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 테마. 015B - 독재자.
*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어떠한 것들과 닮은 점들이
보인다 하더라도 질타하시지 마시고 귀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Scene 01. 비 오는 날의 징조.
그러니까 이 나라는... ... 정말 이상한 곳이다. 사람들은 모두 창백하며 줄곧 뭔가에 홀린 듯 얼빠진 표정을 짓곤 한다. 종소리를 신호로 어딘가에 모였다가 흩어졌다를 반복하고 집집마다 달려 있는 붉은 역십자가 까지. 정말로 이상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악마의 자식'에 대한 처형식이 있는 날이다. 때 마침 비가 부스스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마을의 광장이 오늘 있을 쇼의 무대다. 자고로 광장이라 하면 만남과 휴식의 장이 되어야 할 진데 어느세 부턴가 처형의 장으로 변모해 버렸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세트가 세팅되고 그 주위로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렇지. 쇼에 관객이 없으면 섭섭하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구경나왔는데 모두들 비옷을 입고 있는 폼이 무슨 사이비교가 떠오를 정도였다.
" 아아! 아니야! 난 아니야!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고!"
오늘의 악마의 자식은 그냥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는 청년을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을 내던졌다. 계란과 토마토 대신이었다. "어머머, 저 청년이 악마의 자식이었어?" "세상팔자 참으로 무섭고만.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악마였다니!" "어머나 세상에, 어쩐지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야릇하다 했지. 쯧쯧." 끝에 나온 말이 너무 뜬금없었는지 사방에서 "누구야?"라는 말들이 쏟아진다. 실언을 해버린 유부녀는 인파들 속에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 에이. 너무 늦게 와버렸네. 여기서는 잘 보이지도 않잖아?"
뒤늦게 광장에 온 한 청년의 한탄이었다. 그의 말대로 광장은 이미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서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아주 안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이래서야 맛이 나질 않는다. 이게 무슨 콘서트도 아닌데 무슨 맛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말이다. 그런데 한탄 청년의 어깨 너머로 누군지 모를 수상한 이가 보였다. 죽은 나무에 등을 기대서는 머리 끝까지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처형식이 진행되려 하자 그는 품 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연주는 숙연해진 분위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 아악!"
청년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고정이 되었고... ... 팔 다리 목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이젠 누군가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절대로.
" 어엇! 저거 봐. 자물쇠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 오오, 정말!"
정말이었다. 온 몸이 자물쇠로 고정된 남자가 몸을 틀자 족쇄들이
휘어버리기 시작했다. 강철로 된 쇠가 고작 인간의 힘으로 휘어버리다니! 청년의 인간도를 벗어난 괴력에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모니카 연주자도 덩달아 놀라서 토끼눈으로 청년을 주시하였다. 연주는 잠시 중단해야 했다. 사내가 괴력으로 포박에서 풀려나기 직전, 집행자들이 불에 달군 인두로 등을 지지는 바람에 실패로 끝이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고 그에 반해 연주자는 실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처형식은 시작되고... ... 연주자는 입 맛을 다시고는 그곳을 등졌다. 빗물 고인 바닥에 하모니카는 버려두고서 말이다. 그 하모니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Cross Injustice]
Scene 02. 지옥으로 가는 길.
이곳은 지하 기관차가 있는 지하도. 증기 기관차는 스팀을 내뿜으며 어서 달리고 싶다 성화였고 매표원은 지루한 지 하품만 늘어지게 하고 있었다. 매표원이 한가한 이유는 손님이 없기 때문이고 손님이 없는 건 이번 기관차의 목적지 때문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페르소나' 마을은 최근에 들어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난데없이 귀신들이 나타나 밤만 되면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나 뭐라나. 대충 이러한 소문 때문에 그리 가는 발길이 뚝 끊긴지 오래다. 검은 옷으로 위 아래를 통일한 매표원이 손목 시계를 살피었다. 어차피 오는 탑승객도 없고 하니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할 것도 없어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로 기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석탄 낭비라고, 매표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충 기관차를 보내려 했는데 뒤늦게 누군가가 나타났다.
" 표 하나 주쇼."
온 몸을 모포로 두른 사람이었는데 그 모습이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매표원이 표를 줄 생각도 안 하고 혀를 차며 말하였다.
" 당신. 페르소나로 갈 생각이오? 거기에는 듣도보도 못한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란 말이요!"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이 걱정할 거 없수다."
" 어째서?"
" 나 참. 이런 거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그건 내가 '홀리 크로스'의 사자이기 때문이지."
" 아!"
홀리 크로스란 소리에 매표원이 탄성을 내질렀다. 홀리 크로스라니! '그'는 돈을 건네고는 매표원에게 강탈하듯이 표를 빼앗아 들었고 그대로 기차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나저나 당신도 참 불쌍하구료."
" 그, 그게 무슨 소리요?"
" 듣도보도 못한 것을 두려워나 하고 앉아 있으니 말 이외다. 내 한 가지 충고하죠.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라면 그게 무엇이 됐든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닌거요. 오케이?"
" 오... 오케."
매표원은 자기도 모르게 수긍해버렸고 그를 태운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관차 안. 그는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붙이고는 입에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어차피 탑승객은 본인 외에 아무도 없었기에 자리는 많았다. 불을 붙이려는데 문득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종이 쪼가리인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미스터 택배맨! 그곳이 어디든, 그리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불러만 주세요. 어디든지 달려 갑니다! 625 - 8210. 전화한 지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공짜?-
주문하면 무엇이든 배달해주는 택배맨이라니. 흥미로워 하며 번호를 주시하는데 이 때, 전단지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
한 방울 두 방울. 이제는 글씨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흥건해졌다. 그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전단지를 적시는 것이다. 입에 물고 있는 담배 끝이 파르라니 떨려온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살피었다.
