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적인 관객, 폭발적인 광경, 터져 나오는 음악소리. 음악을 아는 이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전설적인 록 밴드가 있었다. 20년의 활동 동안, 그들이 세상에 내놓은 곡들은 오랜 시간 상위권을 지켜나갔고, 멤버 한 명의 죽음으로 밴드가 거의 와해된 지금에서도 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팬들이 남아있었다. 나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흠, 흐흠~♩.”
“... 야, 진수… 김진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너머로, 날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그녀인 듯 하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볼을 콕하고 찔렀다. 기다랗고도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나는 귀 양쪽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어냈다.
“... 어쭈, 난쟁이. 자신 있냐. 나한테 장난을 걸다니 말이야.”
“그러게 누가 귀 양쪽 다 막고 노래 듣고 있으래? 무슨 노랜데? 또 그 자랑하는 그 밴드야?”
“고럼 고럼. 너도 들어보지 그래? 귀를 타고 흘러내리는 노래에 몸을 맡기다 보면, 너도 또 하나의 팬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참나, 난 해외 가수는 몰라. 가자, 좀 있으면 야자 시작하겠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됐나? 가는 길에 빵집이나 들렀다 가자.”
“오키. 네가 쏘는 거지? 저번에 빌린 돈도 안 갚았잖아?”
“야이, 내가 돈이 어딨다고 그러냐. 음료수라면 하나 사줄게.”
이어폰이 연결된 휴대폰을 대충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나는 책걸상에 걸려있던 가방을 빼내어 매었다. 휴대폰을 넣은 주머니의 반대쪽에서 무언가 덜그럭거렸다. 맞다. 왜 이걸 오늘 들고 왔지? 어째선지, 오늘은 무언가 해야만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무시하며,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어 뒷문을 통해 반을 벗어났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학교 건물을 벗어났다. 어둑어둑 해가 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위로 두고, 나와 그녀는 교문을 향해 걸었다.
“그래서, 오늘은 야자 안 해도 되는 거냐? 대학 좋은 데 간다며.”
“그거 관련돼서 선생님이랑 얘기하다 늦었잖아. 오늘 하루 정돈 괜찮겠지. 오랜만에 노래방이라도 갈래?”
“노래방 좋지. 근데 어쩌냐. 이 오빠가 돈이 많이 없다. 빵이나 먹고 노래방은 다음에 가자.”
“치이, 한동안 네 그 이상한 밴드 노래 들어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면서. 쩨쩨하네 진짜.”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록 밴드라고!! 팬 수만 따져도 수천만은 그냥 넘을 거다! 그리고, 밴드 애들이랑은 화해할 거야. 아마.”
“예이예이, 그래 봤자 20년도 전에 해체됐다며. 그 좋은 목소리로 옛날 노래만 부르고 있으면 어떡하냐. 가끔은 발라드나 가요도 좀 불러라.”
“해체는 아니거든!! 그리고 요즘 노래는 소울이 안 느껴진다고! 노래란 자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강렬해야 하는 법!! 바로 그 유명한 ‘K’ 명언이지.”
“... 언제는 잔잔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게 최고라고 하더니.”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지. 너도 이 노래들을 들어보면, 그 두 개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예예, 그러시겠죠. 됐고, 오늘은 학원도 쉬니까 이 누나랑 좀 놀아주라. 지금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죽어 나.”
“뭐냐, 몰래 빠지는 거였나. 그럼 지금 당장 너희 어머니께 전화를…”
“어허, 씁. 내가 노래방 쏠게. 2시간만 놀다 가자.”
“그럽죠, 공주님. 물주가 가자는데, 어찌 반대를 하겠나이까.”
간단하게 농담이 오가며, 우리는 교문을 벗어났다. 단정한 단발에, 검은 테의 안경까지. 오랫동안 지내온 소꿉친구지만, 최근 들어 그녀와 함께 걷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가는 것이 무서웠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그녀와 “친구 이상”의 관계가 가능한 것인가 두려웠다.
“... 야, 멍하니 뭐하냐? 생각해보니 빵집은 이미 지나왔잖아. 너, 음료수 안 사주려고 술수를 쓰네?”
“어어? 아, 음료수는 가게 가서 사줄게. 그것 정돈 내가 사야지 그래...”
“... 너 요즘 이상하다? 자주 멍 때리기도 하고, 내가 장난치면 가끔씩 반응도 이상하고?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 숨기는 거? 내가? 혹시, 망상증 관련되서 진단받은 거 없냐? 가서 약이나 먹어라. 숨기기는 무슨.”
“이게, 순수하게 걱정돼서 물어봐줬더니.”
그녀가 나에게 헤드락을 걸어왔다. 그녀의 몸에 내 피부가 닿았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벗어나려 애썼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는데… 세월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아니면 감정이라는 것이 문제인 걸까… 벚꽃잎이 떨어지는 하굣길을 지나, 우리는 같이 걸어갔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딸랑-.
노래연습장이라고 써진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그녀가 들어서고, 카운터에 앉아있던 이가 일어서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아, 반가운 얼굴, 학생인 내가, 교장 선생님보다도 더 자주 보게 되는 얼굴.
“... 이야, 너희들이네. 학교는 어쩌고? 야자는 안 하는 날이냐?”
“손님이 들어왔는데, 인사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짜식이, 인사를 바라거든 여친 달고 오지를 말던가.”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도 노래 부르러 왔어요.”
“아이고, 언제 봐도 착하단 말이지. 진수 저 놈처럼 볼장 다 본 놈도 아니고 말이야.”
“아, 형. 볼장 다 봤다는 게 뭐에요. 단골손님한테 말이 심하잖아요.”
이 노래방을 온 지도 몇 년이 된 거 같다. 처음엔 친구 따라왔던 곳이, 밴드에 맛이 들리니 요 몇 년은 자주 들락거렸다. 보컬 연습도 있지만, 나만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부른다는 게, 마치 내가 그 밴드의 보컬이 된 거 같았다. 관객은 적지만 말이다.
“아아, 그래라. 여기 올 시간에 공부나 해라 임마. 곧 수능도 치는 놈이 노래방이나 들락거리고 말이야. 여친 실망시키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대학은 가야지.”
