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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티타임]
숲속 깊은 곳.
풀도 나무도 없는 넓은 터에 뜬금없이 탑이 하나 서 있었다.
6등급 모험가인 레이와 리아나는 탑에서 조금 떨어진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탑의 입구를 훔쳐보고 있었다.
"리아나. 이 탑 맞지?"
구슬이 달린 지팡이를 든 남자가 말했다.
단정한 금발머리와 치유술사를 상징하는 녹색 줄무늬가 수놓아진 로브.
앳된 얼굴과 작은 키, 여린 목소리 때문에 언뜻 보면 아직 2차 성징이 오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는 스무 살의 성인 남성이었다.
"응. 분명해."
은발의 여성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탑의 입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등에는 활을, 허리춤에는 화살통과 단검을 찬 여성은 남성과는 대조적으로 키가 무척 컸다.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가볍게 넘기는 그녀는 수풀 뒤에 서 있는 레이와 달리 무릎을 꿇고 상체를 기울인 채였다.
"묵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
"의뢰서에 적혀 있던 정보에 따르면 마물이 목격되었던 건 밤이었어."
묵호는 3등급 마물로 무기를 든 일반인 100명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마물이 이 탑 주변에서 관측되었다는 목격 정보가 있었고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험가 조합에서 의뢰를 내걸었다…는 것이 어제 저녁, 리아나가 레이에게 한 설명이었다.
단순한 상황 파악 및 조사 의뢰에다가 보수도 나쁘지 않았기에 날이 밝자마자 레이는 리아나와 함께 숲으로 향했다.
"주위에 마물은커녕 사람이 드나든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레이가 말했다.
묵호 같은 거대한 마물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면 분명히 흔적이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섣불리 돌아가서는 안 돼. 정말로 묵호가 있다면 즉시 주위 마을의 경계 강화와 토벌단 모집이 연계되어야 하니까."
"응. 리아나 말이 맞아."
자신들의 보고 여하에 따라서 수많은 희생자를 막을 수도, 발생시킬 수도 있었다.
"여기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레이. 가까이 가보자."
리아나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주위를 경계하며 탑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레이는 고개를 들고 탑 위쪽을 보았다.
만약 탑 위에 사람이 있다면 자신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바로 경계를 했을 터였다.
물론 누군가가 경계하고 있었다면 자신보다 리아나가 빨리 눈치를 챘을 터였다.
리아나는 전문 사냥꾼으로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살기와 기척에 민감해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탑의 입구 바로 앞에 도달할 때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건 최소한 그녀가 탐지할 수 있는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레이."
문앞에 선 리아나가 그를 불렀다.
"응."
"문에서 마력이 느껴지는지 알아봐 줄래."
"알았어."
레이는 문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아."
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런 뒤에는 문을 살살 두드려보거나 손으로 쓸어보았다.
"다른 장치도 없는 것 같아. 평범한 문이야."
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침없이 문을 밀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벽에 난 작은 창문들로 들어온 빛이 내부의 모습을 비추었다.
"아무것도 없네?"
레이가 두리번거리고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 벽에 설치된 나선형 계단을 제외하면 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만약 묵호가 정말로 이 탑에 있었다면 사냥한 짐승의 뼈나 핏자국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저 위쪽뿐…."
리아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계단의 끝, 탑의 천장 쪽을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레이. 감지되는 마력은 있어?"
"아니. 없어. 리아나, 너는 어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아.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버려진 탑일지도 모르겠네."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 3분 뒤.
두 사람은 탑의 꼭대기라고 생각되는 장소에 도착했다.
나선형 계단이 끝난 그곳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레이와 리아나는 다시 한번 교대로 문을 조사했다.
그 결과 탑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아무 이상이 없는 평범한 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들어가 보자."
리아나가 말했다.
"응."
레이의 대답에 리아나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익.
아까보다는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이 열리고 리아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멈추어 섰다.
'어둡다.'
레이가 문 안쪽을 보며 생각했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왔던 아래쪽과 달리 문 안쪽은 암흑 그 자체였다.
"레이. 조명 마법."
리아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응."
레이가 지팡이를 앞으로 들었다.
그러자 구슬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까이 붙은 채 문 안쪽으로 들어갔던 그때.
콰아앙!!!
