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잠깐만.
만약 이대로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이 돈으로 그 지긋지긋한 빚을 모두 갚아 버린 다음에 몰래 이사를 가 버린다면?
그렇잖아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월세가 너무 비싸 감당을 못 할 정도라서 별 미련같은 것도 없다.
아까 분명히 그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하긴 했지만…사실 내가 동의했다고는 해도 이건 일종의 인체 실험 아닌가?
게다가 돈이 오고 가기까지 한다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잖아.
이런 수상한 실험에서 계약서라는 게 법적으로 의미가 있긴 한 건가?
위법 행위는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할테니까….
….
…….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단순한 실험인데도…. 그런 간단한 일 뿐인데도 하기 싫다고 도망칠거냐.
잠깐만 시간을 투자하면 400만원을 받을 수 있어.
정신 차리자! 여기서 내가 이 돈을 갖고 도망친다면…더 이상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히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참. 나라는 인간, 정말 돈에 약한 놈인가 보다.
만약 처음부터 750만원을 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어쩌면 그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일부러 돈을 분할해서 지급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유혹을 쫓아 버리고,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서둘러서 김밥집으로 돌아간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진행되었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는 자취하는 백수 치고는 굉장히 괜찮은 집에서 살고 있다.
제법 넓은 방 하나. 취사 가능한 거실 하나. 화장실. 베란다까지….
깨끗하고, 보안도 잘 되어 있고 교통편도 괜찮다.
원룸중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을 찾기 힘들 것이다.
이러니 방값이 비싼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앉았다.
먹고나서 치우지 않은 그릇, 널부러져 있는 옷 등으로 어질러져 있었지만 여자 손님도 아닌데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집이 제법 좋군 그래?"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감탄한 것처럼 말한다.
"아. 네. 뭐…."
내 돈으로 벌어서 얻은 집도 아니고, 빚까지 진 상태니…자랑스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빨리 돈을 벌어서 스스로 월세를 내는 상황이 와야 할 텐데….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방에서 노트 비슷한 것과 펜을 꺼낸다.
그리고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내가 대답한 사실들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키, 몸무게, 혈액형 등등. 지금까지 그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정보들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쯤은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선선히 대답했다.
"신체 조건에 따라서 기계에 대한 반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역시 나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자들을 상대로도 실험을 할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서 가져갔다. DNA검사를 통해서 분석해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나.
머리카락 자르는 것이 싫다면 피를 뽑는 것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당연히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리고 간단히 시력 테스트, 청력 테스트 등을 하고, 예전에 큰 병을 앓았던 적이 없었냐고 물어본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병무청에서 신체 검사를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그 마음에 대답하듯 그는 인성검사같은 종이를 내민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문항도 적었고, 금방 대답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 다 채우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조사들은 실험을 하기 전에 딱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별로 귀찮을 것도 없다.
그 후, 아까 김밥집에서 대략 설명을 들었던 실험에 대한 구체적인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기계를 꺼낸다.
이것이 꿈을 컨트롤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 도구란 말인가.
약간 큰 접시 정도의 사이즈. 레귤러 피자보다도 작은 크기의 원형 기계였다.
"자기 전에 이 헤어 밴드를 쓰게."
기계에는 머리에 뒤집어 쓰도록 되어 있는 원형의 밴드가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간단히 설명해서, 1m 정도 길이의 이어폰 줄 같은 얇은 줄이 기계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끝에 이어폰 대신 헤어 밴드가 달려 있었다.
헤어 밴드라고 해서 여자들이 쓰는 머리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마에 쓸 수 있도록 된 원형의 띠를 말한다.
운동 선수들이 머리에 쓰는 그 헤어 밴드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시험삼아 머리에 써 보았다.
겉보기엔 밴드의 탄성 때문에 이마에 압박감을 느낄 것 같았는데, 막상 써보니 거의 느낌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하루 종일 차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까 김밥집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 헤어 밴드에서 머리에 신호를 보내 루시드 드림 상태로 만드는 것 같다.
또한,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이 밴드에서 내 뇌파를 측정하여 데이터 파일로 변환해서 기계에 저장 한다고 한다.
실제 제품에서는 굳이 뇌파를 측정해야 할 필요가 없지만, 실험을 하기 위해 넣은 기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스위치를 켠 다음에 '수면 유도' 버튼을 누르고 편하게 잠들기만 하면 되는 걸세."
그는 스스로 기계를 작동시켜 보였다.
'ON' 버튼을 눌러 기계에 불이 들어오고 나서, '수면 유도' 버튼을 누르자 기계에서 규칙적인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옛날에 유행했던 MC스퀘어 같군요."
MC스퀘어에는 안경이 붙어 있었지만, 이 기계에는 헤어 밴드가 붙어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될 걸세. 억지로 소리를 의식할 필요는 없네."
"이걸 쓰고 꾸고 싶은 꿈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아직은 루시드 드림 그 자체가 목적이지, 꿈의 내용을 컨트롤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거든."
그는 기기의 전원을 껐다.
나름 소신이 있는 주인공.. 인데 어라? 주인공이름이 뭐였죠? 아직 안나온건가 기억이 안나네
권용재입니다. 1편에서 나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