" 이런 젠장."
다리가 없는 메이드가 낫을 든 채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특정 계층이 선호할 만한 황홀한 복장이었지만 요는 다리가 없다는 것과 시뻘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떨어트리고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 끼야악!]
그는 모포를 집어 던지고는 자리를 피했고 곧바로 하녀 귀신의 낫이 공격해 들어왔다. 해당 자리가 깔끔하게 절단날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 그레고리 가의 하녀인가? 귀신이 되어서도 충성심은 여전하네."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한 그는 의외로 작은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외는 그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 그 충성의 근본은 뭘까? 그레고리 가에 대한 고마움? 아니면 밀고자에 대한 복수심? 무엇이 됐든 너희들은 틀렸어."
체구는 작았지만 상당히 드센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누더기 코트. 그리고 옆 트임이 있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옆 트임은 골반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망사로 이루어져 있어 상당히 도발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왼쪽 눈은 실명이라도 했는지 지긋이 감고 있었다.
[ 키약!]
낫을 든 하녀는 그녀의 정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괴성과 함께 달려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두 팔을 뻗었고 양 팔의 소매에서 각각 총과 검이 미끄러져 나왔다. 둘 다 한 자 길이로 소매 속에 감쪽 같이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검으로 가까스로 낫을 막았고 반대쪽 손으로 총을 집어 하녀 귀신의 복부에 갖다 대었다.
"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를 안 했잖아? 내 이름은 '키리에'라고 해. 만나서 아주 반가워."
철컥! 방아쇠를 당기자 총성과 함께 하녀 귀신의 배에 사람 머리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배가 뚫려서 꼼짝 못하고 있는 귀신을, 들고 있는 검으로 일도양단 해버린다. 마무리!
키리에가 감고 있던 왼 눈을 뜨자 엉망이 된 하녀 귀신의 몸뚱아리가 그리로 빨려 들었다. 강력한 힘의 진공 청소기로 빨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귀신을 모두 빨아들인 키리에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감고 있던 왼쪽 눈의 용도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 키에엑!]
앞 쪽 문이 열리며 또 다른 하녀 귀신들이 우르르 밀려 들었다. 이놈들. 한 두 놈이 아니다. 키리에는 볼 것도 없이 총을 연사했는데 뒤쪽 문도 열리며 귀신들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이크, 이렇게 되면 조금 난감하다. 앞에서만 나온다면 대충 총만 연사해도 끝이 날 테지만 앞 뒤로 밀려든다면 얘기가 달라지니 말이다. 샌드위치 식빵 사이에 낀 고기 꼴이 날 지도 모르겠다. 안되겠다 여겼는지 총구를 천정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총을 난사해 구멍을 뚫고는 벌어진 틈 사이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위로 올라가서 도망치려는 속셈이다.
" 열심히 내 엉덩이나 쫓아오라고, BullShit Ghost!"
키리에는 하녀들이 쫓아올 세라 기차의 앞 쪽으로 전진하였다. 지하도의 천정과 근접해 있는지라 상체를 잔뜩 쭈그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달려야 했다.
" 이크!"
앞 쪽으로 이동하던 중, 지하도의 천정마다 부착된 센서가 눈에 보였다. 신호등 처럼 생긴 기계로 기관차의 속도와 이동 포인트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설명을 이만하면 됐고, 그 기계가 키리에의 안면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키리에는 아차하는 타이밍에 몸을 낮춰 피할 수 있었지만 뒤에서 쫓아오던 하녀들은 피하지 못하고 거기에 강타 당했다. 한숨 돌린 키리에는 귀신들을 빨아들이고는 계속해서 기차의 앞 부분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렇게 기관차의 제일 앞 칸에 도착한 키리에는 바닥을 찢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뒷 쪽 문을 여는 게 아닌가? 키리에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기관차를 머리 부분만 남겨두고 뒷 부분을 버리는 것! 그러면 추격을 저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문을 열고는 기관차의 머리와 몸통 부분을 잇는 이음쇠를 검으로 잘라내버렸다. 그리고는 발을 이용해서 힘차게 밀어재꼈다. 그 너머로 죽일 듯이 달려오고 있는 하녀 귀신들이 보인다.
" 헤이 헤이. 니들을 위해 내가 특별 선물을 준비 했어. 받아 보겠어? 물론 니들에게 선택권 같은 건 없지만. 닥치고 일단 받아둬."
키리에가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접착제로 고정된 3개짜리 다이나마이트였다. 서서히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기관차의 몸통을 향해 다이나마이트를 던졌고 그것을 총으로 쏴 맞췄다. 콰과광!!! 불꽃이 기염을 토하며 폭발하였고 키리에는 파편이라도 튈 세라 냉큼 문을 닫았다. 문에 난 창 너머로 업보의 화염에 타들어가는 귀신들을 보며 환호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생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좁은 공간에서 폭발을 일으킨 탓인지 불길이 한 마리의 거대한 뱀처럼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속도가 점점 기차의 속도를 따라붙고 있었다. 키리에는 당혹스러워 하며 이리저리 기판을 뒤적거렸다.
" 젠장! 속도를 올리는 게 어떤 거지? 이거 좃 됐네 정말!"
개중에 속력이라고 적혀 있는 막대를 찾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이렇게 빨리 찾다니. 발기 부전 남성의 거시기 마냥 축 쳐져 있는 막대를 두 손으로 잡아 힘껏 밀어 올렸다. 화염의 온도는 기관차의 문 마저 녹여오고... ...
" 으아아아아~!!!"
스틱을 끝까지 밀어낸 끝에 간신히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힘이 빠진 키리에는 벽에 기대 주저 앉고, 뒤늦게 불에 탄 귀신들이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렇게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기내에선 안내 멘트가 흘러 나왔다.
