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머신을 가동하고, 그 동안 소파에 앉는 느낌을 확인해본다.
세차게 앉으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몸이 튀었다. 하지만 가구점에서 저반발이라고 강조하던 이 소파는 내 몸무게 정도의 충격은 쉽게 흡수해버렸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푹신함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지만 아직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았다. 마음을 먹고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때마침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 완료 알림이 울렸다. 가보니 머그잔 안에 생각보다 제대로 추출된 에스프레소가 담겨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의 향만 맡아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한 모금 마셔보니 부드러운 쓴맛과 신맛이 아직도 잠이 덜 깬 내 뇌를 깨웠다. 지금까지는 인스턴트 커피나 제대로 내린 커피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무지는 죄다. 다음에는 깃사텐에서 제대로 된 커피를 즐겨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같이 마실 사람만 있으면 완벽한데..."
모모톡을 확인한다. 지금은 9시반. 당번 학생이 이미 사무실에 와서 업무를 시작했을 시간이다.
오늘 당번은 이로하다. 오늘이 휴일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연락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땡땡이치는 것이라면 납득하겠지만 이로하가 샬레 당번에 자발적으로 결석한 적은 없기 때문에 의문도 생긴다.
"어쩔 수 없나."
모모톡 화면의 수화기 아이콘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십여 번 들린 뒤 졸린 듯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렸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로하, 괜찮아?」
「괜찮다니 뭐가요...?」
「몸 상태가 안 좋은가 해서.」
바스락바스락 섬유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듯 했다.
「컨디션은... 졸린 것 빼고는 괜찮아요.」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고. 오늘 샬레에 올 수 있어?」
「......네?」
「오늘 샬레 당번 이로하잖아.」
전화 너머로도 이로하가 굳어버린 기색이 역력했다.
「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응, 기다릴게.」
아마 스마트폰으로 현재 시각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로하가 놀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다니 꽤나 귀중한 경험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후 큰 한숨과 함께 이로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늦잠 잤어요.」
「아, 진짜 늦잠이었구나.」
「알람을 못 들었어요. 면목없습니다. 그, 당번은...」
「대체 생각은 아직 안했는데. 오늘 못 올 것 같으면 다른 애 부를게.」
「아뇨, 제가 갈게요. 귀찮게 해서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당번의 업무는 사무실 청소나 서류 운반, 차 끓이기 등과 같은 잡무다. 당번제의 본질은 학생이나 학원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지만 그것도 중요도가 높지는 않다. 결국 당번 학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거절해도 상관없었지만 이렇게 필사적인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사고나지 않도록 천천히 와도 돼. 이따 봐.」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쯤 이로하는 잠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 아침도 안 먹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같이 먹을 점심은 넉넉하게 준비할까.
"지금 엔젤24로 가서 이것저것 사 둘까."
익숙하지 않은 홈파티를 준비하는 것 같아 설렜다. 나는 하던 업무를 잠시 멈추고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내 오른손에는 제법 묵직한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니기리과 샌드위치에 과자도 조금. 밑반찬으로 먹을 것도 몇 개 있다. 이것만으로 하루치 식비가 날아갔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지금 10시니까 이로하는 30분쯤 뒤에 오려나?"
문득 깨달으니 모처럼 내린 에스프레소를 다 마셔버린 채였다. 이런 진한 커피를 마시는 건 오랜만인데 계속 손이 갈 정도로 맛있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커피를 내리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서류 작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10시25분에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느... 늦었습니다... 허억..."
"어, 어어... 달려왔어?"
"저답지 않게... 열차 시간을 생각하면 달려도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로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어 전력으로 뛰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손수건을 내밀자 이로하는 손을 내저었다.
"필요없어?"
"제께... 있어서..."
이로하가 제복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은 약간 축축해 보였다.
"수고했어. 그보다 이로하가 봐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네...?"
"데스크 위에 있는 기계가 뭐라고 생각해?"