“아니, 여친 아니에요. 제가 왜 얘랑…”
“뭐 어때. 싸장님~ 오늘도 커플 서비스 주시는 거죠? 그거 기대하고 왔다구요!”
“아이고, 손님. 당연히 드려야 하지요. 대신에 10시 전에는 나가고, 음료수 두 개 들고 가. 진수 놈 노랫소리 값이다 하고 생각하고.”
“와우! 우리 사장님 최고! 감사합니다!!”
그녀가 사장형과 아주머니 만담 떨듯 담소를 나누며 계산을 하는 사이, 나는 조용히 카운터 옆 냉장고로 가서 음료수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 이천 원이나 하는 거금을 아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물로 지출이 컸다. 언젠가는 주려고 주머니에 넣어 다녔는데 적당한 타이밍을 못 잡았다. 오늘 노래 부르며 줘버릴까?
“... 방은 보다시피 다 비어있으니까, 항상 가던 데로 가고. 안에서 이상한 짓 하면 안 된다.”
“네! 진수가 그러면 제가 두들겨서 해결할게요! 가자, 지금 부턴 1분 1초가 아깝다.”
웃으며 앞장서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가게의 안에는 평일이라 그런 것일까, 정적만이 흘렀다. 주말이었다면 지금쯤 각 방에서 노랫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직선으로 된 복도를 걸어, 끝에서 오른쪽 문 윗면에 6번이라고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이 가게에 오면 항상 이 방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정석이 된 거 같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선곡은 내가 할래. 이번에 신곡 나온 거 등록됐을 려나~”
“그래라, 어차피 내가 부를 노래는 정해져 있으니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리모컨을 만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방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음반 기기의 화면에는 남은 시간과 그녀의 검색창으로 가득 찼다. 나는 들고 온 음료수를 테이블 위에 얹어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나는 그녀의 선곡을 기다렸다. 어차피, 대중가요나 부르려니 했다.
“아, 있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나요?’ 오늘의 첫 곡은 이거!”
“엑, 뭐야, 그 발라드 같은 제목은… 첫 곡부터, 너무 분위기 낮추는 거 아니냐?”
“어차피 네가 신나게 불러 재낄 거면서 무슨. 됐고, 내가 노래 부르는 거나 잘 보시라!!”
불이 꺼지고, 미러볼이 빨강, 초록, 노랑의 빛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천장에 달려있던 스피커에서 잔잔한 전주가 시작됐고, 그녀는 방 안에 준비되어 있던 마이크 잡았다. 노랫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다. 날 따라서 노래 부르는 데 취미를 붙인 듯했다.
“흐흐흠~. 그대, 사귀는 사람은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있는 사람은 있죠.’
“저는 어떤가요- 저는 좋은데 말이죠~”
‘예, 나도 좋습니다.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죠.’
“혹시라도 마음이 있다면~ 편지 한 통이라도 남겨주세요~”
‘글재주는 없어서 편지는 별로라서요. 가능하면 말로 하는 게…’
“하늘이 너무나도 푸르네요. 정말 고백하기 좋은 날이에요.”
‘아아, 그러게. 정말 너 같네.’
그녀의 노래 가사에 대답하듯. 나는 속으로 터져 나오는 생각을 그저 속으로만 주워 담았다. 그녀의 청아하면서도 달달한 목소리는 내 귀를 기쁘게 했지만, 내 마음은 힘들게 했다. 하아,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흔들리는 미러볼의 불빛이, 그녀와 나의 얼굴을 비추어 돌아갔다.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그녀의 노래는 이미 끝나 있었다.
“... 이야, 난쟁이 노래 실력이 늘었네. 그거 드라마에 나온 노래였나?”
“응. 재밌게 봤는데 노래도 좋더라고. 하아, 나 너무 잘 부르는 거 같아. 이러다 가수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어이구, 자만이 하늘을 찌르네요. 이제 내 차례 구만. 좋았어. 사랑으로 들어왔으면 사랑으로 나가는 법.”
“설마, 또 그거야? 그 러브 페스티벌인가 그거?”
“네가 떨어뜨린 분위기를 바로 잡는 노래로는 이거만 한 게 없지. 자, 바로 시작합니다.”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있던 리모컨을 잡아 빠르게 번호를 입력했다. 후후, 이미 애창곡 번호는 머릿속에 다 저장한 지 오래지. 또 한 번 미러볼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전에 흘러나왔던 노래와는 전혀 다른 전주가 튀어나왔다. 시작부터 울려 퍼지는 드럼 소리, 기타 튕기는 소리와 함께, 보컬의 코러스가 울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벗어났다. 그 좁은 방 속에, 나는 약간의 공간을 무대 삼아, 그녀라는 관중에게 노래했다.
“... Anybody find love- Come here. Let's start the festival!!”
“어예-!!”
솔직히 말하면, 노래 가사의 의미는 잘 모른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걸까, 그저 인터넷에서 본 걸 그대로 부를 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들의 노래를 부를 때면 세상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진짜 가수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쏟아내는 열정이 실력으로 나와주는 걸까, 내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진짜 가수가 부른 거 같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그래 봤자, 진짜 밴드 보컬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 명확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만족하는 수준이면 충분했다. 그녀가 만족한다면 더 좋았다.
“... to find love- Tonight, I am Cupid!!”
첫 곡이 끝났다. 노래가 마무리되고, 나는 좋아하는 밴드의 제스쳐를 취했다. 한 쪽 팔을 높게 뻗었다. 하하, 노래에 집중해서 끝나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수준이 됐다. 하지만 뭐랄까… 조금 쑥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 나에게 물개박수를 쳐줬다.
“키야, 진짜 우리 진수 실력 하나는 끝내줘요! 진짜 전국 노래자랑이라도 나가보지? 우수상은 받을 거 같은데 말이야?”
“휴우, 부끄럽게 이 정도로 무슨. 됐고, 1분 1초가 아깝다며, 빨리 다음 곡이나 불러.”
