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방에서 배우는 마지막 수업, 프렌치 파인다이닝 요리에 대해 배우는 과정입니다.
서양에서는 프랑스 요리를 고급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프렌치 레스토랑 주방도 끝판왕처럼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네요.
하긴, 전에도 학생들이 장난삼아 "위Oui, 셰프!"라고 프랑스어로 대답하니까 셰프가 "너희들은 아직 프랑스어로 대답할 정도로 훌륭하지 않아! 그냥 예스, 셰프!라고 대답하도록"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니까요.
학교 부설 프렌치 레스토랑, 보쿠스(원래는 보큐즈 내지는 보퀴즈 정도로 읽지만 미국 레스토랑이니 미국에서 발음하는대로 읽어봅니다)에서 수업이 진행됩니다.
한쪽 벽면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주방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오픈키친 식당이지요.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유리창 저편으로 누군가는 불내서 태워먹고, 누군가는 혼나고, 누군가는 화내고, 누군가는 울면서 달려가는 인생 다큐멘터리를 실시간으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보다도 벽에 걸려있는 번쩍거리는 구리팬과 케익틀에 눈이 먼저 가게 되겠지만요.
보쿠스 레스토랑은 프랑스 요리계의 전설, 폴 보쿠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레스토랑입니다.
원래는 에스코피에 레스토랑이었는데 중간에 리모델링하면서 이름을 바꿨지요.
프랑스 요리계의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할아버지입니다.
이 레스토랑에도 직접 방문해서 사진도 찍고, 벽에 남긴 사인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그니쳐 메뉴 중의 하나인, 'V.G.E. 베제에 트러플 수프'를 만들어서 팔고 있지요.
제가 이 수업에서 수프 스테이션을 1지망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파인다이닝 수업은 학기 시작 전에 학생들로부터 희망 스테이션을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종합해서 배정합니다.
원래 수프나 샐러드 스테이션은 그다지 스킬이랄것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아서 기피대상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트러플도 좋아하고, 보쿠스의 트러플 수프는 더더욱 좋아하는지라 가장 먼저 지원했습니다.
비록 트러플 수프가 시그니처 메뉴이고, 가장 많이 팔리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트러플 수프 외에도 호박 수프와 돼지감자 수프가 수프 스테이션의 담당 메뉴입니다.
오전 시간에는 재료를 다듬거나 수프를 대량으로 만들고, 이른 점심식사를 한 후 레스토랑 오픈 전까지 스테이션 셋팅을 하는 순서로 돌아갑니다.
호박을 오븐에 굽고, 속살을 파내서 양파와 당근 등의 뿌리채소와 함께 버터에 볶다가 허브와 함께 옥수수 육수에 끓인 후 블랜더로 곱게 갈아줍니다. 체에 걸러낸 다음 크림과 메이플 시럽, 소금, 카이엔 페퍼를 섞으면 수프 완성.
수프만 완성이고, 곁들여서 내는 고명은 또 따로 만들어야 하지만요.
레스토랑 문 열기 전에 셋팅해놓은 수프 스테이션의 모습입니다.
왼쪽에는 돼지감자 수프, 오른쪽에는 호박 수프를 담은 통을 얼음물에 담가두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일인분씩 냄비에 담아서 바로 끓입니다.
물론 끓이는 도중에 "호박 수프 일인분 추가!" 이런 말이 들리면 "에잇 젠장!" 한 번 하고 한국자 더 퍼서 끓여야 하지만요. ㅎㅎ
오른쪽에 세워둔 물건은 '소스건'이라고 하는 도구인데 손잡이를 누르면 수프나 소스가 주르륵 내려옵니다.
액체를 정확한 양만큼 주변에 튀기지 않고 깔끔하게 따를 때 아주 유용합니다.
하나 사고는 싶은데 이래저래 주방도구를 사들이다보니 놓을 자리가 없어서 못 사고 있지요.
집에서는 그냥 국자로 뜨고, 흘린 자국은 물에 적신 티슈로 닦아내는 수밖에요.
가니쉬 셋팅이 준비된 모습. 왼쪽에서 수프가 끓는 30초~1분 동안 오른쪽에서는 접시에 고명을 예쁘게 담아야 합니다.