레이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뛰었고 리아나는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들이 들어온 문이 닫혀 있었다.
리아나는 얼른 다가가 손잡이를 당기고 밀어 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
“흐악?!”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리아나가 문손잡이를 놓은 채 굳었고 레이는 비명을 질렀다.
[보아하니 도둑놈들이로구나.]
“누구냐!”
리아나가 소리쳤다.
[몰래 들어온 주제에 목소리도 크구나. 나는 이 탑의 주인이다.]
‘어디서 보고 있는 거지?’
레이는 당황스러웠다.
아까부터 마력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만약 탑의 주인이라는 이가 마력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존재라면 자신과 리아나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아무리 잘 짜인 술식을 사용한다고 해도 일단 마법을 사용하면 여분의 마력이 주변으로 퍼지게 되어 있었다.
마법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력과 술식에 통달했음을 뜻했다.
‘아니야. 이런 숲속에 대현자 급의 마법사가 있을 리 없어. 아마 환술의 일종일 거야.’
레이는 보다 가능성이 있는 가설을 세웠다.
‘어쩌면 탑 근처에 왔을 때부터 환술에 걸린 걸지도…….’
그때 목소리가 다시 한번 쩌렁쩌렁 울렸다.
[너희 같은 괘씸한 좀도둑들에게는 그에 맞는 벌이 필요하겠지. 너희들은 지금부터 특정한 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평생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뭐라고?”
레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특정한 행동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단, 단서는 주마. 눈치가 빠르다면 알아차릴 수 있겠지.]
리아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으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레이가 만든 마법 조명의 불빛은 마치 암흑에 삼켜지는 것처럼 주위를 밝히지 못했다.
[어디 방 안에서 해골이 될지 아니면 운 좋게 나갈 수 있을지 지켜봐 주마.]
다음 순간.
“앗!”
“…!”
레이와 리아나가 동시에 팔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갑자기 방이 환해졌던 것이다.
조금씩 눈이 빛에 익숙해진 뒤 두 사람은 방안의 모습을 살폈다.
“…….”
“…….”
그리고 둘 다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빈민촌에 있는 집 한 채가 통째로 들어서도 될 정도로 넓은 방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으며 탁자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 천으로 만든 수건 몇 장.
그리고 생크림이 가득 든 그릇이 있었다.
‘이 미친! 뭐가 ‘단서는 주마’야!! 눈치고 뭐고 누가 봐도 의도가 뻔하잖아!!!’
레이는 흥분한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리고 곧 경직했다.
옆에서 리아나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눈동자를 찔끔 굴려 옆쪽을 훔쳐보았다.
리아나가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침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는 자신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레이와 리아나, 두 사람이 방 안에 갇힌 지 30분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문이나 벽을 부수려고 했으나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사금강석으로 만든 것처럼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방에 문 외의 출입구, 혹은 숨겨진 장치 같은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침대와 수건, 생크림은 함정이고 다른 단서를 놔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샅샅이 방을 뒤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나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거, 걱정하지 마. 리아나.”
레이는 지팡이를 꽉 쥔 채 말했다.
“분명 이건 환술 계열의 마법일 거야. 술식의 핵만 찾으면 깨고 나갈 수 있어. 반드시 내가 찾아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는 억지로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리아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레이는 굳게 닫힌 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팡이를 가로로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속으로 말했다.
‘뭐가 반드시 찾아낸다는 거야! 너 그딴 거 못하잖아!!’
술식의 핵을 찾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그는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치유술사인 레이는 상처의 치유와 체력 회복, 저주의 해주 등은 특기였으나 그 외의 마법에 대해서는 초보자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정밀한 환술을 사용하는 상대라면 술식의 핵을 감추는 것 역시 손쉬울 터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걸 밝힌다면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죽지.’
레이는 아까부터 침착한 척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빨라진 심장 고동을 리아나가 눈치채는 것은 아닐까 초조해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레이는 이 상황이 단순히 곤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리아나를 좋아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리아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내보이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쉽게 당황하고 걱정이 많은 자신과는 대조적인 그녀의 모습을 레이는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마치 늑대처럼 날렵하게 달려가 적을 베고 멀리 떨어진 적에게는 정확히 화살을 맞추는 전투 기술.