“아, 그렇지. 보자, 다음으로 하려고 했던 곡이…”
그녀가 좋아해 주면 기뻤다. 그 뒤로 우리는 남은 시간을 계속해서 소리 질렀다. 갑자기 시작되는 랩을 맞받아치면서, 인터넷에서 들어본 거 같은 러시아 수도자에 관한 노래도 튀어나왔다. 쟤는 저런 걸 어디서 알아오는 거지? 결국 땀이 흠뻑 젖은 우리는 뜨거운 공기가 감도는 방을 벗어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이야, 대단해.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냐. 젊은 게 확실히 좋긴 좋구나.”
“오랜만에 신나게 놀았어요. 서비스 고마워요 사장님. 아, 나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래라, 빨리 돌아가자. 늦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카운터에는 나와 사장형 두 사람만이 남았다. 다행히 우리가 노는 사이 가게 안에는 두 여 팀이 들어온 듯했다. 여기가 망하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 그래, 고백은 했고?”
“갑자기? 고백을 왜 해요. 사귈 것도 아닌데…”
“임마,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게. 내년에 대학 가면 만나지도 못해 짜식아.”
“... 그러면, 더 좋은 사람 만나겠죠.”
“에휴, 저런 애를 어디서 또 만나려고 그러냐…”
“그, 싫어하지 않을까요… 가진 것도, 능력도 없는데 말이에요.”
“... 그게 걱정이면 바뀌려고 노력이라도 해야지. 그리고, 네가 싫었으면 이렇게 둘이서 안 다니지 않을까? 그리고 학생이 무슨 그런 거 까지 걱정하냐.”
“... 그렇네요. 선물 비스무리 한거는 준비했는데, 고백 방법은 모르고… 형, 혹시 좋은 수 있어요?”
“이게 염장을 지르나, 모태솔로가 그걸 어떻게 아냐. 몰라, 그냥 꽃잎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 밑에서 딱 질러버려. 날씨도 좋잖아. 최근에 말이야.”
“날씨랑도 연관이 있나… 하아, 실패하면 어떡하죠. 살아서 말을 나눌 줄 아는 여자는 엄마랑 쟤뿐인데 말이죠.”
“무서우면 평생 나처럼 살던가. 나중에 다른 남자가 생기면 만나 달라고 해도 못 만날걸.”
“... 그건… 조금…”
“응? 무슨 얘기하고 있어? 내 욕하는 건 아니지?”
나는 순간 놀라 옆을 돌아봤다. 볼일을 다 본 그녀가 물로 젖은 손을 털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방금까지 나눴던 이야기를 다 들은 건 아니겠지? 그때였다. 카운터 옆으로 종소리가 울리며 술에 취한 아저씨들의 무리가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으로 봤을 때, 회식이 끝나고 2차로 놀러 온 듯한 회사원들 같았다.
“아, 어서 오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나요. 고민되면, 일단 질러보고 후회해봐. 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가보고.”
“예, 형도 고마워요. 가자.”
“무슨 얘기래?”
나와 그녀는 그대로 가게를 벗어나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4층에서부터 천천히 흔들리는 밀실 속에 우리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나는 애써 휴대폰을 꺼내 쳐다봤다. 시간은 9시 40분. 나는 애써 침묵을 지키며, 옆으로 몰래 눈알을 굴렸다. 옆면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고쳐 만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백이라… 어쩌면 그녀와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마음 한 구석에서 그렇게 느껴져 왔다. 이상하다. 걱정의 범주를 벗어나, 확신의 영역까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선물은 언제 줘야 하지. 고백하며? 하기 전에? 그저 계속해서 주머니 속 상자를 주물럭 됐다.
“... 야, 문 열렸는데 뭐하냐. 빨리 가자.”
“어? 미안, 잠시 생각하는게 있어서. 좀 멍하니 있었네.”
승강기의 문은 이미 활짝 열려, 반대쪽에 위치한 계단마저 보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녀 또한 나를 따라 나왔다. 집까지 20분,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구나. 이 시간 안에 결판을 지어야 한다. 어째서인지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건물을 벗어나, 시내를 걸었다. 평일 10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환하게 전조등을 켜고 다니는 자동차가 많았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걸었다. 생각해보니, 무슨 얘기를 했는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붉은색을 내비치는 신호등에 움직이던 두 다리가 멈췄다.
“... 그러니깐, 싸웠으면 화해를 해라. 이 말이지. 너한테 맞춰 줄 여건이 되는 애들은 걔네들 뿐이잖아.”
“... 그래, 말싸움한 거치곤, 꽤 오래가네.”
“보컬로만 학교 축제를 나갈 수는 없잖아? 걔네들도 대입 준비하면서 후배들을 위해 학교 축제에 특별 공연하겠다고 나선 거고, 좋은 추억이나 포트폴리오로 만들 수도 있고…”
고백, 고백, 고백. 어디가 좋을까. 어떤 멘트가 좋을까. 반응은 해줄까. 싫어하지는 않을까. 머릿속에는 이미 그녀에 대한 생각이 한가득했다. 여기서 집 까지 가면서 최적의 장소는… 그래, 거기를 생각 못했네. 옛날에 드라마에도 나왔던 거기…
문득, 머릿속에서 한 장소가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그곳을 점찍었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다. 죽든 살든, 튀겨지든 삶아지든, 거기서 결판을 낸다. 한동안 내 마음을 어지럽힌 이 감정에 대한 결론을 내는 날이다.
걸었다. 그녀와 같이.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몇 개의 오르막을 올랐다. 슬슬 아파트가 자그마하게 보여왔다. 그리고, 그 장소 또한 가까워졌다. 아니, 이미 눈 앞에 있었다. 날이 적당히 좋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바람이 많이 불지도, 적게 불지도 않는… 봄의 밤 내음이 코를 한가득 채웠고, 따뜻한 공기를 가슴속에 한가득 채웠다. 이제는 그저 말을 꺼내는 것 만이 남았다.
달이 하늘을 밝혔고, 거리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길목에는 위에서 떨어지는 꽃잎으로 반은 검은색이, 남은 반은 분홍과 새하얀 모습을 보였다. 나는 가로등 밑에 섰다.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나와 그녀를 비췄다. 진짜 한 걸음만이 남았다. 나는 뒤돌아 그녀와 마주 봤다.
