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맹의 입에서 나온 인의와
야쿠자가 말하는 인의는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인의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보다,
인의에 극단적으로 가까운 쪽과 그 반대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논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아닐까?
나는 그것이 '공감-착취'라고 생각한다.
공감능력은 대체로 지능과 비례하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2능력 중 하나다(지능과 공감).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능력이며,
이 능력은 조건(개체별 명명, 은원기억, 잦은 접촉 등 비혈연 조건 하에서 상호 호혜 관계가 형성되는 기초)이 필요하긴 하지만, 인류가 초부족사회에 적응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 능력이지 않을까 싶다.
착취는 무엇인가?
공감 능력의 반대에 있다(그리고 이것은 꽤나, 행동경제학에 기초해서 조작적으로 정의되는 성향이다).
행동경제학/신경정치학에 따르면, 착취적 성향은 결국 전두엽의 성능 수준. 특히 전대상피질의 두께와 활성 정도에 좌우되며,
일반적으로 젊은 남성은 착취적 경향성이 강하다(전대상피질의 발달=두께가 미약하고 활성 정도가 떨어진다).
결국 공맹이 논한 인의예지신은 뇌과학적인 배경을 요구하는, 특정한 생물학적인 능력인 셈이다.
일부 경영학 분과에서는 인간의 뇌의 성능이 45세 이후에 가장 정점이라고 하는데, 뇌과학과 맥락이 같기도 하고.
결국 인의예지신을 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흔히 통제할 수 없다고 믿어지는,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믿어지는바(혈당, 내재동기, 긍정정서, 유전자의 질적 수준, 보호자의 양육태도 따위에 좌우되는),
그것이 과연 논의의 여지가 있는지, 그러한 이야기들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시된다.
경험과학의 목적인 기술-설명-예측-통제인데, 통제가 불가능한 요인들의 영향력이 더 크다면,
과학은 과연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플린 효과의 종말 앞에서 감히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