- 이제 곧 페르소나에 도착할 예정이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각자의 물건들을 빼먹지 말고 챙겨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 되십쇼. 다음 역은 페르소나. 페르소나 입니다.-
이제 페르소나다. 키리에는 각오를 다지며 검과 총을 다시 옷 소매 속으로 갈무리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그녀의 귀에 사로잡혔다. 작지만 집중해서 귀를 세우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한 그 소리. 그 이상한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벽에다 귀를 갖다 대보았다. 점점 커지는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순간 날카로운 것이 벽을 뚫고는 키리에의 어깨와 귀 사이를 파고 들었다.
" 으윽, 이런! 아직 안 끝났나?!"
날카롭고 길다란 창이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첫번 째 창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두번 째 창이 천정으로 부터 찔러 들어왔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여기가 무슨 '아이언 메이든'도 아니고 창은 여기저기서 빠르고 섬찟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조금 전의 하녀 귀신들 하고는 약간 다른 형태였다. 외형은 비슷비슷 했지만 일단 무기가 달랐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날개'였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날개! 까다로운 상대들 앞에 골치가 아파오는 키리에였다.
' 칫. 어쩔 수 없지. 이럴 땐 이판사판이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런데서 죽을 수는 없잖아?'
키리에는 총구를 바닥에 댔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쇠가 찢겨지며 바닥이 뚫렸고 바닥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다이나마이트를 꺼내 들었다. 다이나마이트에 키스를 하며 자신의 운에게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 너만 믿는다!"
한 편. 바깥의 공기는 짙은 남색을 띠우고 있었다. 낡은 어둠을 타파하고 새로운 아침을 가지고 올 새벽의 색깔이었다. 새벽이라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도시의 풍경. 그 정적을 깬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울림이었다. 처음엔 미미하던 그 진동이 점차 강해지더니 이내 땅이 갈라지며 화산처럼 무언가를 토해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기관차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것이 대지를 쪼개더니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하늘로 떠오른 기관차는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고 다시 한 번 지면을 흔들어 놓았다. 쿠당탕탕! 땅에서 기관차가 솟은 것도 신기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구경나오지 않은 건 더더욱 신기했다. 기관차가 땅을 부수고 날치마냥 튀어올랐는데도 도시는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다.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그 안에서 키리에가 기어나왔다.
" 으윽. 아무도... 거기 아무도 없어요? 아이고 나 죽네."
키리에의 신음에도 아무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이건 무슨 유령이 사는 마을인지 사람이 사는 마을인지 당최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 ... ... 해다."
새벽의 짙은 검푸름이 사라지고, 해가 떠올랐다. 밝은 해가 어둠을 거두어 가자 잠잠하던 도시에 사람들이 머리를 디밀기 시작했다. 무슨 겁쟁이들 마냥 고개만 빼꼼히 내밀다니, 마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짜고서 하는 행동 같았다. 마을의 중앙에서 지켜보고 있던 키리에도 다 황당할 지경이었다. 마을의 한 켠에는 '페르소나'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 페르소나. 맞네. 딱 맞춰 왔네 뭐. 아아, 아파라."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키리에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힘없이 눈알을 돌려보니 수염과 주름이 지긋한 노인네가 인자한 미소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 환영합니다. 제가 바로 페르소나의 이장인 잔바르크라고 합니다."
Scene 03. 홀리 크로스.
"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장의 집. 바닥엔 고급 카페트가 깔려 있고 여기저기엔 산짐승들의 박제가 위화감 있게 진열 돼 있었다. 제법 사는 모양이다. 키리에는 소파에 앉아선 이장과의 대화를 텄다.
" 예예. 수고 정말 많았죠. 오면서 두 번이나 죽을 뻔 했지 뭡니까."
" 송구스럽습니다."
" 그럼 이거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죠. 오늘 새벽에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왜 아무도 나오지 않은 거죠? 귀신들 때문인가요?"
귀신 얘기가 나오자 이장의 표정이 파리하게 떨려왔다. 귀신의 귀 자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오나 보다. 키리에는 건네받은 코코아를 홀짝이며 이장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 이게 다 그레고리 가의 저주 때문입니다."
" 그레고리 가의 저주?"
" 네. 이것은 저주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키리에님도 알고 계시지요?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말입니다. 통채로 처형 당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키리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레고리 가문의 사람들과 그 집에서 일하던 자들까지, 전부 처형 당하던 그 날. 어떻게 그 날을 잊으리오. 그레고리는 이 마을, 페르소나에서 제일가는 큰 손이었다. 단지 페르소나 안에서만 부자인 게 아니라 그 어디를 가도 꿀리지 않을 만큼 엄청난 재력가였다. 그의 재력을 질시한 마을 사람들 중 몇 명이 밀고한 걸까? 홀리 크로스에 민원이 한 통 들어왔다.
그레고리 가의 사람들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신고였다. 그것은 알고서 한 신고였을까 아니면 질투에 눈이 멀은 허위 신고였을까? 어느 것이 되었든 그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사실로 판명되었고, 그레고리 가문을 포함해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은 하인들 까지 전부 몰살 당해야 했다. 그것은 사상 유래 없는 대규모 처형식이었다. 아마도 밀고자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들은 귀신이 되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가 보다.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밀고자를 찾고 싶은 걸까? 그만큼 분노가 큰 걸까? 하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이면 그 중에 밀고자가 있기는 하겠지. 잔바르크는 주름진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 그레고리 가의 귀신들은 낮에는 힘을 쓰지 못해요. 하지만 야행성 동물 마냥 밤만 되면 행동을 개시하죠. 그리고 어찌된 이유 때문인지 집 안에 있는 자들은 건드리지 않더군요. 오늘 새벽에 그렇게 큰 소란을 치루고도 아무도 집 밖을 나서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입니다."
덥썩. 키리에의 무릎 위에 손을 잡으며 부언했다. 정말 간곡한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간절한 모양이다.
