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794000
요약
1. 지지해주던 사람들은 꽤 많았음
2. 그러나 주장만하고 책이나 논문 발표 안함
3. 그러면서 다른 의사들한테 살인자라고 마구 비난함
말한마디 없이 다른 도시로 런하면서 결국 지원해주는 사람들도 손절
제멜바이스의 자멸과 의사-과학자의 한계
서두에 언급한 세 사람, 로키탄스키, 슈코다, 헤브라는 제멜바이스를 지원하고 후원했습니다.
빈 의과대학의 다른 여러 교수들도 제멜바이스가 내놓은 학설을 지지했고요.
헤브라와 로키탄스키가 먼저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글로 적어 소개했습니다.
슈코다는 연설에서 제멜바이스와 그의 주장에 관해 언급하고요.
결국 세 사람의 열정적인 도움으로 제멜바이스는 당시 과학적 논의를 이끌던 빈 의학회에서 강연할 수 있었고,
강연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을 보편적인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 일보만 더 내디디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제멜바이스는 자기 주장을 책이나 논문 형태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 다수가 그를 편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이 글을 쓰며 주로 참고하고 있는 책 『닥터스』를 쓴 전 예일대 의대 교수 셔윈 눌랜드는
제멜바이스가 이방인인데다 산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서툰 독일어를 구사하는 헝가리인, 아직 선택 과목이던 산과의 위치가
스스로를 “잘못된 환경, 잘못된 사회 계급 출신에, 잘못된 사투리로 말하고,
제대로 된 대학 일자리에서 거절당한 서투르고 품위 없는 이방인”으로 여기게 했다는 겁니다.
결국 열등감 가득한 한 인물이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버린 셈이라는 거죠.
1860년 제작된 제멜바이스의 초상.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하지만 그의 태도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는 주변 산과 의사가 손을 씻지 않으면 상대방을 가차 없이 살인자로 몰아가며 공격했습니다.
다른 과에서 그의 학설만 들은 동료들은 지지를 보냈겠지만,
아무리 그가 옳다 해도 같은 산과의사라면 그의 태도를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산과 교수들에게 보낸 서신은 살인자라며 공격하는 욕설로 가득해요.
예컨대 그가 1861년에 보낸 공개 서한을 봅시다.
“교수님은 이 대학살에서 조력자였습니다. 이 살인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살인을 멈추기 위해 저는 계속 지켜볼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자료를 서면으로 발표하지 않았기에 제멜바이스의 강연은 개요만 전달되었고,
구체적인 내용 없는 과격한 주장은 멀리서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 전에 연구 업적도 없던 한 학자가 논문도 없이 어떤 내용을 주장했다는 소문과
주변에서 그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만 돌아다닌다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와중에 페슈트 대학 로쿠스 병원 산과 과장 자리를 맡게 된 제멜바이스는 그를 지원하던 모두에게 아무런 인사도,
언급도 없이 빈에서 사라집니다. 배신감을 느낀 로키탄스키와 슈코다가 제멜바이스와 연을 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페슈트 :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동부 지역으로 부더(BUDA), 오부더(ÓBUDA), 페슈트가 1873년 통합되면서 부다페스트가 된다.)
게다가 1861년에야 출판된 그의 책은 두서없고 지루합니다.
자신은 “온화한 기질”의 소유자로 양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판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반대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하며 욕을 퍼붓지요. 지금은 1983년 코델 카터가 완역한 영어 번역본이 있지만,
1941년 제멜바이스 책을 번역하려고 손댄 프랭크 머피(Frank P. Murphy)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 작품의 문체는 장황하고 지루하며, 주장은 어떤 논리적인 요점에도 이르지 못한 채 오락가락한다.
저자는 독선적이고 호전적이다.” 1865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제멜바이스의 증상이 이미 책에 드러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가 책에서, 그리고 일대기에서 보인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통계도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지요. 지금 통계학은 의학적 관찰을 기술하는 핵심 언어로,
누구나 통계 유의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1850년대 통계학은 아직 물리학과 확률 이론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통계학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려 했던 아돌프 케틀레(Lambert Adolphe Jacques Quetelet, 1796~1874)의 시도가
의학 등 제반 분야로 퍼지기 위해서는 프랜시스 골턴 경(Sir Francis Galton, 1822~1911)이 유전학에 이를 적용한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그리고 관련 연구가 시대를 뒤흔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모집단 분포와 통계 검정이 이론화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출생자 수와 사망자 수, 그리고 그 비율만을 적은 제멜바이스의 표가 강력한 증거로 사용되기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p값을 통한 유의성 검정도 이뤄지지 않던 시절, 한쪽에서 사망자 비율이 높은 것은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 받아들여졌기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명료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그가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적 유의성을 검정한 논문은 2008년 발표됩니다).
그래프로 시각화하는 방법이라도 발전했다면 또 모르지만, 그런 방법이 발전하는 건 후대의 일입니다.
당시 의학계에서 진보적인 태도로 유명했던 루돌프 피르호(Rudolf Ludwig Karl Virchow, 1821~1902) 같은 인물도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겠죠.
만약 단지 과거의 권위가 문제였다면 피르호 같은 인물은 제멜바이스의 이론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테니까요.
출처 :
https://thesciencelife.com/archives/3284
2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793985
제멜바이스가 손씻기 무시당했던건 시대적 배경도있음.
일단 본인이 좀 극성으로 기존 의료계에 정면으로 대들었던건 뒤로 제쳐두고...
제멜바이스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가 딱 1848 헝가리 독립전쟁 전후시점임.
이 시점에 헝가리인은 그냥 반역자 취급이었고 실제로 많은 헝가리인이 독립전쟁에 뛰어즘.
물론 그당시에 빈에서 한창 의사공부하던 제멜바이스는 이런쪽과는 연관이 없긴했는데,
가족이랑 친구들은 죄다 독립전쟁한다고 뛰어듬.
이 당시에 헝가리인 취급은 그냥 말 그대로 반역자취급임.
독립전쟁에 참여했건 안했건 그냥 반역자임.
이미 독림전쟁 관련자 7만명정도가 처형당했고 헝가리왕국 중심지인 부다페스트는 파괴되고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후임인 바흐 주도로 군정설립됨.
여기 군정에 부임한게 하이나우라는 ㅁㅊㄴ인데 얘는 진짜 정신병이라도 걸린것처럼 헝가리 반군색출해서 죽임.
이런 사회적분위기가 제멜바이스의 이론이 묻히는데 한건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