“... 야, 혹시…”
“아니, 없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잘랐다. 순간 고백도 전에 차인 줄 알고 심장이 멈췄다. 뭐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반응했다. 설마, 쟤가 초능력이 없는 일반인이라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조용하네? 남친, 없다고.”
“... 난 거기까지 말 안 했는데.”
“그래? 그럼 뭐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말해봐.”
“... 아니, 그. 오늘 즐거웠냐고…”
“흐음… 그렇게 나오네. 항상 정곡이 찔리면 이상하게 빠져나가려고 하더라.”
으읔, 아픈 곳을 찌르면서 들어오는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남친은 없는 거네. 다행이다. 골대에 콘크리트라도 발려있는 지도 모르고 골을 넣으려고 시도하려 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네.
“... 계속 말이 없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빨리 말해. 늦었잖아. 부모님이 의심하겠다.”
“아니, 그. 저기…”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뒷목을 어루만지며, 이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한 타개책을 생각해내려 힘썼다. 하지만 역시 그런 게 금방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사랑하고 있는 상대를 앞에 두고 조마조마하고 있는 어린애일 뿐이니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는 안 물어보네?”
큰 한 방이 날아왔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애초에 골대가 내 방향이 아니라면, 공을 넣으려는 시도는 헛수고일 뿐이었다. 사랑에 있어, 남녀관계가 여인뿐이라고 생각한 불찰이었다.
“... 있어…?”
“있지.”
결정타가 날아왔다. 변칙성이 있는 펀치도, 변수가 존재하는 발차기도 아니었다. 그 존재가 나라는 정말 자그마하고 희망적인 기대를 품는 것 만이 남았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말이 입으로는 나오지 못했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기도 하는 걸까, 머리가 뜨거워져 왔다.
“누구냐고는 안 물어보네?”
“... 그게… 미안…”
고개를 숙였다. 조금씩 눈물이 흘렀다.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면 실망할까. 혼자 사랑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포기하는 그런 모습을 그녀가 알아차릴까. 그냥 오늘의 일을 없이하고 도망칠까. 내일이 되면 그녀가 나를 보며 웃는 얼굴만으로 만족할까.
“오랫동안 좋아해 왔는데. 그 바보는 모르는 거 같아. 내가 넘어졌을 때는 손을 내밀어주고, 내가 쓰러졌을 때는 조용히 업어주는 그런 우둔한 건지, 우직한 건지 모를 그런 바보 말이야. 정말 가까이 있는데 말이야. 정. 말. 로.”
“... 크흨… 흨…”
“야, 우냐? 진짜 사내놈이나 돼서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질문이야? 부탁이야?”
그녀의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식 웃으며 날 바라보는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저 맘 한 구석에 박혀서 그 말이 나오지 못했다. 해야만 했다. 지금을 놓치면, 분명…
“자자, 찐수. 다섯을 기다릴 거야. 끝나면, 오늘의 기회는 끝. 하나…”
그녀는 조용히 뒤돌아 기다렸다. 그녀 또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체면을 차릴 필요가 있을까…? 그저 앞으로 몇 걸음이면 될 거 같았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눈물, 콧물 다 빼내며 한 번 정돈 시도해봐도 되지 않을까?
“두울~ 세엣~”
나는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손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좁혀갔다. 어떻게 하지. 어깨에 손을 얹어야 하나? 아니면 손을? 선물도 줘야 하는데... 아니면 조용히 뒤에서 안아야 하나? 이런 얼굴, 보여주기 싫은데…
“네엣. 하나 남았다!”
“있잖아. 난쟁아… 나 사실 너를…”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빛났다. 달콤한 샴푸의 향기, 그녀의 화장품 냄새. 분명, 조금이다.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끝을 내자. 무언가… 무언가가 끝나가는 느낌이야. 이건 분명…
“... 다섯… 뭐야, 겁쟁이… 적어도 이름은 불러달라고...”
진수는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쫌생이, 역시 마음 하나는 여리다니깐. 여기선 내가 나서서 두 손을 꼬옥 안아주면 분명 울겠지. 분명 그럴 거야. 그런 애였으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
“나, 이제 뒤돌아본다!”
고개를 돌렸다. 분명, 눈물 콧물 다 빼내고 있는 울보가 날 바라보며 서있겠지? 앞에서 안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래, 그걸로 가자. 평생에 한 번인데.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야, 이… 겁쟁… 어…?”
그 어디에도 진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을 밝히는 불빛 속에는 나 혼자만이 홀로 서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그래도 도망칠 애는 아닌데?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어야 할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날의 끝이었다. 그렇다. 진수는 사라졌다. 그것도 감쪽같이 말이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이 마지막이었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3년의 시간을 말이다.
“... 그래,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네. 진수도 너 예뻐진 거 봐야할 텐데 말이야.”
“돌아오면 일단 때릴꺼야. 진짜 많이, 엄청 많이 말이야…”
“하하, 내 몫 까지도 때려줘. 그 이상을 맞아도 싼 놈이야.”
잔잔한 커피 향이 흘러나왔다. 도심의 한 카페, 나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팔걸이에 팔을 얹고, 턱을 괴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다. 그 날처럼 말이다. 커피잔이 놓인 나무 테이블의 건너편으로는, 아직 머리가 짧게 깎여 있는 한 남성이 앉아있었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그래, 꼬마돼지. 진수 얘기하자고 부른 건 아닐 거고… 전역한 지 얼마 안 돼서 웬 일 이래?”
“아, 맞다. 그 얘기가 있었지. 잠시 기다려주라.”
꼬마 돼지, 진수가 포함되어 있던 밴드의 드러머였던 애다. 그 바보가 사라지고 밴드는 공중분해, 학교 축제에 나가려던 계획도 취소, 이 경우는 밴드 애들보다 선생님들이 더 아쉬워하셨다.
수많은 일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학생 하나가 사라졌다. 선생님에게도, 경찰분들에게도, 진수 부모님 에게도… 그날 밤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당연히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몇 번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CCTV를 통해 영상도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그 날, 그 장소, 그 시간대에 해당하던 모든 영상이 사라졌었다. 전단지도 돌렸다. 인터넷으로 조사도 해봤다. 아무것도 나오지 못했다.
