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님, 사령관님!”
구 인류의 유적을 탐사하고 돌아온 엘라가 부산스레 나를 찾았다.
“저, 폐허에서 엄청난 걸 찾았어요!”
“보아하니 또다른 보드게임을 가져온 모양이네.”
엘라가 이렇게나 호들갑을 떠는 것은 대부분 유실되었던 구인류 시절의 보드게임을 발견한 경우이다.
“헤헤, 역시 바로 들통나 버렸네요.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혀를 빼물며 에헤헤 웃는 엘라.
“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까 말이지. 그래서 뭘 찾아왔니?”
“듣고 놀라지 마세요! 무려무려, [유희왕 카드게임]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입수했어요!”
엘라는 중대발표라도 하는 마냥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열렬한 호응을 기대하는지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았지만….
“뭔데, 그게?”
“엑.”
내 물음에 그대로 굳으며 외마디 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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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몬스터 카드, 마법 카드, 함정 카드의 세 카테고리가 있고, 상대의 라이프 포인트를 먼저 0으로 만들면 이기는 거란 말이지?”
“네. 좀더 세세하게 들어가면 더 복잡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래요.”
“과연…. 그럼 한 번 해볼까?”
룰 설명을 들으니 꽤나 재미있어 보이길래, 시험삼아 엘라와 몇 번 플레이해보기로 결정했다. 엘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상자를 꺼내든다.
“후후, 그러실 줄 알고 미리 프린트해왔지요.”
“역시 못 당하겠다니까.”
상자를 열자 보이는 것은 그 안을 가득 채운 카드들. 나는 엘라와 함께 카드들을 살펴보며 40장짜리 덱을 각각 만들었다. 나름대로 강해보이는 카드들로 덱을 꽉 채웠으니 엘라와 호각 정도는 되겠지?
“나는, 으음… [마도전사 브레이커]를 공격표시로 일반 소환!”
“함정카드 발동, [함정 속으로]! [마도전사 브레이커]는 그대로 파괴됩니다!”
“이런…!”
“필드가 비었군요! [쌍둥이 자매 엘프]로 직접 공격!”
“또 져버렸네….”
…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세 판이나 내리 져버리고 말았다. 엘라에게 생채기조차 내지 못한 두 판과 달리 세 번째 판에서 엘라의 라이프 포인트를 1200점이라도 깎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그렇게 풀 죽지 마세요. 플레이 실력이 매 판마다 느는게 보이는걸요. 몇 판만 더 해보면 절 이기실 수 있을 거에요!”
“별로 실감이 안 나는걸.”
격차가 너무 심해 도통 의욕이 나질 않는다. 축 쳐져 있는 날 격려하려고 엘라가 무진 애를 써보지만, 그런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럼 이번 판은 조금 다르게 해 볼까요?”
“어떤 식으로?”
“우선 제 라이프 포인트는 4000점에서 시작해요. 사령관님의 절반이죠.”
“네가 패널티를 가지고 시작한다는 얘기구나. 그리고?”
“사령관님은 첫 턴에 패 6장을 드세요. 저는 4장으로 시작할게요.”
“괜찮겠어? 이 게임은 카드 한 장 한 장이 중요하잖아.”
밸런스를 맞춘답시고 엘라가 제시한 조건이 조금 지나치게 파격적이다.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양심에 찔려 가볍게 말려 보았지만….
“뭐… 괜찮을 것 같네요. 사령관님이 상대라면.”
“...너… 그 말 무조건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
엘라가 피식 웃으며 내뱉은 말에 바로 덱을 셔플하기 시작했다. 날 그렇게나 우습게 봐? 나는 사령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듀얼리스트다. 넌 소중한 듀얼리스트의 긍지를 짓밟았어! 절대로 안 봐줘!
“의욕이 좀 생기신 것 같네요. 이왕 하실 마음이 든 김에, [어둠의 게임]으로 해볼까요?”
“그건 또 뭔데?”
“간단해요. 패자는 승자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룰이죠.”
“영혼을… 빼앗겨?”