게다가 남자보다도 커다란 키와 꾸준한 단련을 통해 얻었을 탄탄한 신체.
어릴 때부터 체구가 작고 몸이 허약한 것도 있어 치유술사의 길을 선택한 그에게 리아나의 육체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지게 되었던 리아나를 향한 호감은 언제부턴가 몰래 간직한 애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레이는 그것을 절대로 티내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과 달리 리아나에게 있어 그가 그저 모험가 동료일 뿐이라면.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도리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레이는 그런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는 방 안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레이.”
가까이에서 들린 목소리에 레이는 앉은 채로 펄쩍 뛰고 말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리아나가 그의 뒤에 다가와서는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어때. 뭔가 알아냈어?”
“……미안해. 아직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레이가 쓴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은 그만해.”
리아나의 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에 모험가 선배에게 들은 적이 있어. 실제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 환술을 깨기 위해서 보흐봉 마법 학원의 교수를 세 명이나 불러야 했다고.”
리아나는 레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레이는 치유 전문 마법사야. 마법 학원의 교수들 셋이 모여서 겨우 해제할 수 있었던 환술을 레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
레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리아나 말이 맞아. 내 힘으로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거짓말을 해서 미안.”
레이는 낙담했다.
리아나를 실망시키고 말았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레이.”
그녀가 자신을 불렀지만 레이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자.”
그의 고개가 휙 올라갔다.
눈이 주먹만 해진 레이는 리아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동료의 표정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진지했다.
“하, 하, 하다니!? 뭘??”
반면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목소리도 갈라져 있었다.
“여기 들어오게 된 건 내 책임이야. 내가 의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미리 정보를 모은 뒤에 왔더라면 이곳에 이런 식으로 갇힐 일은 없었을 거야.”
그 말에 레이의 얼굴에서 놀람과 당황함이 빠르게 사라졌다.
“리아나. 그렇지 않아. 나도 같이 결정했잖아. 절대 너 혼자만의 책임이 아냐.”
“그래도…….”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저 침대나 탁자에 놓인 물건들은 우리를 골려 먹기 위한 장치일 거야. 이 탑의 주인은 아마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겠지. 상대의 수에 넘어가면 안 돼. 실제로 우리가… 그… 그…….”
그는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입을 열었다.
“그 짓을……! 하, 한다고 해도 무사히 풀어준다는 보장은 없다고.”
레이는 온 힘을 다해 리아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절대로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선을 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리아나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있는 레이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리아나?’
레이가 의아해하던 그때 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괜한 말을 했어. 나 같이 매력 없는 여자랑은 할 맘이 들 리가 없는 게 당연한데….”
‘어!?’
그의 얼굴에 다시금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도 알고 있어. 키는 크고 온몸은 근육질인 데다가 팔다리는 흉터투성이. 내가 남자라도 싫을 거야.”
“리, 리아나. 아니야.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남들에게 내 몸이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나가야 하니까. 부디 한 번만 참아주면 안 될까……?”
레이는 무척 놀랐다.
자신을 쳐다보는 리아나의 눈빛에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불꽃이 확 일어났다.
“리아나!”
그는 몸을 세운 뒤 동료의 어깨를 꽉 잡고 소리쳤다.
무릎을 꿇고 있던 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두 번 다시…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딴 식으로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
“레이…?”
레이는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의 동료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야. 그러니까 마치 너랑 하게 되는 걸 견딘다거나 참는다고 표현하지 마. 알았어?”
“!!!”
리아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얼굴을 본 레이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리아나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 그게……. 키가 큰 것도 몸이 탄탄한 것도 멋있으면 멋있었지 내 눈에는 절대 이상하지 않으니까. 괜히 자신을 비하하지 않아주었으면 한달까. 그런 거 슬프잖아. 아하하…….”
얼굴을 붉힌 채 빠르게 말하는 레이였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이를 향해 다가갔다.
“리아나…?”
레이는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는 리아나의 모습이 어째선지 무서웠다.
“미안해. 레이. 더는 못 참겠어.”
“리아나? 그게 무스으읍!?”
레이의 눈이 또 다시 주먹만 해졌다.
리아나가 그를 안아 들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던 것이다.
“후우.”
“어… 으….”