"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레고리 가의 귀신들을 말려 주십쇼!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요! 오오, 제발 더이상의 피해자가 없기를... ..."
키리에는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장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 걱정 마세요. 홀리 크로스가 움직인 이상 놈들도 더이상 해를 끼치지 못할 겁니다. 약속 하지요. 죄를 지은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걸 말입니다."
키리에가 웃어 보이자 잔바르크도 웃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지 그 웃음 속에는 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어서 귀신들을 처리하던가 해야지 노인 양반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겠다.
" 그럼 전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요."
키리에가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그가 불러 세웠다. 마지막으로 뭐라 할 말이 있나 보다.
" 무슨 일이지요?"
" 저기... 놈들의 숫자는 많습니다. 그런데 혼자 오신 겁니까?"
" 네. 홀리 크로스에서 귀신에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저 뿐이거든요."
벽에 걸려 있는 엽총을 보고는 이번엔 키리에가 물었다.
" 혹시 총 좀 다룰 줄 아세요?"
" 아, 아닙니다. 그냥 취미지요, 취미."
" 그렇군요."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키리에는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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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크로스, 홀리 크로스! A 국의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담당하는 기구로 이 나라의 뇌와 심장에 해당한다. 종교의 핵으로 집중되는 신이 정말로 현존하며 능력을 행사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곧 절대적인 맹신을 낳게 될 것이다. 지금 이 나라가 그렇다. 이 나라를 통제하는 건 여신 '오페라'이다. 홀리 크로스의 모태이자 그 자체인 그녀.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방에서 성스러운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성스러운 천 개의 계단 위에서.
그녀는 정말로 여신다운 매력을 한 껏 발산하고 있었다. 팔색조를 생각나게 하는 형형색색의 머리칼. 어떻게 입는 건지 상상조차 안 되는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드레스. 스스로의 연주에 심취한 듯 그녀는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주가 절정에 다다르자 그녀는 감은 눈을 부르르 떨며 오르간에서 손을 때었다. 연주자 전부 끝이 나자 그녀의 풍성한 치마 사이로 작은 소녀가 낑낑대며 기어 나왔다.
" 수고했어요."
오페라의 칭찬에 소녀는 입가에 묻은 하얀 액체를 입술로 핥으며 고개를 숙였다.
" 아닙니다 여신님. 저야말로 여신님을 위해 무언가 봉사할 수 있다는 게 기쁩니다. 다음에도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 후후후. 그러도록 할 게요. 이만 내려가도 좋아요."
" 감사합니다."
소녀는 오페라의 손등에 키스를 찍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 흠?"
소녀의 입맞춤으로 인해 오페라의 손등에 이물질이 묻어버렸다. 인상을 구기는 오페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더니 이내 그냥 치마에 슥삭 닦아버린다. 그리고는 인상을 구기며 손가락을 튕겼는데 그러자 계단 하나가 슥 하고 사라졌다. 그 계단은 밑으로 내려가던 소녀가 막 밟으려던 것이었고 그것이 사라지자 소녀는 균형을 잃고 계단을 미끄러졌다. 무려 천 개의 계단이다. 여기에서 미끄러졌으니 목숨은 보장하지 못하리라. 소녀가 비참하게 계단을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웃고 있는 와중에 비상 연락망이 닿았다. 띠리리리.
어디선가 급한 일로 오페라를 찾고 있는 것이다. 멋드러지게 정장을 빼어입은 사내가 전화기를 들고서 계단을 올라왔다. 사내의 발놀림이 무척 빠르기는 하였다만 전화기를 빨리 전달하기에는 계단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고서 하나씩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모습은 여지없는 코미디였다. 그렇게 겨우겨우 올라가서 여신께 전화를 건네고 보니,
[ 거기 종점 다방이지예? 여기 B - 13구역인데 커피 둘, 쌍화 하나. 오케?]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사내는 오페라의 눈총을 받느라 온 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한 감각을 견뎌내야 했다. 사실 그 사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오페라는 손 끝으로 그를 살짝 밀었고 그는 힘 없이 계단 밑을 굴러떨어졌다.
" 이상해, 이상해. 어떻게 일반인이 내 비상연락망으로 전화를 걸 수가 있는 거지? 아무리 잘못 건 전화라고 해도 사용하는 케이블 자체가 다를 텐데?"
계단을 굴러 떨어지던 사내가 도중에 멈춰섰다. 다행히 좀 전의 소녀처럼 뇌진탕으로 죽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전화가 다시 한 번 우는 게 아닌가? 사내는 혀를 찼다. 다시 전화를 들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이번에도 잘못 걸려온 전화라면... ... 그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사내는 침을 삼켰다. 그냥 도중에 받아서 어떤 전화인지 확인하면 될 일이었지만 오페라에게 향하는 전화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있다. 자기 좀 편하자고 그 철칙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한 법이지만 오페라에겐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했다.
" 여보세요."
전화를 건네는 사내는 숨이 차서 지금이라도 당장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신의 바로 옆인데 자세를 헝크러트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지옥일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홀리 크로스의 케이블 선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통칭해서 그냥 가이라고 부른다. '케이블 가이'. 그는 지금도 홀리 크로스 성의 뒷편에서 얼기설기 얽혀 있는 선들 위에 서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것이 꼭 뱀 우리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 무슨 일이시죠?"
" 여신님께 아뢰옵니다. 저 케이블 가이입니다만, 다름이 아니오라 사소한 문제가 발생해서 말입니다."
그는 사소하다는 말을 강조하며 말을 계속했다.
" 누군가 홀리 크로스의 케이블 선에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 고작 누가 장난을 친 거 가지고 저에게 전화를 건 건가요?"
" 이크! 그, 그게 아니오라 사실은... ...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여간 수상해서 말입니다."