뜬금없이 튀어나온 거창한 명칭과 괴상한 규칙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영혼을 빼앗긴다니 너무도 터무니없지만, 구인류의 광기를 생각하면 진짜로 영혼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뭐, 그냥 그런 설정이에요. 실제로 영혼을 주고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진 사람이 상대방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걸로 해요.”
“소원이라….”
“왜요? 져버릴까 봐 겁나나요?”
내가 잠깐 말을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히죽이며 날 전력으로 도발하는 엘라. 듀얼리스트의 혼이 불타오르며 저 우쭐한 표정을 눌러버리고 싶다고 외친다.
“...아니. 무슨 소원을 제시해야… 이 건방진 듀얼리스트 아가씨를 울상짓게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었어.”
“후훗, 바로 그 자세에요. 패널티가 있는 만큼 저도 이번 판은 봐드리지 않겠어요! 듀얼!”
엘라는 덱에서 카드 네 장을, 나는 여섯 장을 뽑았다. 그렇게 [어둠의 게임]은 시작되었다.
“[빙제 뫼비우스]로 [사이버 드래곤]을 공격!”
“핫, 걸렸구나! 함정 카드 [매직 실린더] 발동! [빙제 뫼비우스]의 공격을 무효로 하고 2400 피해를 주겠어!”
“그렇다면 저는 세트해둔 [도적의 7가지 도구]를 발동합니다! 라이프 포인트를 1000 지불해 [매직 실린더]의 효과를 무효로 하고 파괴! 전투는 그대로 속행해 [사이버 드래곤]을 파괴합니다!”
“이런 젠장할!”
“카드 한 장을 세트하고 턴 엔드입니다.”
엘라에게 페널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다. 엘라의 라이프 포인트가 현재 2000인 것에 반해 내 라이프는 겨우 1000. 그나마도 깎인 엘라의 라이프 포인트 2000점은 그녀 자신이 카드 효과의 발동을 위해 지불한 것이다. 게다가 필드마저도 엘라에게 훨씬 유리해, 다음 턴에 비장의 카드를 뽑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패배할 상황이다.
“사령관님 턴이에요. 한 장 뽑으세요. 한 장 정도로 뭐가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승리를 확신한 엘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날 재촉한다.
“부탁한다, 내 덱아…. 제발, 역전할 수 있는 카드를!”
눈을 감고 덱에게 빌며 조심스레 카드 한 장을 뽑는다. 한쪽 눈을 슬쩍 떠서 바라보니, 필드의 모든 몬스터를 파괴하는 [블랙홀]! 내게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카드임에 틀림없다!
“후하하하하핫! 아무래도 승리의 여신은 내게 미소지어주는 모양이구나! 마법카드, [블랙홀] 발동! 네 필드의 몬스터들은 전부 묘지로 가 주셔야겠어!”
조금 빌런스러운 대사와 함께 필드를 클린한다. 드디어 내게 승리를 향한 길이 보인다!
“이어서, 난 [배신의 여기사]를 일반 소환!”
무거운 디메리트를 가졌지만, 레벨 4에 공격력이 2000이나 되는 [배신의 여기사]를 소환한다. 마침 엘라의 라이프 포인트도 정확히 2000. 이 몬스터로 직접 공격에 성공하면, 내 승리!
“[배신의 여기사]로, 직접 공…!”
공격 선언을 하기 직전에, 엘라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그대로 멈춰섰다. 그러고 보니 엘라가 조금 전 세트한 저 카드, 대체 뭐지? 공격에 반응하는 함정카드일까?
“방금 직접 공격하신다고 했죠?”
“아니아니, 잠깐, 잠깐만.”
엘라가 세트카드를 당장이라도 뒤집을 듯이 만지작댄다. 다급하게 그녀를 말리고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공격선언을 취소하고 다음 턴 드로우를 기다려? 아니면 그대로 공격?
“사령관님? 빨리 결정해 주실래요? 원래는 시간 끄는 것도 반칙이라고요~.”