한참 후 입술을 뗀 리아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인 레이를 든 채로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그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리아나의 손이 생크림이 담긴 그릇으로 향하는 걸 보고 레이는 정신을 차렸다.
“기, 기다려! 리아나!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이 탑의 주인이 보고 있다고!”
“보이는 게 싫다면 이불 속에서 하면 돼.”
“그런 방법이…… 가 아니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괜찮아.”
리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이니까 조절할게.”
“뭐, 뭐를… 아, 아아, 아앗!!!”
리아나가 이불을 당기며 레이 위에 엎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상어가 먹잇감을 삼키는 듯했다.
5시간 뒤.
두 사람은 무사히 탑을 빠져나갔다.
치유술사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사냥꾼은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사람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숲밖을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불길과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수 시간 전과 달리 침묵이 내려앉은 탑 꼭대기 방.
그곳에 길게 기른 보랏빛 머리를 가진 여성이 서 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머리에는 이 세상 그 어떤 짐승과도 비슷하지 않은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었다.
“와우.”
그녀는 부서져 있는 침대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병을 꺼냈다.
그녀가 마개를 뽑자 방 전체에서 반짝거리는 가루가 떠오르더니 병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여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반짝거리는 가루가 담긴 병을 바라보더니 이내 방에서 나갔다.
***
며칠 뒤.
작은 정원이 딸린 2층짜리 저택의 대문 앞.
그곳에 후드를 뒤집어쓴 장신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가 대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이쪽이야.]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후드 쓴 여성은 곧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했다.
정원에 설치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길게 기른 보랏빛 곱슬머리와 날카로운 뿔을 가지고 있었다.
후드 쓴 여성은 저택의 주인 앞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차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차 한잔 하겠어?”
“……아니. 오후에 마물 소탕 의뢰가 있어서 가봐야 해.”
“그래. 아쉽네.”
그렇게 말하는 저택 주인의 얼굴에는 전혀 아쉬운 빛이 보이지 않았다.
후드 쓴 여성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약속했던 보수야.”
저택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은화 열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정말 그걸로 되겠어?”
“응?”
저택의 주인이 후드 쓴 여성을 쳐다보았다.
“나는 마법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당신이 사용한 마법들이 웬만한 마법사들은 간파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수준이라는 건 알 수 있어. 그런데 겨우 그 정도 은화만 받아도 괜찮아?”
“어머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저택의 주인이 방긋 웃었다.
“하지만 괜찮아. 나는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챙길 건 챙겼어.”
그 말에 후드 쓴 여성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걱정하지 마. 약속대로 훔쳐보거나 기록을 남기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취향이 독특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변태는 아니거든.”
“……알았어.”
후드 쓴 여성은 몸을 돌렸다.
“그럼 잘 가. 만약 누군가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또 찾아오고.”
그녀는 저택 주인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후 정원을 나와 저택 울타리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저택과 정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
신비한 광경에 잠시 말을 잃고 있던 후드 쓴 여성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군. 하긴. 그러니까 마녀라는 별명이 붙었겠지.’
관계의 마녀, 아스펜시아.
그것이 저택 주인의 이름이었다.
“흐음.”
정원에 혼자 남은 아스펜시아는 커다란 접시에 담겨 있던 케이크를 새로 한 조각 집어 개인 접시에 담았다.
“예의상 권하기는 했지만 거절해줘서 다행이야. 쉽게 얻을 수 있는 조미료가 아니니까.”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병을 집었다.
병 안에는 반짝거리는 가루가 들어 있었다.
아스펜시아는 병을 기울여 가루를 케이크 위에 살살 뿌렸다.
그런 뒤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포크로 케이크의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으으음~!”
그녀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훌륭해! 달콤하고, 새콤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해. 한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맺어진 연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맛이야. 이래서 내가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거라고.”
관계의 마녀, 아스펜시아 네른은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개인 접시에 담은 케이크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케이크 조각을 개인 접시로 옮겨 가루를 뿌리고 먹어 치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병 안에 든 반짝이는 가루가 전부 사라졌다.
“후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저택에서 문서들이 휙휙 날아오더니 마치 병사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
그 문서들에는 온갖 사연과 의뢰가 적혀 있었다.
“자, 다음은 어떤 걸 먹어 볼까.”
아스펜시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가에 묻어 있던 크림을 혀로 낼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