요. 기록을 신뢰한다면 목적부터 결말까지 화폐로 착취말고 생각하기 힘든데
기록만 신뢰하는 건 아니잖아? 타국에서 화폐가 발견됬다는 점도 이유로 들고 그것얘기하면 '화폐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라는 개인판단일 뿐이고 애초에 동탁이랑 동 케이스라고 주장 하기에도 배경도, 방법도 다르다고 반박했고 당백전 이야기나오길레 그건 또 디플레이션 상황이라 또 다르다고 반박을 했음 사례에 있어서 아무래도 화폐개혁자체가 성공하기 힘든 사례 그 자체다 보니 이 쪽에 깊게 파보지 않은 나로선 가져오기 힘들긴 함
다만 한가지 말하자면 손오나 조위나 촉한이나 결국 시행했던 화폐개혁의 틀은 비슷하다는거 적어도 매우 질이 낮아진 동탁의 오수전을 바로잡을 화폐를 발행했음이 보임 세 나라가 갑자기 수탈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도 하고 시행한 정책이 비슷하다면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은 전부 똑같이 구상 한것으로 보임 하지만 조위나 손오의 환경엔 딱히 알맞지 않았고 촉에는 그게 맞았다고 생각
직백전 관련 기록이 영릉선현전에 기록된거 말고 없는데 여기서 목적자체가 군용물품을 보충할려고 만든거라고 나왔는데 직백전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인데 주목적이 주조차익말고 순전히 민간경제 안정화로 수개월만에 안정화된거라면 그런 대단한 물건의 기록이 이정도고 다른나라가 모방이라도 안할이유가 있나? 영릉선현전 기록을 부정하면 모르겠지만 영릉선현전 기록만 보면 주조차익 목적이 너무 선명한데
? 모방안하고 자시고 비슷하게 고액권 발행했잖아? 그냥 성공과 실패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하는데
아니 그렇게 대단한 성공사례면 무슨무슨사례를 따라서 모방이라도 하자 이런 기록이라도 있어야 아닌지? 영릉선현전 기록대로라면 수개월만에 관부가 충실해진 대단한 경제정책인데 그게 아주 긍정적이었으면 다른시대의 다른군벌들이 유파의 사례를 응용해서 직백전같은 화폐를 발행하자 이런것은 있어야죠
경제모델이란게 각국에 전부 일정하게 적용되는게 아니니까 조위만 보더라도 사람들이 그냥 물물교환이 더 좋다고 촉한보다 화폐가치가 더 좋은데도 안씀 유파가 한게 엄청 특별한게 아닐 수 있음 당시 촉한의 환경에 적절했던 거거나
조원명이 아뢰기를, “처음엔 4문이 1푼이었다가 그 뒤엔 2문이 1푼이었는데도 이로움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대전을 통행하여 이제까지 쓰고 소전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로 보더라도 대전을 통행한다면 소전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錢貨)의 법은 가치가 알맞으면 나라와 백성들 모두에게 이로우나, 너무 흔하거나 비싸면 백성들이 불편하게 됩니다. 유파의 법 같은 경우는 실로 백성들을 속여 나라를 부유하게 한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유장(劉璋) 때엔 화폐 제조의 권한이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유파가 당백전을 통행하게 하여 권한을 거두었으니, 선유가 인력(人力)으로 조화(造化)를 뺏었다고 한 말이 옳습니다. 손권의 당천전 같은 경우는 액수가 너무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조원명이 아뢰기를, “대전은 한때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하고, 나중에 폐단이 생긴다면 또 소전을 다시 쓸 것입니다. 지금은 소전을 대전으로 바꾸므로 이문이 남겠지만 다시 소전을 주조할 때에는 줄어들어 모자라는 비용이 필시 반은 넘을 테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손실이 어찌 작겠습니까. 이는 우려해야 할 바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11년12월10일 https://sjw.history.go.kr/id/SJW-F11120100-02200 조원명같은 사람은 유파가 사람을 속였고 오래갈 정책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유파의 경제정책을 백성들한테 좋았다 이런기록을 가지고 오시면 좋겠습니더.