" 분명 앞에서는 사소한 문제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겁니까?"
여신의 추궁에 케이블가이는 공업용 장갑으로 이마를 닦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사실 별 거 아닌거에 꼬투리를 잡힌 거에 불과하지만 그 상대가 여신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말 한 마디에 자칫 목숨이 오고갈 수도 있는 일이다.
" 죄, 죄송합니다! 이게 글쎄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고 또 중대하다면 한 없이 중대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헤헤헤. 여신님의 그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해주십쇼. 헤헤."
적절히 말 실수를 수습한 그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러니까 말입니다. 누군가 케이블 선에 손을 댄 흔적이 보여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혼선'입니다. 기존의 케이블과는 전혀 다른 선이 하나 있는데, 누군가 이것을 몰래 여기다 부착한 거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해서 기존의 통신을 엿듣는다거나 탈취하는 것이지요."
" 조금 전에 잘못 걸린 전화가 왔는데 그것도 이 때문인가요?"
" 그렇습죠. 중간에 끼어든 선으로 가야 될 전화가 애꿎은 여신님께 간 것입니다. 이거 이거, 조사 한 번 해봐야 될 거 같군요."
" 어떻게 하면 되죠?"
오페라의 물음에 케이블 가이가 안경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답하길,
"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통신 케이블에 끼어든 선을 거꾸로 따라가보면 됩니다. 요컨데 역추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냥 군대를 조금만 보내시면 금방 답이 나올 겁니다. 이런 요망한 장난을 친 게 누구인지 말입니다."
" 그렇군요. 그리 하지요. 아 참!"
전화를 끊으려던 차에 뒤늦게 떠오른 것이 있는지 끝으로 질문을 덧붙였다.
" 좀 전에 말하길, 기존의 선에 다른 선을 연결하여 통신을 탈취하거나 엿듣는다고 했죠?"
" 그렇습디다."
" 그렇다면 지금의 통화도 엿들을 수 있다는 얘기겠네요?"
" 아... ..."
등잔 밑이 어두웠던 케이블 가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떨어트렸다. 망치로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다시 페르소나로 돌아와서 - 슬슬 날이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해가 떨어질 세라 허둥지둥 집으로 걸음을 제촉했다. 이장의 말대로라면 귀신은 어둠 속에서만 행동을 개시한다 했으니 말이다.
' 이제부터 시작이야.'
마을의 중앙에는 성스러우면서도 흉측한 그레고리의 고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저기가 바로 원혼들의 본거지 이다. 모든 일의 원흉! 벌써부터 흉흉한 기운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흘러 나오고 있었다. 키리에는 무기들을 제정비 하고는 어둠 속에 몸을 담궜다.
[ 키요오오!!!]
행동을 개시한 귀신들의 비명이 마을을 뒤덮었고 키리에의 귀안도 어둠 속에서 빛을 뿜었다.
Scene 04. Hunting For Hunter.
페르소나의 밤은 음산하다. 밤을 귀신들에게 빼앗긴 이상 쳐다도 볼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집 밖을 나가는 것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물론 귀신들이 돌아다닌다 해서 언제까지고 집 밖을 안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가령 집 안의 누군가가 목숨이 오락가락 할 정도로 위독하다던지 해서 말이다. 외로운 밤의 거리. 어떤 여성이 누군가를 모포에 덧씌운 채 등에 업고서 어둠을 내달리고 있었다.
"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의원님의 집이에요!"
부모님이 위급한 바람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나온 것 같다. 의원의 집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죽음의 그림자도 모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건물의 옥상 위를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모녀가 먼저 의원의 집에 닿을 것인가, 아니면 귀신의 손 끝이 먼저 모녀에게 닿을 것인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키이익!]
검은 털복숭이 같은 것이 의원의 집과 모녀 사이를 가로 막았다. 어머니를 등에 지고 있던 여성은 온 몸의 잔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춰야 했다. 놈은 뱀처럼 머리와 몸통만이 존재했는데 특이한 것은 몸통에 털이 복실복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은 마치 수제작한 사자탈을 쓴 것만 같았다. 덩치는 한 3, 4미터 정도 될까?
[먹을 거다... ...]
턱을 잔뜩 벌려서는 모녀를 집어 삼키려 한다. 여성은 너무 겁을 먹었는지 업고 있던 어머니를 어깨에 견착했다.
[ ???]
견착? 어머니? 자세히 보아하니 그것은 어머니는커녕 아예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끈한 강철에 통짜 몸매를 자랑하는 '대포'였다. 대포를 어깨에 견착한 여성, 키리에가 삐죽한 덧니를 내보이며 말하였다.
" 누가 누굴 먹는다고? 개새끼 주제에."
퍼엉. 미사일이 발사되었고 포탄은 정확히 귀신의 입 속으로 뼐려들어갔다. 그리하여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켰고 주변에도 피해가 뻗쳤다. 놈이 산산조각이 나고 나서, 하늘에서 웬 쇠붙이 따위가 떨어졌다. 짤랑. 뭔가 하고 살펴보니... ... 그건 개목걸이였다. 왼쪽 눈으로 개귀신의(?) 영혼을 흡수하며 낮게 읊조렸다.
" 이젠 개 까지 귀신이 되는군. 말이 다 안 나오네."
미사일은 한 발 밖에 없었는지 키리에는 대포를 아무렇게나 던져 두고는 그레고리의 성으로 향하였다. 조금 전 개귀신의 최후 때문인지 성으로 가는 동안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기습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키리에는 어이 없어 하며 산을 올랐다. 약간의 산을 타고 나서야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점점 가까워 질 수록 크기가 엄청나다. 문 하나도 열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거대했다. 어떻게 열어야 할 지 난감할 정도. 딱히 방도가 생각나지 않자 키리에는 무식하게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터프하게 마구 방아쇠를 당기는 게 아닌가? 장총도 권총도 아닌 어중간한 크기의 총, 위력 하나는 정말 발군이었다. 크다 못해 거대한 문짝이 완전 거덜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문을 완전 부서버리고는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라서 그런 거겠지만, 이건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다. 내부가 너무 어둡다.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 해도 일단은 뭐가 보여야 싸움이 가능할 터인데, 이건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것이다.