엘라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날 재촉한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져, 마음을 침착하게 다잡고 엘라를 자세히 살펴본다. 이상하게 떨리는 입가와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엘라, 블러핑 실력이 영 서투르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다 들통났어! [배신의 여기사]로, 직접 공격!”
회심의 미소와 함께 마지막 일격을 날린다.
“아아~ 악~!!”
엘라는 왜인지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며 덱을 일부러 밀쳐 필드를 어지럽히는 것은 덤이었다.
“그럼 내가 이긴거지? 소원으로 뭘 빌어 볼까….”
이제까지의 수모를 갚기 위해, 일부러 얄미운 목소리로 엘라를 놀려 본다. 진 것이 분한지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엘라.
“물러요, 사령관님! 바로 이 순간… 함정카드 발동! [인류재건 개시]!”
“뭐어?”
헌데 별안간 고개를 쳐들더니 세트카드를 뒤집으며 외쳤다. 그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상대의 공격에 의해 라이프 포인트가 0이 되었을 때 발동 가능한 카드랍니다. 효과는…!”
“효과는?”
“둘 중 하나가 기절할 때까지, 인류재건! 참고로 ‘인류재건’이란 피임 없는 성교 행위를 뜻하죠!”
“그런 카드가 있을 리가 없잖아!!”
“없다니, 바로 여기 있잖아요?”
내가 따져 묻자, 엘라는 카드를 집어 내 눈 앞에 들이댔다. 어떻게 봐도 엘라가 직접 그린 조악한 일러스트와 함께, 연필로 대강 쓴 효과가 적혀 있었다.
“야… 오리카*는 반칙이잖아.”
“저는 폐허에서 발견한 카드를 그대로 가져온 것 뿐이랍니다?”
소심하게 항변해 봤지만, 엘라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을 떨 뿐이었다.
(*오리지널 카드)
“응? 뭐야, 이거.”
바로 그 때, 양쪽으로 뻗은 엘라의 소매에서 카드 대여섯 장이 후두둑 떨어진다.
“상대의 라이프 포인트가 0이 되었을 때 발동, 인류재건…. 상대가 묘지에서 몬스터를 특수 소환했을 때 발동, 인류재건…. 한 번에 몬스터 5장 이상이 파괴되었을 때 발동, 인류재건…. 인류재건, 인류재건, 인류재건….”
하나하나 집어들어 살펴보니, 온갖 조건에서 발동해 인류재건을 하도록 만드는 오리카들 뿐이었다.
“앗, 들켰네.”
엘라가 머리를 긁으며 배시시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서야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폐허에서 카드게임 데이터를 찾았다는 것도, 내 신경을 살살 긁은 것도, 어둠의 게임이니 소원이니 운운한 것도, 패배 직전 일부러 동요한 척 한 것도, 전부 이 회심의 일격을 위한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아마 아까 전의 게임이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면, 소매에서 다른 알맞은 카드를 꺼내 세트해 두었겠지. 만약 엘라가 이긴다면 소원을 이용해 날 덮치고, 진다 해도 세트한 함정카드를 발동해 ‘인류재건’을 개시한다. 결국 게임의 승패는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킬각을 보고 있는 동안 호시탐탐 떡각을 노리고 있었다니…. 엘라 무서운 아이!’
나는 엘라의 지략에 전율하고 말았다. 과연 어디부터가 그녀의 작전이었던 것인가! 어쩌면 나는 엘라가 이번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그녀가 판 함정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자, 그럼… 긴말 필요 없이, ‘인류재건’... 해볼까요♥”
엘라가 색정적인 표정과 함께 네 발로 기어 내게로 다가온다. 충격에 빠져 몸이 굳은 나를, 엘라는 너무도 쉽게 붙잡아 덮쳐들었고….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한 가지만 말해주자면, 결과적으로 엘라를 울상짓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니까, 조금… 행복한 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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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울상=아헤가오 입니다.
오리카로 떡각을 노리는거 보면 역시 라오는 라오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라가 뒤집은 카드를 하노이의 숭고한 힘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의미로 보면 숭고한 행위를 하긴 하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