호박 수프와 돼지감자 수프는 손님 앞에서 고명에 수프를 부어주는, 테이블사이드 서비스로 제공되기 때문에 플레이팅이 중요하거든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프는 주문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가는 음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수업의 스테이크 스테이션(https://blog.naver.com/40075km/222499309695)처럼 손님들 밥 먹는 속도 신경써야하면 골치아플텐데,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주문 들어오면 바로 수프를 불에 올리고, 고명 셋팅하고, 쟁반에 올려서 내보내면 됩니다.
다만 주문이 연달아 들어오면 좀 긴장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요.
무엇보다도 호박수프나 돼지감자 수프와는 달리 트러플 수프는 오븐에 구워서 완성하는 방식이라 계산 잘못하면 손님이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호박 수프의 서비스 셋팅.
카부차 호박과 유자청을 섞은 매쉬드 스쿼시를 한 스쿱 떠넣고 아보카도와 세이지 허브를 우려낸 오일을 뿌린 다음,
질소충전으로 거품낸 요거트를 위에 끼얹고 쌀튀밥과 튀긴 세이지 이파리를 뿌리면 완성입니다.
흰쌀과 잡곡으로 만든 뻥튀기를 미국의 프렌치 파인다이닝에서 사용하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죠. ㅎㅎ
질소충전으로 소스에 공기를 불어넣는 건 꽤 자주 사용되는 테크닉이긴 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술이 되어버렸습니다.
파티때 질소가스 잔뜩 마셔서 환각제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조그만 질소 충전 카트리지를 판매 금지 시켜버렸거든요.
개인 카페에서 생크림 올라가는 메뉴가 사라진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럴 거면 환각작용있는 본드도 판매 금지 때리고 취급허가 받아서 쓰게 만들지, 왜 질소가스만 갖고 이런담...하는 불만이 절로 생깁니다.
돼지감자 수프.
돼지감자 껍질을 벗기는 것은 생강 껍질을 벗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울퉁불퉁하고 딱딱해서 필러를 사용하기도, 칼을 사용하기도 애매하죠.
이를 박박 갈면서 돼지감자 한포대 껍질을 다 깎고 나면 파스닙 (하얀 당근처럼 생긴 뿌리채소), 대파, 양파, 샐러리 뿌리인 샐러리악 등과 함께 버터에 볶다가 화이트와인으로 디글레이즈 한 다음 채소 육수에 끓여서 블랜더로 갈아서 수프를 만듭니다.
오렌지와 레몬 껍질을 갈아 만든 민트 그레몰라타를 그릇 바닥에 깔아주고
가니쉬로는 허브 기름에 담가둔 돼지감자와 동그랗게 모양을 낸 배 피클, 꿀을 입힌 파스닙을 얹습니다.
마지막으로 얼음물에 담가둔 허브 이파리 세 장을 예쁘게 얹으면 완성.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잘 팔리는건 트러플 수프입니다. 추가요금을 내야하는데도 주문이 계속 들어올 정도니까요.
진한 고기수프에 트러플을 넣고 파이시트지로 위를 덮은 다음 오븐에 구워내면 빵껍질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릅니다.
스푼으로 뜯으면 수증기와 함께 트러플 향기가 피어오르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트러플 증기로 촉촉해진 빵껍질도 먹고 건더기가 듬뿍 든 수프도 떠 마십니다.
예전에 분명히 트러플 수프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블로그를 아무리 찾아봐도 없길래 어디갔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단행본에 특별 원고로 썼던 걸 기억해냈습니다. ㅎㅎ
트러플 수프는 다른 수프와는 다르게 미리 초벌구이를 해서 꺼내두었다가 주문 들어오면 마지막으로 몇 분 더 오븐에서 마무리 한 다음 서비스합니다. 쟁반 하나에 여덟개씩 올라가는데, 그날 예약 상황에 따라 쟁반 몇 개를 채워야할지가 달라집니다.
손님들이 죄다 트러플 수프만 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레스토랑 오픈 전에 두 쟁반, 16개 정도 준비해놓고 중간중간 봐가면서 수프가 다 팔릴 것 같다 싶으면 또다시 초벌구이를 해서 대기시켜 놓습니다.
쭈글쭈글하게 줄어든 파이껍질 뚜껑이 오븐에 다시 들어가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게 재밌지요.
쟁반에 수프 그릇이 대기하고 있으면 든든한 기분인데 거의 다 팔리면 왠지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초벌구이 수프가 두 개밖에 안남았는데 주문이 세 개 들어오면 매우 난감하니까요.
