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30년, 어느덧 40대 아재였던 소크라테스는 중장보병 시민 예비군으로서 소집되어, 아테네 원정군 중장보병 3천 명중 선발대 1천 명의 일원으로서 멋쟁이 도련님, 애제자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포티다이아 원정에 참전했다.
["우리는 함께 포티다이아 전투에 나갔고, 한솥밥을 먹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해 우선 말할 것은, 어려움을 견뎌낸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나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군대 전체에서 선생님을 당할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알키비아데스, 플라톤의 "향연" 中"]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티다이아 전역에서 아테네군이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
아직 애송이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아마도 그가 명문가 도련님임을 과시하는, 금과 상아로 장식되어 번쩍이는 갑옷 때문에 적들의 다구리 표적이 되어) 부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알키비아데스 바로 곁에서 소크라테스가 함께 싸우고 있었다.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전적으로 소크라테스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내가 부상을 당했을 때, 선생님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를 지켜주셨고, 나와 나의 무기를 구해 주셨습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기습공격으로 혼란스러워 각자 자기 몸을 돌보기도 급급한 상황에서
부상당해 쓰러진 제자를, 레어템을 노리고 개떼같이 달려드는 적들로부터 지켜냈으며
그 북새통에서 끌고 나와 구해낸 것이다.
특히 전근대의 방진 전투에서 낙오는 곧 죽음이었으며 방진을 깨는 행위(적전도망이건 혼자 튀어나가 나대건)는 즉결 처형이 가능할정도로 무거운 행위였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의 소크라테스가 20kg의 청동갑옷을 입은 상태로, 10kg의 청동방패를 한손에 들어 적"들"의 창을 막아내면서,
갑옷 무게까지 합쳐 최소 70~80kg였을 제자를 나머지 한 손으로 끌어낸 괴력의 소유자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는 그 때 장군들에게 선생님께 무공훈장을 수여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들은 나의 가문 때문에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아닌 내가 포상을 받아야 한다는 선생님 자신의 의지가 장군들을 오히려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포티다이아 연합군 전사 300명, 아테네군 전사 150명의 역전승으로 전투가 끝난 후 새 갑옷 한 벌과 금관을 상으로 받은 것은 석공의 아들 소크라테스가 아닌 귀족 도련님 알키비아데스였다.
그러나 다름아닌 소크라테스 본인이, 내가 아니라 내 제자가 상을 받아야 한다고 누구보다 우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황문수 역 "소크라테스의 변명",
베터니 휴즈 저 "아테네의 변명" 에서
저 알키비아데스는 후에 스파르타에 붙어서 아테네군을 궤멸시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