나는 아직도 검은 광택을 내는 새 기계를 가리켰다.
"......에스프레소 머신, 맞나요? 산 거에요?"
"맞아. 이로하도 커피 좋아하지? 그래서 좀 더 좋은 걸로 주고 싶어서 분발했지."
"......"
"유우카에게 혼나는 건 확정이지만. 아하하..."
이로하는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하듯 눈썹을 찡그렸다. 입이 벌어져 있어 안에 주먹밥을 집어넣으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은 바보인가요?"
"바보 맞을지도. 앞으로 일주일은 콩나물 도시락만 먹어야 하니까."
"그게 아니라... 지각한 걸로 화내지 않는 건가요?"
"응? 아, 그 얘기?"
아무래도 이로하는 당번을 지각한 것을 내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런 부분도 아이같다고 할까, 시야가 좁다고 할까.
"뭐, 업무 진척이 평소보다 늦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겠죠... 죄송합니다."
"아무렴 어때. 일단 커피 마실래? 이른 점심을 먹고 싶은데."
옆에 놓인 음식으로 가득한 봉지를 들어보였다. 물론 이로하와 먹기 위해 먼저 손을 대지는 않았다.
"혹시 제가 아침을 안 먹었을 거라 예상해서?"
"나도 아침을 굶어서 배가 고팠거든."
"......그런 걸로 할게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응, 그럼 지금 먹자."
그리고 우리는 소파에 앉아 눈앞의 작은 탁자에 음식을 펼쳤다. 이로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는 커피 타올 테니까 이로하가 먹고 싶은 거 먼저 골라."
"......알겠어요."
"아, 그중에 네 개만 골라. 나머지는 나도 먹어야 하니까."
에스프레소 머신에 원두를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아래 놓인 컵에 커피가 흘러나오며 향긋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꽤나 고민하는 듯 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메뉴는 에그 샌드위치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다 끓였어. 골랐어?"
"네."
"뭘로 골랐어?"
"그게, 에그 샌드위치랑 연어 오니기리랑 햄이랑... 그리고 이거요."
아무래도 내 에그 샌드위치를 가져간 모양이다. 정정당당하게 이로하에게 선택을 맡긴 결과니 불평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 나는 나머지 네 개로 할게. 여기 커피."
"우와... 진짜 에스프레소네요."
"전에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다고 했지? 그때부터 생각했던 거야."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말했지. 처음 만났을 때였을 거야."
"그런 것까지..."
BLT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건 이것대로 꽤나 어울린다.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나이 불문 언제든지 중요하다고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정말 죄송합니다."
에그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로하가 중얼거렸다.
"뭐가? 지각한 거?"
"거기다 이렇게 잘 대해주시기까지 하고.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신경 안 써도 돼. 이로하가 제일 고생했으니까."
"신경 쓰여요. 선생님에게 폐를 끼쳤으니까요."
이로하는 땡땡이를 쳐도 전차장으로서의 일을 땡땡이친 적은 없다고 한다. 이로하라는 사람은 땡땡이쳐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절묘한 균형감각으로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로하에게 있어 샬레의 당번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의도치 않게 땡땡이를 치고 말았다. 성실한 부분이 있는 이로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느끼는 듯 했다. 자책하는 말 역시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정말 신경 안 써도 돼. 중요한 건 다음이니까."
"다음, 인가요."
"다음에 당번으로 올 땐 안 늦으면 되니까. 가능하면 미리 연락도 하고."
"......다음, 이 있는 건가요?"
"있지. 나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늦잠 잘 수도 있고. 그게 우연히 오늘이었을 뿐이지."
커피의 풍미를 즐겼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기를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걸로 이 얘기는 끝. 이거 다 먹으면 언제나처럼 열심히 당번 업무를 돕는 거야. 그걸로 괜찮지?"
"......감사합니다."
옆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소리내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맛있어?"
"......맛있어요, 정말로."
이른 점심을 먹기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