" 아?"
키리에의 생각이 여신의 가호를 받은 건지 타이밍도 참 예술처럼 내부에 불이 들어왔다. 너무 환해서 잠시 눈을 감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팔을 허우적 댄다. 성 전체에 불이 들어오다니, 집에서 잠을 자던 마을 사람들도 조심스레 창을 통해 밖을 살펴볼 정도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성에 불이 들어왔다? 차츰 빛에 익숙해지고, 내부의 인테리어가 확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것이 정녕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내부는 깔끔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진정 누군가 살고 있기는 한가 보다.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면 귀신이든.
' 그래 그래. 분명 살고 있기는 하지. 귀신도 산 목숨이라면 말이야.'
키리에는 잠시 전투 태세를 접어두고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 모습이 꼭 새 집을 장만하려는 새댁 같았다. 손가락 끝으로 가구들을 어루만지는 폼이 또한 섹시하고 도도하다. 내부를 대충 설명하자면 - 특이하게도 정 중앙의 천정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낸 거 같았는데 구멍의 태두리를 토대로 나선 계단이 위로 뻗어 있었다. 이 나선형 계단을 통해 쭉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형태인가 보다. 구석에 따로 이동수단이 있기는 한데 고장이 났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계단을 통해서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소리다. 대충의 조사가 끝이나자 키리에가 허공에다 대고 노호성을 질렀다.
" 여봐 여봐! 이거 접대가 너무 소홀한 거 아냐? 지금 잡히나 나중에 잡히나 그게 그거니 어서 나오라고! 내가 너희를 잡을까, 아니면 너희가 날 잡을래? 어차피 그게 그게 아닌가?"
마구 고함을 지르는 그녀의 뒤, 기둥 너머로 의문의 시선이 몰래 키리에를 훔쳐보고 있었다. 수상함을 느낀 키리에는 획, 뒤로 돌아서 총을 겨누었지만 시선의 주인공은 이미 기둥 뒤로 몸을 숨긴 후였다.
" 거기 있는 건가? 귀엽기는."
키리에는 계속해서 총을 겨누고는 천천히 걸음을 그리 옮겼다. 그리고는 냉큼 뒤 쪽으로 돌아서 총을 겨누었지만 기둥의 뒤에도 놈은 보이지 않았다.
" 얼라리? 기우였나?"
총구의 끝으로 머리를 긁으며 머쓱해 하는데 의문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늙은 집사 귀신이었는데 등에 솟아난 여러개의 팔로 기둥을 붙잡고 있다. 그 모습은 얼추 보면 거미와도 닮아 있었지만 여섯개인 것이 다리가 아닌 팔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집사 귀신은 들고 있던 가위를 조준해선 급속도로 달려 들었다.
[ 키야아!]
" 칫! 위인가!?"
친절하게 비명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집사 귀신이시다. 설마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것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다리없는 집사 노인이 큼지막한 가위를 들고서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살아생전 정원을 가꾸었을 가위로 사람을 치려 하다니! 키리에는 괘씸함을 느끼며 아무렇게나 몸을 굴렸고 가위가 간발의 차로 바닥에 쳐박힌다. 키리에는 자세를 잡기 무섭게 사격을 가했다.
" 취미 한 번 고상하시군, 노땅!"
허나 집사의 가위가 모든 총탄들을 막아냈다. 보기보다 방어에 뛰어난 무기였다.
[ 홀홀홀! 간만에 보는 젊은 친구로군. 아주 좋아! 오호호호!]
" 뭐가 좋다는 거냐?"
[ 젊은이라면, 더군다나 여자라면 이 가위맛이 독특하거든. 다른 이들에 비해 지방질이 많아서 그런 걸까? 오홀홀홀.]
" 당신은 개인적은 취향까지 덧붙여서 패죽여야 할 거 같군. 노망난 할아범은 개패듯이 패도 죄책감이 안 들 거 같거든!"
[ 크캬캬캬캬! 재밌어! 아주 재밌는 친구로구만!]
키리에가 가운데 손가락을 빼들며 말했다.
" 조 까."
그것을 신호탄으로 하여 둘은 탄도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쪽은 인간이 아니고 한 쪽은 인간이면서 인간을 뛰어넘은 자. 당연히 속도면에서도 일반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키리에는 달려들면서 동시에 총탄을 갈겼고 늙은 집사 귀신은 크나 큰 가위로 그것들을 맞받아쳤다. 거리가 상당히 근접하자 키리에는 지면을 박차고 튀어올라 물구나무 자세로 총알의 비를 선사하였다. 하지만 집사 귀신의 등에 달린 손들이 총알을 죄다 잡아버리는 게 아닌가? 바닥에 착지하며 맥이 빠지는지 키리에는 혀를 찼다.
[ 언제까지 치사하게 총만 쏠 텐가?]
" 치사하든 말든 영감탱이가 무슨 상관인데? 난 원래 치사한 여자라 좀 치사해도 돼. 너희들이 무차별의 복수심을 빌미삼아 살인을 정당화 하듯이 말이야."
[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을 어찌 알꼬. 홀홀.]
" 알고 싶지 않아."
[ 알려주고 싶지도 않네.]
" 씨이... ..."