https://db.itkc.or.kr/search/group?q=query%E2%80%A0%E5%8A%89%E5%B7%B4 덕분에 재밌는 기록을 보고왔어 고마워 이것 때문에 역시 좀 더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됬음 기록을 보아하니 우리가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게 없더라 누구는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서 누구는 당시 시장경제에 알맞는 화폐로서 긍정적으로 적힌 것도 있고 부정적으로 적힌 것도 둘다 존재함 뭐 말 했듯이 결국 '어느 한 쪽을 섣불리 택할 수 없다.' 라 말하고 싶어지네 옛날 사람들도 한가지면만 보고 고려하는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당시 경제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에 고려해서 언급하는듯
대표적으로 순간적인 이익을 언급한 것도 있고 공급할 동전이 부족하거나 상업의 발달로 인해 고액권이 필요할 때 예시로 언급됨 당시 시대에 고려해서 언급되는게 재밌음
여하튼 결국 화폐를 이야기 하려면 당시 시대와 해당 국가의 시장경제를 잘 알아야한다는 생각임
유비가 촉을 오래다스린것도 아니고 정복자로 3년의전쟁끝에 성도에 입성했는데 겨우 직백전 제조로 경제 안정화라고 해주는 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봐주는거 같음 전근대에서 농업이 주요산업인데 고액권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괸부의 부고가 가득찼다는게 주조차익으로 이득본거 말고 뭐라 하기 좋게 말해주긴 힘들다고 생각함. 일단 제시해준 기록을 봤는데 백성들이 부유해졌다라는 언급은 안보이는데 주조차익이라는게 옛날에는 필요하면 하는거라서 약간 팬심이 더해진거 같음
무릇 재화를 조종하는 권한은 국가에 있으니, 그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거푸집으로 만들거나 닥나무를 재단하여 돈을 만들더라도 은(銀)과 포(布)도 함께 써야 하니, 하물며 크기가 조금 크거나 작은 동전이겠습니까. 옛날 유파(劉巴)가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 것은 재화를 제어하는 권한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제갈량(諸葛亮)도 취하여 썼으니, 역사에서는 물가를 균평하게 하고 창고를 채웠다고 일컬었습니다 (중략) 만약 대전을 주조한다면 10년 안에 부유한 백성과 상인들이 숨겨 둔 저화와 쌓아 둔 돈꿰미들을 조정에서 굳이 명령을 내리고 법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거의 다 뽑아낼 것이고, 공사(公私)의 창고도 조금 넉넉해지는 방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시대의 알맞음과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다시 고금에 교자무(交子務)를 운영했던 방법들을 고찰하거나 혹 요즘 중국에서 통행하는 동전의 예를 따라서 또 줄여 작게 한다면 나라는 이로움을 거둘 수 있고 백성들은 감히 권한을 훔치지 못할 것이니, 화폐를 유통하는 도리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영조11년 12월 10일 고액권이라는게 서민들이 많이 쓰는 물건도 아니고 부유층이 제일 많이 쓸 물건이라서 유파의 정책을 칭찬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들이 쌓아 둔 돈을 뽑아낼 수 있다라고 언급함
서현이 쫓겨난 건 개인연구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남이 쓴 글 무단으로 복붙하고 자기 입맛대로 고쳐썼기 때문임.
하지만 맥락은 같음, 멋대로 개인입맛이 잔뜩 들어간 정보통제 둘 다 호감사기 힘든 행위임
작성자의 해석은 삼국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항목에 다 들어감. 마음에 안들면 가서 토론 걸고 바꾸면 됨. 서현의 문제는 기초 룰을 다 씹어먹었다는 거고, 아예 토론과 수정에 낄 기본적인 자격 자체가 없었다는 거임.
본인이 느끼기에 편향된 것과 그 판에서 '범죄'로 규정될만한 행위를 저지른 걸 동일선상에 넣는 건 한쪽에 옹호적이기까지 한 거라고 봄.
당장 여기서 나오는 말인 '한 항목을 여러명이 붙잡고 있으면 못바꾼다' 는 말 부터 태클 걸어야지 애초에 여기에서 그 양반 까는 것도 그런 시스템을 무시한게 아니라 한명의 사견이 위키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니까 까이는 거임
미안한데 애초에 여기서 그러한 위키입장을 대변삼아서 그 사람을 깐게 아니라 문제
솔까 여기 사람들이 '위키 시스템을 무시했다' 를 들고 까는 거겠어 아니면 '특정 팬덤이 항목을 독점하고 기록을 통제했다' 고 까는 거겠어? 사람들이 무엇을 문제삼고 까는지 알고 거기에 맞춰서 말한 것 뿐임
범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부분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반대측이 서현이 사라진 자리를 독점하고 통제했다는 주장도 잘못됨. 마음에 안들 것이라 생각되는 촉한멸망전 항목을 보더라도 나름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사항이 마련되었음. 조비 항목 같은 경우에는 긍정적 평가 부분을 반달리즘으로 삭제했다가 작성자가 토론을 걸고 상대가 거기에 불응하면서 마무리됐고. 서현이 여기서도 까인 건 아이디를 수십개씩 파면서 달라붙는 모습이 누가 봐도 혐오스러웠기 떄문인 거지 그 수많은 아이디들이 다 다른 사람이고 촉빠 의견을 가진 집단지성이었다면 굳이 까이거나 저격당하지도 않았을 거임.
그러니까 그 토론시스템도 여기서 까이는 시스템이자 항목독점의 한가지로 손 꼽히는 시스템인건 아냐고... 까말 화폐관련해선 연구했다손 치더라도 한무제 손권 드립은 그러한 체계에서 굴러가니 안전하다- 라는 주장에 물음표를 찍는 문장임
한 세력이 독점하고 있다길래 토론 시스템이 괜찮게 작동한 예시를 들었는데 토론 시스템이 마음에 안든다면 뭘 어떻게 해야한다는 거임? 주관 자체를 없애야한다는 거면 나무위키의 문서 90퍼 이상은 날아가야 할걸.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적어도 비판을 듣기 싫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정보를 적어야겠지 결국 사람들이 눈 찌푸리는 제1 순위는 개인의 억측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