결국 학교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나는 한동안 별의별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뭐,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수능이 다가오자 관심은 빠르게 식었고, 다들 자기 살 길이 급급했다.
결국 행방불명이라는 네 글자와 나 혼자만이 남았다. 진수의 마지막을 본 마지막 사람으로 말이다. 졸업하고, 대학도 갔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났다. 미팅도 나가봤다. 진수를 잊으려고 노력도 해봤다.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실패했지만 말이다.
“... 아, 여기 있다. 그 진수가 좋아하던 록 밴드 있잖아? 좋아 죽던 그거 말이야.”
“20… 아니, 이젠… 상관없나. 옛날에 해체했다던?”
“그렇지. ‘K’였나, 보컬이 죽고 해체되다시피 했지만, 그의 기일을 맞춰서는 각 나라를 돌면서 위문 공연 비슷하게 투어를 돈다고 하더라고. 그게 이번 년에는 우리나라더라고. 날짜는 다음 주.”
“근데 갑자기 왜?”
“운 좋게 예매가 성공해서 표가 있었는데… 나는 친구 결혼식이라. 쭉정이는 그날 종교행사가 생겨서 못 가게 됐고, 멋쟁이는 해외여행 중. 그래서 너 주려고.”
“... 왜 나야? 다른 사람들도 많을 거 아니야…”
“... 너도 알잖아. 그 자식 옆에서 그 밴드 얘기 가장 많이 듣고… 아니지, 걔 옆에 가장 많이 붙어있었고, 가장 친했던 게 너잖아.”
“... 세계적으로 유명하면 예매도 힘들었을 텐데...”
“그게, 사실 이상한 이벤트 응모에 당첨됐다고 하더라고. 나랑 다른 애들 전부.”
“... 그거 사기아냐?”
“나도, 다른 애들도 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이상하게 여겼지. 다들 무시하기로 했는데, 난 혹시나 해서 받아보기로 했어. 근데 날아오더라고. 진짜로 말이야.”
“... 나중에 갔는데 튕기는 거 아냐…?”
“그래서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해 봤지. 근데 진짜 있어. 일련번호로도 검색이 된단 말이야.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했지만, 너라면 관심이 갈까 해서 말이야.”
“... 좋아, 나한테 주라. 대신에 사기거나 하면 나중에 돈까스로 만들어 버린다.”
“하하, 그거 오랜만에 들어보네. 톡으로 보내 놓을게. 대신에 오늘 커피값은 계산해주라. 지갑을 차에 놓고 와서 그래.”
짧은 만남이 끝났다. 나는 차를 태워준다는 꼬마돼지를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꼽고, 노래를 틀었다. 그 날, 진수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이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구멍이 뻥하고 뚫린 느낌이었다.
“한 번 정돈… 가볼까… 걔가 좋아하던 밴드…”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왔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런 일로 흘리기엔, 너무나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 가보자. 그 녀석이 좋아 죽던,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게 뭔지 한 번 두 눈으로 보러 가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공연 당일이 되고 나니 괜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현장의 사람들은 다른 거 같았다. 기다란 줄을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시끌벅적했다. 눈 앞에는 거대한 콘서트장과 입구가 보였다. 분명,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선 가장 큰 공연장이라고 알고 있었다.
“...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인가.”
분명 나 혼자는 아니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진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좋아 죽었겠지…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제야 그 밴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했다. 바보를 잊으려, 일부러 듣지 않고,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이다면 파격적이고, 획기적이다면 획기적인 그런 밴드. 원래는 드럼, 베이스, 기타리스트의 세 명이 보컬도 분담하며 했지만, ‘K’가 합류하며 몸집도 커졌다고 한다. ‘K’에 대해선 수많은 소문이 돌았지만 결국 밝혀진 게 없다시피 하다…
“... 이건 뭐, 비밀 단체도 아니고.”
확실한 건, 그가 동양인이었다는 것과, 죽을때 까지 미혼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루머가 돌았지만, 그저 소문만으로 만 끝났다. 누구는 그가 중국인이라고 말하기도, 재능을 인정받지 못해 음악계에서 도망쳐 나온 피아니스트라고도, 내연녀가 10명이 넘는 호색한 이라고도 했다. 사생활이 문란하다고도 하고, 사실 그가 결혼을 안 한건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 결국 이도 저도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거네.”
시간이 적당히 흘렀을까, 공연 시작 전 입장이 시작되었다. 하나씩 줄어드는 사람들을 기다리기를 50분,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꼬마돼지가 홈페이지까지 들어가서 확인했다고 하니, 큰 문제는 없겠지…?
“표 보여주시겠나요?”
“아,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디지털 표를 보였다. ‘소중한 분’ 그저 일련번호와 그 글귀만이 적혀있었다. 좌석의 번호도, 예매자의 정보도, 유의사항도, 그 무엇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허접했다. 정말로 이런 걸로 되는 걸까.
“...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나요?”
“아, 네에…”
갑자기 덩치 큰 아저씨들이 쓰레기장으으로 쫓아내는 건 아니겠지…?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나는 무전기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날 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괜히 신경 쓰였다.
조금이 지났을까, 정말로 양복 차림의 남자 한 사람이 선글라스를 쓴 채 나에게 뛰어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서웠다.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만화에서 보았던 패기라는 게 이런 걸까?
“... Are you SKY...?”
“... 엥…?”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저 큰 어깨 좀 봐, 분명 저기에 잡히면 순식간에 반으로 접히는 게 아닐까. 이거 설마 돼지가 날 담그려고 사기 친 건가? 학창 시절 급식에서 소시지 좀 뺏어 먹었다고 이 지경까지 오다니… 스카이? 하늘? 뭐지, 표로 사기치는 사람들을 돌려 말하는 은어인가?
“아아, 죄송합니다. 매니저 께서 많이 흥분 하신거 같네요.”
“Sir, Please leave it to me.”
