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있는 와중에 개인적 감상평으론..
메시지와 메신저 간의 불협화음을 날것으로 보여준 작품이 아니었나..
메신저가 광란의 메시지를 품기를 포기하고 속죄한다면 잊고있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릴지 모르지만 사회는 또다시 그를 ‘도로변에서 죽었으면 밟고지나갈 시체‘ 쯤으로 여기고 무참히 외면해버리는 잔혹한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메신저를 잃은 메시지는 그 힘을 잃고 소멸되기는커녕 전염되고 계승된다는 점에서 ‘조커’란 결국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 그 자체임을 보여준 작품. 전작이 메시지를 잉태하는 과정과 그것의 파급력에 집중한 작품이었다면 이번 작은 메신저가 자신이 낳은 메시지에게 되려 잡아먹히는 과정에 초점을 둔 작품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극의 스폿라이트는 조커가 아닌 메신저였던 아서 플렉에 집중되는 서사. 고로 조커2가 아닌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어도 꽤나 어울렸을 영화였던 것 같다.
추가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감독이 관람객들의 반응이 실망하게 될 것을 예상했고 심지어 더 나아가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할리퀸과 대중들은 조커가 부활하여 자신들의 억압된 욕구를 분출할 아이콘이 되어주길 소망했다. 이는 마치 조커1을 봤던 관람객들이 1편에서 조커가 보여줬던 충격감을 기대하며 이번 영화관을 찾아간 것과 매칭된다. 아서 플렉은 무엇의 아이콘으로 자신을 생각하든 그저 지금껏 외면당해왔던 세상으로부터 그런 주목을 받는 것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자신이 저지른 짓은 그저 약자에게 한없이 무례한 세상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 표출에 불과한 것이었음에도 거기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세상은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기 위해 조커를 소비하고 싶어한다. 그 기대에 부응해 아서 플렉은 다시금 조커로 부활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법정 증인으로 등장한 옛 직장동료 개리의 눈물 섞인 호소로 인해 애써 울음을 감추려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진 아서 플렉이 다시 깨어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부터 관람객들은 영화의 전개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양감은 실망감으로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 관람객은 조커의 광기가 미치는 파급력을 경험하기 위해 후반부까지 기대하며 기다렸지만 조커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걸 포기하고 인간 아서 플렉으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세상에 쓸모가 없어진 아서 플렉은 대중들은 물론 할리퀸에게마저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을 나가는 관람객들을 뒤로 한 채 쓸쓸히 감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이콘이 되길 포기한 댓가로 자신이 낳은 메시지에게 살해당하며 항상 외면당해왔던 고독하고 쓸쓸한 아서 플렉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관객들에게 조커를 기대하게 하고 그것을 끝내 포기하는 아서 플렉의 모습을 보여주며 고담 시의 시민들과 동일한 경험(기대와 실망)을 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메타적으로 영화 플롯을 짠 인상을 받는다.
+ 영화 보고 방금 나왓을 때는 '와 노잼이네.. 뭐냐 이거..'라는 느낌을 저도 받았습니다. 영화 관람이 재밌었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영화는 재미가 없습니다 ㅋㅋㅋ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사를 계속 머릿속에서 되짚어볼수록 참 아서 플렉다운 서사 구성이었던 것 같아서 그 서사 자체는 마음에 들게 되었달까..? 기대와 전혀 달랐던 전개가 흥미로웠달까? 갓 보고 나왔을 때는 '정말 이게 뭐냐'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아서 플렉을 아서 플렉으로 바라보지 않고 마치 광대 분장처럼 자신이 표출하고 싶어하는 이념이나 사상, 욕망을 덧칠해서 바라본다.’
‘그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메시지를 운반해줄 메신저로서의 조커일 뿐. 그럼에도 아서 플렉은 지금껏 자신을 외면해왔던 세상의 관심에 행복을 느낀다.’
감독의 무리수
첫번째 관람때는 노래 부분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는데 두번째 봤을때는 노래씬 나오면 여긴 망상다이빙 장면이구나 이해하고 보니깐 시간이 되게 빨리 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