말싸움에서 밀리자 키리에는 쌍씸지를 부라리며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근처의 기둥은 총 10개. 샹드리에는 없고 딱히 이용해 먹을 지형지물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지형지물을 이용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을 거 같다. 더 있다면 바닥에 있는 붉은 카펫트 정도랄까? 그것을 보며 키리에는 생각했다. 키리에가 카펫을 보며 생각에 잠기자 집사도 잠시 카펫을 살폈다.
' 저 카펫트를 확 잡아 당겨서 자세를 무너트리는 건... ... 안 되겠지 역시. 이유? 그야 당연히 놈은 다리가 없잖아!'
그렇다. 좋은 전술이기는 하지만 귀신들은 다리가 없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짓을 해봤자 혼자서 뻘 짓 하는 게 밖에 더 되지 않을 것이다. 키리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노집사가 바닥의 카펫을 움켜 잡으며 말하였다.
[ 혹시 이런 생각한 거 아닌가? 이런 거 말일세.]
그렇게 말하며 화악! 카펫을 끌어 당겼다. 인간인 이상 지면에 두 다리를 기댈 수밖에 없는 키리에는 그대로 균형을 잃어야 했다. 부웅 - 자세가 완전 무너져서는 허공으로 떠올랐고 집사도 먹이를 낚아채는 마음으로 같이 떠올랐다. 그대로 허리를 잘라 몸을 두 동강 내버린다! 그 생각에 흥분한 집사의 눈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 이익!"
키리에는 억지로 허리를 틀어선 자세를 바로 잡았고 가위의 양 날 사이에 총을 끼워 넣었다. 어떻게 몸이 두동강 나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명백히 실수였다. 원래는 칼로 막고 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심산이었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손이 엇갈린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검을 고쳐 쥐고는 집사 귀신의 미간을 찌르려 했다.
[ 키익!!!]
그런데 집사의 등에 달려있던 수많은 손들이 튀어나와 키리에를 막았다. 그 손들은 우악스럽게 칼을 빼앗아 등 뒤로 훌렁 던져버렸고 가위를 막고 있는 총도 빼앗아 뒤로 던져버렸다. 무기를 전부 잃어버린 무방비의 상황! 둘은 중력에 의해 밑으로 떨어졌고 집사 귀신은 가위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가위를 조인다면 키리에의 하얀 목이 달아날 것이다. 키리에가 도망치려 하자 촉수같은 손들은 키리에의 팔을 잡았고 다급해진 키리에는 발로 가위를 차 올렸다. 서걱!
[ !!!]
" !!!"
거기에서 예상치 않게 상황에 종료되었다. 가위를 닫기 전, 키리에가 젖 먹던 힘을 다해 가위를 올려쳤고 어이없게도 집사귀신, 본인의 목이 잘린 것이다. 자기가 든 가위로 자신의 목을 잘라버리다니.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키리에의 등에선 식은 땀이 쫘악 흐르고 있었다. 잘못했으면 이런 잔챙이 따위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 말이다. 키리에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목을 잃은 집사 귀신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나쁘다. 잔챙이 주제에... ... 키리에는 놈의 영혼을 접수하고는 멀리 던져져 있는 무기들을 회수했다.
" 휴~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접대였어. 뭐, 그 점은 인정해 주지. 그런데 더 없어? 아직 모자라다고!"
잠시 숨을 몰아쉬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 놈들은 쉴 틈도 안 주나 보다. 정색하며 총구를 돌리는데!
"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거기에는 테이블과 물병이 하나 있었고 그 뿐이었다. 그 외에 수상하다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 휴, 아까의 위험 때문에 너무 신경이 곤두선 것 같아. 나 원 참."
그런데 키리에가 인상을 구기며 짐짓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닌가? 다름이 아니라 물병에서 피가 올라와 테이블 다리를 타고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키리에는 잔뜩 긴장을 한 채 그것을 지켜보는데 피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핏물이 이동한 곳은 나선계단. 따라오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 편리해서 좋네. 기꺼이 응해주지."
키리에는 고양이 처럼 웃으며 핏길을 따라 나선계단을 밟았다. 꼬리를 길게 늘린 뱀처럼 그렇게 키리에를 안내했다.
Scene 05. Black Light Baby.
핏길은 나선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가 5층에서 멈춰섰다. 그러더니 우측 복도로 빠지는 게 아닌가? 아마도 이번 결전의 장소는 이곳 5층인 모양이다. 피는 계속 직진하다가 커다랗고 화려한 방문 밑으로 들어갔다. 여긴가 보다.
“ 이 방이라 이거지. 여봐라 걔 아무도 없느냐. 이리 오너라.”
총으로 방의 문고리를 아작 낸 다음 거세게 걷어찬다. 문이 부서지며 드러난 것은... ... 화려하다 못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공주님 방이었다. 갖은 인형들과 레이스. 분홍 바탕의 컬러도 그러했고 전체적인 컨셉 자체가 소녀 취향적인 공주님 방의 분위기였다. 방의 여기저기에 아름답게 수 놓아져 있는 더럽고 냄새나는 피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피! 붉고 비린내 나는 피! 키리에는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틀어 막았다. 그러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냄새가 지독하다.
“ ???”
침대에는 분홍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틀어 무얼하나 실펴보니, 아빠랑 싸우기라도 한 건지 죄없는 곰 인형과 토끼 인형을 칼로 마구 후벼 파고 있었다. 자기 덩치보다 몇 배는 커다란 인형이었는데, 끔찍한 건 칼로 찌를 때 마다 생 피가 터져나온 다는 것이었다. 방의 한 켠에는 피에 절은 인형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금발 소녀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불현듯 키리에를 노려보았다.
“ 어쭈? 니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어린 년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눈 깔아.”
[ 당신. 우리들의 사정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 알다마다. 너의 이름은 오보에. 그레고리 가의 둘째 딸로 악마의 자식이라는 신고 때문에 홀리 크로스에게 처형을 당했지. 살아생전 나이는 열 다섯 살. 참으로 꽃다운 나이지만 지금의 꼴을 보고 있자니 연민감도 도로 기어 들어가겠군. 처형 당한 거, 그게 억울한 거지?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 아니에요.]