큰 덩치의 남성을 뒤로, 가녀리게 보이는 여성 하나가 걸어 나왔다. 우와, 몸매 쩔어, 모델인가. 내가 봐도 반하겠는데. 천사인가. 날 거두러 온 천사가 확실해. 천사는 덩치 큰 남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눴다. 방금까지 혼란스러워 몰랐지만, 지금 보니 두 사람 다 동양인은 아니었다. 남자는 검은 머리칼에 여자는 갈색이었다. 하지만 생김새는 서양 느낌을 내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가지고 계신 티켓. 한 번만 더 보여주시겠나요?”
“아, 네에… 저기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비서 느낌의 여성이라고 할까, 검은 치마에 하얀 와이셔츠, 급하게 뛰어오느라 미쳐 상의를 챙기고 오지 못한 듯 보였다. 표 확인 차 내 휴대폰을 보고 있는 여성분을 뒤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성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으읔, 부담되는데. 저분도, 지금도 내 뒤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다른 관객들도 말이다.
“... 예, 확인 완료 됐습니다만. 혹시, 이 표 어디서 얻으셨는지 질문드려도 될까요?”
“예, 그게. 친구가 이벤트에 당첨된 걸 제가 대신 왔어요. 사정이 생겨서 양도받았어요.”
“... 그러신가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뒤에서 기다리던 남성에게 걸어가 조용히 몇 마디를 나눴다. 통과가 되든 말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슬슬 사람들의 눈빛을 받는 게 한계에 이르러 갔다. 이러다가 뉴스나 인터넷에 안 좋게 인기스타가 되는 게 아닌가 몰라… 살아서 실검을 타는 게 티켓 사기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 아, 일단은 사람들도 있으니 들어가시면서 얘기할까요. 이벤트에 당첨되시면 좌석도 특별석으로 지정되시거든요.”
“아, 네에… 가능하면 빨리 부탁드릴게요.”
나는 그제야 수군수군 거리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서커스단 광대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조별과제 발표 때만으로 충분한데 말이다. 빠르게 뛰던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디로 향하는 걸까, 조금 전 건물에는 들어왔지만, 홀 내부로 향하는 안내도와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혹시, 사람들이 없는 으쓱한 곳에 제거당하는 건가…?
“... 혹시, 진정되셨다면 말 몇 마디 더 나눠도 될까요?”
“아, 네…”
“아까는 매니저 분 때문매 많이 놀라셨을 텐데.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도 다짜고짜 들이미실 줄은 몰라서 말이죠… 그래서, 다시 묻겠습니다. sky… 한국 말로는 ‘하늘’이죠.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예…? 하늘이요…? 저 위에 있는 그거요?”
“흠… 아뇨, 파란 거, 지금은 주황인가. 그거 말고요. 같은 이름을 가진 무언가라던가…”
“... 잘, 모르겠는데요… 고등학교 때 친구 놈들이 그 이름으로 밴드를 했다는 거랑… 제,”
“지금 그 부분, 밴드라고 하셨죠? 맞는 거죠?”
“네에!? 예.. 그런데요…”
조금 전까지 침착해 보였던 여자분의 두 눈이 빛났다. 마치 무언가를 찾은 이 처럼 말이다. 여자는 또 한 번 앞장서 걸어가던 남자에게 걸어가 몇 마디 말을 나눴다. 또 한 번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정면을 보고는 걸어갔다.
일단 조용히 따라갔다. 이 길의 끝에 있는 게, 새까만 쇠창살이나 쓰레기장이 아니기를…
여긴 어딜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밝은 태양이 날 비추는… 태양? 내가 낮잠을 자고 있었던 걸까…? 머리가 몽롱하다. 나는… 누구지…? 분명 마지막은… 그래, 그녀와 함께 달을 위에 두고 있었는데… 그녀? 누구지? 하늘, 아아… 푸른 하늘…
“Son, Are you okay…?”
처음 보는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다… 영화 찍는 건가? 아무리 봐도 성직자 같은데… 거기다 영어까지 쓰네. 나 영어 할 줄은 알던가? 아니지, 나 공부 정말 못하는데… 주머니에 이건… 뭐지. 여긴… 나는…
여긴 어딜까,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이네. 한쪽은 뻥 뚫려서 무대가 관객석 채로 보이고 말이야. 여기가 TV에 나오던 그 유명한 VIP석이라는 건가… 이벤트 하나 당첨됐다고 이런 대접까지 해주는 거야? 세계적으로 유명하면 서비스도 대단하구나.
“놀라셨나요? 괜찮은 자리네요. 이 정도면 시중에서도 몇 천 수준으로 오고 갈지도 모르겠는데요.”
“아, 클라라 씨… 정말 괜찮은 건가요? 이벤트 당첨이라지만, 저 한 명을 위해 이런 데 까지 준비하시다니…”
매표소 앞에 만났던 두 분은, 오늘 공연하는 밴드의 관계자라고 한다. 여자분이 클라라, 아까 남자분의 비서이면서 부매니저 역할, 한국에 유학도 와본 적 있다고 하신다. 어쩐지 한국어가 유창하더라.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덩치 큰 남자분이 빅터, 밴드의 책임자라고 쓰고, 매니저라고 읽는다고 클라라 씨가 말해주셨다.
“... 아뇨, 이건… 아니, 돈이라면 걱정 마세요. 이미 계산이 끝났거든요. 옛날에 말이죠. 곧 시작이네요. 공연 말이에요. 어떠신가요? 두근두근 되시나요? 흥분이 넘쳐흐른다거나?”
“... 그, 사실은 저 이 밴드에 대해선 잘 몰라요. 행방불명된 친구 놈이 좋아해서 언뜻 들은 정도죠…”
“친구라… 어떤 분 이셨는데요?”
“... 바보였어요. 운동신경은 꽝이지. 사교적인 것도 아니고, 공부는 지지리도 못했죠… 그랬는데, 또 바보같이 순진했어요.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남을 상처 입히지 않을까를 엄마 배를 나와서부터 생각했을걸요…”
“...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네요. 좋아했나요?”
“그랬었죠. 어릴 때부터 만났어요. 이상하게 유치원 때부터 이어져왔어요. 처음엔 좋은 친구였는데… 사라질 때까지 좋은 친구로만 남게 되더라고요… 수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먼저 다가간다는 선택지도 있었는데…”
“... 그런가요… 고백은 없었나요?”
