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건국사 모음집
1607년 음력 3월에 벌어진 건주와 울라 세력간의 오갈암 전투에서 울라측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지난 글들에서 수 차례 언급했듯이 울라군은 현장에서만 3천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퇴각 과정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건주의 후신인 후금/청의 기록과 조선의 기록을 종합해서 보건대 오갈암 전투는 울라의 전성기를 종식시키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이후 약 3~4개월 뒤인 정미년 윤 6월 20일 북병사에 의해 의해 치계된 무산의 치보 내용을 살펴보자면 건주와 울라간의 음력 6월~윤 6월 사이에 벌어진 또 다른 대치전의 기술이 살펴진다.
앞뒤의 정확한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1 누르하치가 호통지라고 기술된 장수와 군대를 파견하여 울라군의 특정 거점을 대상으로 포위 및 대치전을 진행했다는 것, 울라군이 해당 거점을 굳게 지키면서 항복치 않고 저항을 하는 통에 건주군이 해당 거점을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 얼마간 공격이 계속되다가 누르하치의 지시에 따라 건주군이 회군하였다는 것, 군이 회군한 뒤 건주측이 가을철에 해당 거점에 대한 재공격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등의 정보는 알 수 있다.
누르하치의 건주군이 공격했다는 해당 거점은 어디일까. 건주의 후신인 후금/청의 기록에 1607년 음력 6월~윤 6월의 울라에 대한 전투에 대한 기록이 존재치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추정은 불확실하지만 필자는 아마도 지난 1605년 조선과 울라간 건퇴 전투가 벌어진 곳이자 울라의 전진 거점이었던 건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당시까지 울라 본토에 대한 건주의 직공로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전투가 건주의 울라 본토에 대한 공격전이었다고는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까지의 형국상 건주와 울라간의 영토는 직통로가 단절되어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또 다른 해서여진계 세력이었던 호이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2
건주와 울라 사이에 호이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군을 통하여 울라 본토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을 단행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후금의 기록상 울라 본토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공격으로 살펴지는 이한산성 전투는 호이파가 건주에 의해 병합된 뒤인 1608년 음력 3월에나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건주가 공격한 울라측 거점은 울라 본토가 아닌 울라 본토 바깥의 울라 거점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합당한데, 그 거점으로 가장 가능성 높게 추정되는 것은 건퇴다.
둘째로 정미년 음력 6월~윤 6월 사이에 이루어진 울라의 특정 거점에 대한 공격이, 해당 공격이 이루어진 시기로부터 1달여 전에 이루어진 동해 여진에 대한 공격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미년 음력 5월 누르하치는 울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워지/와르카계3 세력이었던 퍼시허, 허너허, 오모호 수루 3개 세력을 자신의 동생 바야라와 후르한, 피옹돈, 어이두를 지휘관으로 하는 1천여명의 군대를 출격시켜 무릎 꿇렸다.4 이 공격은 오갈암 전투 이후 울라가 얼마간 외부에 대한 군부대 투입 역량이 현저히 저하되게 되자 그 틈을 타서 울라의 본토 외부 영향력을 걷어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음력 6월~윤 6월에 진행된 울라와의 전투는 시기상 필연적으로 해당 원정과 상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음력 6월~윤 6월의 울라 공격이 음력 5월부터 시작된 울라의 외부 협조 세력에 대한 공격과 연계되었다면, 외부 협조 세력에 대한 공격작전이었던 음력 5월의 동해 여진 원정의 성격을 생각해 보건대 음력 6월~ 윤 6월의 울라 공격은 울라 본토 외부에 있으면서 번호, 비번호 동해 여진계 세력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거점인 건퇴에 대한 공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셋째로 건주군의 울라 거점 공격 및 회군 정보를 입수한 지역인 무산의 위치다. 무산은 조선의 국경지중 건퇴와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할 만한 지역이었고 그렇기에 건퇴의 상황을 파악하는데에 이점이 있었다. 무산쪽에서 건주군의 울라에 대한 공격 및 그 실패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해서 무조건 적으로 건퇴가 공격대상이 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해당 지점에서 상황 정보를 파악한 만큼 건주가 공격했다는 울라군 거점이 건퇴일 확률 자체는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정황 증거들을 생각해 보건대 당시 건주가 공격했다는 울라군 거점은 아무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건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후금/청의 기록상에서 공격지점이 확실히 살펴지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완전한 확신은 할 수 없다.
후금/청의 기록에 해당 전투에 대한 기술이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철군한 탓에 이전에 거둔 오갈암 전투의 승전과 음력 5월에 출병한 바야라가 거둔 대 동해여진 원정의 성과가 퇴색될 수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해당 거점을 건퇴라고 판단할 경우 얼마 안되는 울라군이 지키는 건퇴를, 비록 그리 많은 숫자가 투입된 것으로 추정되진 않는다지만 오갈암 전투의 승전으로 한껏 기세가 오른 건주군이 함락치 못했다는 결과가 도출되므로 건주와 그 후신인 후금/청에서는 굴욕으로 여겨 의도적으로 누락했을 공산이 있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일 뿐 꼭 이상의 이유로 기술을 누락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후금/청의 기록에서 그들이 겪은 패배나 굴욕이 이상과 같은 이유로 모조리 생략되었다면 그런 것은 또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야라의 원정과 시기가 거의 겹친 탓에 상대적으로 작은 전투였던 건퇴 포위전이 그와 관련하여 기록이 누락되어 버렸을 수도 있고, 적은 가능성으로 바야라의 원정에 포함된 공략대상중 하나가 건퇴였으나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던 원정에 옥의 티를 만들고 싶지 않아 '작은 패배'에 해당하는 건퇴를 함락치 못한 사실을 굳이 언급치 않고 기록상에서 생략했을 가능성 역시도 배제할 수 없다.5
결론적으로, 조선의 기록에 나타난 정미년 음력 6월~윤 6월에 발생한 건주와 울라간의 특정 거점을 두고 벌어진 포위전 및 울라의 방어 성공은 아무래도 건퇴를 중심으로 벌어진 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1. 다만 당해 음력 6월 6일 의정부의 장계에서 누르하치의 울라 공격에 대한 태세가 감지되는 만큼 음력 6월부터 울라에 대한 공격이 준비 혹은 시작되었다고 판단된다.
2.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선조 40년 음력 9월 16일, 9월 19일
3. 『만주실록』상에서는 워지로, 『만문노당』상에서는 와르카로 기술되고 있다.
4. 『만문노당』 정미년 음력 5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5. 이전의 글에서는 『선조실록』 선조 40년 윤 음력 6월 20일의 기사에 기록된 건주와 울라간 전투가 바야라의 워지/와르카 원정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고 기술했지만 바야라의 원정과정에서 해당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0이라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