그렇다고 왕창 미리 구워놓을 수도 없는게, 일단 초벌구이가 끝난 트러플 수프는 재활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파이 시트지만 덮어놓은 수프는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다음에 사용하면 되는데, 일단 구워버리면 보존이 안됩니다.
그래서 초벌구이 끝나고 남은 수프는 학생들이 가져갈 수 있습니다. 물론 수프 스테이션 담당인 저한테 우선권이 있지요 ㅎㅎ
수프를 커다란 갤런들이 지퍼백에 넣어서 집에 가져간 다음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쉬는 날 조금씩 꺼내서 끓여먹으면 세상 행복했는데...
그렇다고 매 끼니를 정해진 메뉴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서로 분담해서 패밀리(직원식사) 용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요.
사진에는 잘 안보이는데, 저 뒤쪽에는 제가 남는 생선 뼈들을 쓸어모아서 만든 매운탕도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계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더랬지요.
지난 수업의 레스토랑 위크와는 정반대로, 이번 수업은 그다지 바쁘지는 않습니다.
가을의 레스토랑 위크가 끝나면 크리스마스 방학이 시작될때까지는 레스토랑도 비수기거든요.
특히 눈이 자주, 그리고 많이 오는 뉴욕주의 겨울을 지내다보면 예약이 꽉 차지 않을 때도 종종 발생합니다.
물론 빈자리는 학생 특식으로 풀어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만석이기는 하지만 예약손님들이 끝없이 러쉬 들어올 때에 비하면 느긋합니다.
이렇게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며 수업을 마무리합니다.
더 이상 학교 주방에 들어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싱숭생숭하네요.
이제 남은 수업은 딱 하나. 파인다이닝 프론트 오브 하우스 (FOH: 손님에게 서빙하는 수업) 뿐입니다.
ps. 요리전문사서의 추천도서: 하루키와 크로켓 편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https://www.nslib.or.kr/info/dataroom2.asp?mode=view&number=82&gubun=)
크..매운탕 진국이겠다
수프 좋아해서인지 다 맛있어보입니다. 돼지감자로 수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파이를 숟가락으로 깼을 때 탁 퍼지는 트러플 향이 예술일 것같습니다.
매번 즐거운 책 한 권을 보는듯해서 기다려지는 글 입니다! ㅎㅎ
존나 맛있겠다 한입만 먹어보고싶다
수프도 숨은 주역이라할수있죠
매번 즐거운 책 한 권을 보는듯해서 기다려지는 글 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CIA 와 양식 전문 요리사의 세계에 대하여 덕분에 알기 쉽게 접하고 있습니다. 좋은 게시물 늘 감사합니다 ㅎ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귀한 정보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좋은 글 항상 고맙습니다
수프도 숨은 주역이라할수있죠
수프 좋아해서인지 다 맛있어보입니다. 돼지감자로 수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파이를 숟가락으로 깼을 때 탁 퍼지는 트러플 향이 예술일 것같습니다.
트러플 수프는 위의 파이지가 익고나니 뭔가 표고버섯이나 새송이 버섯의 갓처럼 되었네요. 마침 그릇도 흰색이라 정말로 버섯처럼 보이는군요
존나 맛있겠다 한입만 먹어보고싶다
막 들어와서 수업받아서 설렌다는 글 올린때가 예전 같은데 벌써 졸업반이 되셨군요 ㄷㄷ
크..매운탕 진국이겠다
수익의 90%를 바쳐야 한다는 그곳이군요...!
다음엔 어떤 글을 올리실지 기대되네요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혹시 책 내셨나요? 어떤 책인지 알려주심 읽어볼게요 :)
"이상한 부엌의 마법사"라는 제목입니당!
잘은 모르지만 스프가 아니 스프도 완전 하드코어 노가다 작업이라던데...ㅎㄷㄷ
나중에 한국에서 가게 차리실 건가욤?
질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트러플도 좋아하고, 보쿠스의 트러플 수프는 더더욱 좋아하는지라 가장 먼저 지원했습니다.' 라고 하셨는데, 이전 글들에서 언급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과정?을 선택하기 전에 CIA안에 있는 여러 레스토랑이나 그런 교육과정에서 나오는 요리들을 미리 맛볼수 있는 자리나 기회가 미리 있는건가요? 아니면 그 전에 개인적으로 찾아가보신건가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ㅋㅋ
학생들에게 매일 급식포인트를 지급하는데 이걸로 실습 교실에서 만든 음식을 사먹거나, 가끔 레스토랑에서 3코스 학생특가로 먹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