“있었어요. 이상하게 꼼지락 되는 날이었어요. 3년 전쯤이었죠. 아는 사람이랑 소닥 거리기도, 혼자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던 어느 날, 분위기도 잡고, 장소도 괜찮은 곳으로 정했더라고요… 근데, 사라졌어요.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건 확실한데. 결국 끝마치지 못했죠.”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밴드의 매니저라고 불리던 남자였다. ‘빅터’ 큰 덩치를 가진 그분의 움직임이 왠지 조심스러웠다. 두 손으로 무언가를 공손히 들고 왔다. 멀리서 보기에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작은 나무 상자였다. 그는 그걸 테이블 위에 얹어놓고는 조심히 물러났다.
그 상자를 클라라 씨가 조심히 당겨왔다. 나와 그녀 사이에 놓인 상자는, 큰 특징이 없는 그냥 평범한 상자 같았다. 클라라는 조심히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이 뭘까, 궁금해졌다. 이제 와서 권총 같은 게 튀어나올리는 만무했다.
“... 이걸, 받으시죠.”
한 장의 종이였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편지였다. 하늘색으로 포장된 편지 봉투를 둘러봤다. 한 면에 적혀 있는 글씨를 봤다. 영어였다. 꽤 잘 써진 글씨였다. 현지인이 쓴 건가. 나를 반대쪽을 봤다. To SKY. 아, 두 분이 말했던 하늘이라는 게 이걸 뜻하는 건가.
“... 이걸 갑자기 저한테 왜…?”
“뜯어보시죠. 그리고, 내용물을 읽어주시죠.”
그녀의 말을 따라, 나는 조용히 편지 봉투를 뜯어냈다. 붉은색의 인장도, 화려한 문양도 없이 그저 풀로 붙인 듯한 봉투를 말이다. 조심히, 크게 찢어지지 않게 힘 조절을 하다 보니, 꽤 괜찮게 뜯어졌다. 나는 봉투 안에 들어있던 편지지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히 펼쳤다.
“... 영어네요… 저, 다 읽을 줄은 모르는데…?”
“... 그런가요… 제가 대신 읽어드릴까요?”
“예, 부탁드릴게요.”
나는 편지지를 클라라 씨에게 전달했다. 초록색의 편지지를 든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내용을 눈으로 읽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천천히 내용을 그 자리에서 번역해 말해주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게, 정말로 너희들이라면 좋겠다. 오랜만에 인사하는구나.
반갑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게, 누구인지 알면… 너희는 분명 욕부터 시작하겠지.
진수야. 다시 한번 말할게. 오랜만이야
“... 진수요…?”
나는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들었다.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다. 이해하기 힘든 영어 천지였지만, 한 부분 알 수 있었다. 영어로 적힌 ‘진수’라는 글자, 어떻게 이 부분을 놓칠 수 있지? 나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장난의 정도를 벗어났다.
“... 뭐예요?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몰래카메라 그런 건가요? 갑자기 문을 열고, 꼬마돼지가 들어오는 거 아니죠?”
“... 일단 진정하고, 마저 읽어 들여도 될까요? 저희도 편지의 내용에 대해선 아는 게 전무하답니다.”
“... 만약 이게 장난이라면, 그냥으로는 안 끝날 거예요…”
나는 편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온다고? 그전에 걔가 이렇게 영어를 잘 썼나? 분명 영어 성적이 50점을 넘은 적이 없었는데…
“크흠, 그럼 계속해서 읽죠.”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작문실력이 형편없어서 말이야. 이 편지가 너희에게 전해지기는 할까.
아니면, 내가 쓰고 있는 이 편지가 존재는 하는 걸까.
그녀에게 들었을 거야. 내가 어느 날 사라졌다는 걸 말이야.
그건, 진짜야. 나도 놀라고 있어. 지금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은, 1977년의 영국의 시골 동네야.
77년이라… 이 곳에 온 지도 4년이 지났구나. 그래, 난 시간여행을 했어. 스스로도 놀라고 있어.
분명, 2018년도에 살고 있던 내가 말이야. 지금은 20세기 말에 있다니…
많은 일이 있었어. 처음 눈 뜬 곳은 어느 초원이더라고, 거기 한가운데에 누워 있던 날. 올리버 씨가 발견해서 거두어주셨어. 아무 말도 통하지 않고, 기억도 없던 날 말이야. 절실한 교인이셔, 착하고, 자상하신 분이야.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했어. 드라마에서 본 단어 정도만 튀어나오더라고, 무엇보다 처음에는 약에 취한 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 내 이름도, 살던 곳도, 너희들도 말이야.
그게, 조금씩 기억나고, 이 곳에도 적응해 갔지. 영어도 배우고, 노래도 불렀어. 이런 상황 속에서도 목소리는 죽지 않더라고, 그 덕에 성가대에도 끌려가고 그랬어.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나랑 안 맞더라고.
너희들에게는 미안해.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서 말이야. 그런 내가 부탁하긴 미안하지만, 편지를 쓸 거야. 앞으로 말이야. 그 편지를 읽어줘. 그리고, 그녀에게 전해줘.
그 날 있었던 다툼, 사과하지 못해서 미안해. 의견이 충돌하면, 그저 합의점을 찾으면 되는 건데 말이야.
1977년, 바람이 적적히 부는 날.
-진수가
… 정말 진수인 걸까. 진수가 그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일까. 클라라 씨가 읽어주는 내용은 정말 그 아이가 쓴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째서 돌아오지 않은 거지? 영국이라고? 시간 여행? 머리가 복잡하다. 마음이 심란했다.
“... 다음 편지 읽어 드릴까요?”
“예, 전부 다요.”
클라라는 다음 편지를 꺼내 뜯었다. 마치 드라마의 다음 화를 기대하듯, 나의 심장과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이제 와서 장난 일리가 없다. 아니 장난 이어선 안된다.
바람이 좋은 날이야. 마치, 내가 18년에 있던 마지막 날 같아. 기억은 안 나지만 말이야.
여기 날씨는 적응하기 힘들어.
