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
"헉!"
정신을 차려보니 마우스를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있는 탁상 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실험을 한다고 너무 규칙적인 생활을 했나…불과 한 달 전만 해도 1시 전에 잠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나는 바닥에 눕고 싶은 욕망을 떨쳐 내고, 졸음을 쫓고자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찬물을 틀어 시원하게 세수를 하고, 양치질까지 한다.
나는 시험기간이라도 공부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잠을 깨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그대로 잠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목숨이 걸린 상황이니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잠이 완전히 깬 채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는 게임을 종료시킨다.
이걸로는 안 돼.
뇌를 활성화할만한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할 수 없지.
야동이라도 봐야겠다.
원래 이럴 때는 자극적인,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것이 졸음을 물리치는데 제일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야동을 봐야 하는 셈이다.
나는 저장해 둔 폴더를 열고 급한대로 눈에 띄는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킨다.
어?
여기는 어디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딘가에 누워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얀 벽, 커다란 크기의 넓은 방.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왜지? 분명히 동영상은 흥미진진했고,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전에 졸았을 때도 그랬다.
그때도 졸리다는 자각은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모든 게 다 수상하다.
이것도…갑자기 잠이 든 것도 놈들이 무슨 수를 부렸기 때문인 것은 아닌지….
내 생각이 지나친 건지도 모르지만, 놈들은 꿈을 조절할 수도 있다. 잠이 오도록 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젠장!
이제 꼼짝없이 그놈들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왜 놈들은 기껏 나를 불러다 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나는 그제야 바닥에 붙어 있는 화살표를 볼 수 있었다.
학교 축제라던지, 무언가 행사를 할 때 길바닥에 붙여 놓은 형광색의 화살표처럼,
수많은 화살표 그림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닥에 표시되어 있었다.
마지막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문이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여기에 왔지만 저런 문은 처음으로 본다. 아마 오늘 만들어낸 모양이다.
저기를 통해 나오라는 건가? 웃기는군. 그럼 처음부터 저쪽에다가 소환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여기서 버텨봤자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끌어내겠지.
그럴 바에 나 스스로 나가는 게 낫다.
나는 문이 붙어 있는 벽으로 걸어가, 문 손잡이를 잡고 힘껏 당긴다.
문이 제법 커다래서 당기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가볍게 열렸다.
문 바깥쪽은 내가 있던 방과 똑같이 생겼다.
거기엔 이 방과 똑같이 하얗고 커다란 방이 있었다. 크기도 거의 동일해 보였다.
마치 영화 큐브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이다. 다른 점은 그보다 방이 훨씬 크고, 문이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방에는 이 방에선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10명…아니, 20명은 되는 것 같다. 그들은 모두 한 가운데쯤에 모여 있었다.
저놈들은 누구지?
처음에는 경계심을 느꼈지만, 그들의 불안한 듯한 표정. 외모. 평범한 옷차림 등을 봤을 때 '그들'의 일파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여기에 계속 서 있어봤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면 가까이 다가가서 정보라도 얻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들은 웅성웅성 떠들어대고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는지, 대화는 별로 오가지 않았고 다들 혼자서 떠들어대기 바빴다.
개중에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치 지금 처음 만난 것처럼 어색한 호칭을 써가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뭐야. 이 상황은?
혹시 이 녀석들도 나와 똑같은….
"다 모인 것 같군."
그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압도하듯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들의 수군거림을 잠재운다.
우리는 일제히 목소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저 녀석은…!
어제 본 그 탈을 쓴 남자였다. 물론 이번에도 똑같은 탈을 쓰고 있었기에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다.
아까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언제 생겼는지 대학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강연대 같은 것이 있었고, 그는 그 뒤에 서 있었다.
마이크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마치 연설이라도 하러 나온 것 같았다.
소장은 어디 갔는지 오늘은 그 혼자였다.
"환영한다. 나의 노예들이여."
그 남자는 두 팔을 벌려 펼쳐보인다. 누가 보기에도 조롱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의 거만한 선언에 다들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벌컥 화를 냈고, 일부는 황당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 술렁이는 대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예들이라면…이 녀석들도 결국 나처럼 꿈을 빼앗긴 놈들이란 말인가.
역시 실험 대상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던 거다.
…잠깐.
이 녀석들도 모두 나와 같다고?
그야 '평범한 꿈속 등장인물'이라는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면 이 녀석들도 모두 나처럼 꿈속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은 '이 녀석들의 꿈과 내 꿈이 연동된 것'이란 말인가?
아니, 사람의 꿈과 꿈을 서로 연결하다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야 꿈을 조종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제 와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믿을 수가 없다.
이것을 더욱 극대화하고 확장시키면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의 꿈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도 가능할 지도 모른다.
이 녀석들은 인간의 꿈을 하나의 세계로서 독립시킬 생각인가?
"이제 너희들의 생명을 다룰 권리는 내게 주어졌다.
그 사실에 대해선 다들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테니 따로 설명을 안 해도 이해하고 있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 여성의 상황'을 직접 보고 왔으니까.
그럼, 여기에 있는 녀석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군.
어쩌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중 한두 명은 거리에서 마주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성격이 괴팍한 편이니까 기분이 나빠진 것만으로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건 아주 불행한 일이지. 그러니 모두 죽고 싶지 않다면 내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덤덤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를 협박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이 녀석들. 지금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니꼽긴 하지만 놈이 우리의 생명을 틀어쥐고 있는 이상 놈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라고.
그도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주변이 소란스럽자 조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자, 자, 조용, 조용! 나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살아남고 싶다면 입 닥치고 얌전히 듣는 게 좋을 거야!"
그제야 조금은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무작정 당황하다가도 점점 상황 파악이 되는 것이겠지.
그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역시 탈출구는 막혀있었음다... 눈물이 앞을가리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