낮은 덥고, 밤은 추워, 거기에 가끔씩은 예상도 못한 비가 와.
아, 그리고 재밌는 친구들을 만났어. 밴드를 한다고 하더라고. 내 목소리가 맘에 든대. 노래도 말이야. 짬날 때마다,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던 게 이렇게 결실을 맺은 건가?
밴드 보컬을 맡아줬으면 한다고 하더라고, 솔직히 말하면 너희들이 그리워, 부모님도 그렇고,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일단은 보컬직을 맡기로 했어. 임시로 말이야. 언젠가는 꼭,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말이야. 그렇겠지?
1978년,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
-진수가
다음… 그 다음…
결국 밴드에 정식적으로 합류했어. 밴드 이름은 아직 미정인데. 어쩐지 기분이 찝찝해. 18년도까지의 기억도 얼마 안 나고 말이야. 이러다 여기에 박혀 살게 되는게 아닐까?
1980년, 밴드 정식 보컬이 된 날.
-진수가
공연이 있대. 여기서 큰 한 방을 터트릴려고 한대. 어쩌면 영국 전체를 휩쓸 큰 밴드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계약서에 싸인할 때, 내용을 잘 읽어봤어야 하나?
1984년, 큰 공연이 준비되었던 날.
-진수가
이름도 꽤 날리게 됐어. 들어오는 돈으로 너희들 선물을 살려고 했는데. 어떻게 들고갈까를 생각하니 방법이 없더라고. 그러고 보니, 이 편지는 어떻게 하지? 땅에 묻어나야 하나?
1987년, 순회공연이 계획된 날.
-진수가
구름이 멋있어. 너희도 이런 끝내주는 구름을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몸집도 커졌어. 멤버들과의 마찰도 말이야. 전과 같은 실수를 할까 봐 무서워. 이번에는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아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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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과 싸웠어. 그냥 뛰쳐나와 버렸어. 비가 오네. 괜스레 하늘에다 소리나 질러봤어. 젠장, 신이든 누구든, 그냥 날 돌려 보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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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도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어. 지금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너희들 얼굴도 말이야. 과거로 온 지도, 15년이 지났네. 이젠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어. 이러다가 그냥 너희를 만나러 가는 게 빠를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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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좋지가 않네. 의사가 그러는데 오래 못 산대. 현대 의학으론 못 고친다나, 나한테는 과거 의학인데 말이야. 돌아가면 고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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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아저씨가 돌아가셨어.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 같이 그분이 거두어 준 아이들이 말이야. 가실 때는 행복한 표정으로 가셨네. 나도 끝에는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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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여, 이제야 너희들이 똑바로 기억나는데 말이야. 그녀가 떠오르네. 이상하게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안 떠올라. 항상 옆에 있고, 내가 뭐라 해도 받아주는 착한 아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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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까지 1년 남았어.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같네. 지금은 나도 너희도 태어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곧 이야. 너희도 세상이란 걸 보게 될 날이 말이야. 이제야 그녀의 이름이 하나씩 떠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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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21세기가 됐는데. 더 이상 몸이 못 버틴데. 나도 느끼고 있어. 정말 조금인 거 같은데. 진짜로. 진짜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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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하지 못하게 되면, 편지는 다른 멤버들과 관계자분들에게 맡겨놓을게.
미안하지만, 여긴 온 첫날에 적어둔 너희 전화번호도 그분들에게 전할 거야. 너희들을 잘 구슬려낼 수 있을만한 이유가 생겼으면 좋겠네. 다짜고짜 찾아가면 상대도 안 해주겠지?
아아… 이게 무슨 일이지? 어째서, 어째서? 정말이야? 이게 다 진수가 쓴 거라고? 15년이나, 20세기는 무슨 말이야.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거야? 그건 그렇고, 왜 이 편지들을 이 사람들이 들고 있는 거지? 버티지 못한다니? 설마…?
“... 이게 마지막 편지 입니다만… 본인이 보는 게 가장 좋겠군요.”
클라라 씨는 마지막 하나를 조심히 펼쳐보고는 다시 접어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조용히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하늘색의 편지지… 조용히 접혀있던 종이를 펼쳤다.
안녕, 난쟁아?
이게 마지막인 거 같아. 돈도 인기도 넘쳐나게 됐는데. 21세기에도 병은 고칠 수가 없대.
난 그저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고작인 거 같아.
보면서 알겠지만, 드디어 한글이 다 떠올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책이라도 한 권 사서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18년이나 남았어. 너한테 까지 말이야. 내가 사라졌을 그날까지 말이야.
지금 가면, 우리 부모님은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싫네. 어째서 일까.
펜을 쥘 힘도 얼마 없는 거 같아. 한 글자 한 글자가 힘겨워.
마지막이 기억나. 그 가로등 밑에서 말이야. 전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어. 드디어 말이야.
사랑해. 싫다고 해도 좋아. 잊었어도 좋아. 이제야 겨우 전할 수 있어.
미래가 되지 못한다면, 과거에서 끝을 내겠어. 직접 만나서 전하지 못해 미안해.
이런, 그때까지면 60세 아저씨가 되는데 그때 말하기에도 좀 그런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번엔 끝까지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후회스러워.
작별이야. 하늘아.
드디어 고백을 전한 날.
-널 사랑하는 진수가
“아아, 아아아아… 아아!”
그저 울었다. 진수가. 그 겁쟁이가. 그 못난 놈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항상 있었구나. 그저 모르고 있었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 지금 여기엔 이미 그 녀석이 없는데 말이야.
“... 유언장에 기록된 대로, 편지 84통이 담긴 상자 하나, 고인이 생전 살던 저택 한 채, 그리고 저택 관리비로 사용된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비용 중 30%가 하늘 양의 앞으로...
빅터라고 불리던 남자가 클라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보며 몇 마디 말을 했고, 그의 말에 클라라가 동의했다.
“예, 그렇네요. 돈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날, 공연장을 한가득 채운 외침은, 환호와 열정뿐만이 아닌, 비탄과 그리움이 섞여 퍼져나갔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진실과 끝내지 못했던 사랑의 후회.
하늘은, 또 하나의 하늘을 향해 그저 소리 내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