“ 쓰벌. 말 끊지마. 복수라는 감정. 복수심! 나도 그 감정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복수는 고결한 거야. 너희들처럼 애송이 같은 방법으로 고결하고도 순결한 복수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야. 기분 나빠.”
금발 머리 소녀 오보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고작 그런 사명감 때문에 우리 성을 습격한 건가요?]
“Oh~ No~ 그런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사안은 아니라고 봐. 나도 실은 복수 중이거든. 니네들이 조금만 도와줬으면 하는데. 별 건 아냐. 닥치고 이 눈 안에 들어가주면 될 일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어. 말 안 들으면 죽도록 패는 것 외에는 길이 없지.”
[ 뭐, 그런 게 다 있죠?]
“ 이게 다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거 아니겠어?”
소녀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눈을 빨갛게 물들였다.
[ 그러고 보니 기껏 장난감들을 만들어 놓고 써먹질 않았네요. 내 정신 좀 봐. 자자, 모두들 일어나세요.]
“모두들 일어나세요?”
그건 누구에게 한 소릴까? 얼마 안 가서 그 부름의 하수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굳이 알아내지 않아도 그들이 알아서 차례차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 널려 있는 인형들이 좀비마냥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자면 동화같은 장면이었지만 관건은 다들 피를 한움큼씩 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쯤되면 성인동화 되시겠다. 인형들은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흉기들을 빼어들고는 키리에에게로 걸어왔다. 걸음이 좀 느리다.
“ 귀신 주제에 가지가지 하는군. 하지만 말이야. 너도 눈이 있다면 좀 보라고.”
키리에는 좀비 인형들 사이에서도 태평하게 썰을 풀어 놓았다. 대체 뭘 눈 여겨 보라는 것일까? 오보에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자 철컥! 총을 꺼내든 키리에가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너무 느리다고 이 좀비들은.”
이어 화려한 연사 연무가 시작되었다. 먼저 정면에 있는 인형을 쏘아 맞추고 어깨 너머로 총구를 돌려, 보지도 않고 뒤의 인형을 맞췄다. 갑자기 달려드는 녀석은 망치려 후려치듯 총신으로 내려쳤고 그렇게 사방에서 달려드는 좀비를 하나 둘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오면 근접 격투술이나 총을 휘둘러서 공격하고, 멀리에 있는 놈들은 총탄으로 쓰러트린다! 그 모습이 흡사 춤을 추는 것과도 같아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소녀는 자신의 허수아비들이 너무 손쉽게 끝이 나자 허망한 듯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쉬워도 너무 손쉽게 끝나버린 것이다.
때문에 총구가 바로 자신의 미간을 겨누고 있음에도 아무런 긴장감이나 느낌을 받지 못하였다. 소녀는 자신들의 허수아비들이 전부 쓰러지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이 나서기로 마음 먹었다. 방금 자신이 난도질한 토끼 인형과 곰 인형 속에 손을 집어 넣었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불쑥 꺼내 들었다. 소녀가 꺼내든 것을 보고는 키리에는 다시 또 인상을 구겨야 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사람. 사람이다! 인형 안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대충 짐작이 갔다. 저 소녀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왔는지 말이다. 설명하자면 생 사람을 인형 속에 쳐박아 놓고는 칼로 마구 난도질 한 것이다. 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늘러붙어 있는 피는 그들의 것이고 말이다.
[ 하하하! 사실 인형 안에다가 시체를 박아 넣은 것이었어! 어때? 충격적이지 않아? 넌 죄 없는 사람들의 육신에다 대고 총질을 한 거라고! 홀리 크로스가 그래도 되는 거야?]
오보에의 말에도 키리에는 전혀 충격 받지 않은 듯 하품만 늘어지게 할 뿐이었다. 그런 키리에의 반응에 도리어 오보에가 놀랐다.
[ 뭐, 뭐야! 놀라지 않은 거야!? 어째서?]
“ 왜? 예상이 빗나갔어? 비록 시체라도 사람은 사람이야 - 라고 울부 짓으며 내가 슬퍼할 줄 알았어? 아니면 충격 먹고 폭주 모드라도 들어갈 줄 알았나? 한 번 시체는 영원한 시체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들과 안면이 있던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가 저것들 손에 죽어버리면 저 불쌍한 영혼들은 누가 구제해 줘? 마지막으로 너의 가장 큰 실수는 시체에 인형을 덧 씌웠다는 거야. 그러면 오히려 죄책감이 덜하거든, Stupid Ghost.”
오보에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특히 ‘불쌍한 영혼들’이라는 대목에서 표정이 팍삭 변하였다. 그 곱디 곱던 얼굴이 광기에 물드니 그것 또한 독특한 맛을 자아냈다. 키리에가 미소녀의 망가지는 모습을 음미하며 질의했다.
“ 뭐야 너, 그 표정은? 억울한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지? 억울한 거야? 그렇지? 그런 거잖아? 그치? 솔직히 말 해.”
[ 그래, 억울하다! 이 사람들만 불쌍하고 우리는 안 불쌍하냐! 따지고 보면 우리도 피해자라고! 사람... ... 아니, 귀신 차별하지 마!]
키리에가 검지로 소녀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 피해자긴 하지만 피의자이기도 한 너희가 피해자 타령을 하고 앉았으니 진짜 피해자가 들으면 이 어찌 통곡하지 아니 할꼬?”
[ 그래. 피해자가 피해자를 만들어 내고 다른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내고 있지. 니 눈에는 보이지 않아? 시스템을 조장하고 그 너머로 웃고 있는 진짜 나쁜 놈이 말이야. 너는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해, 이 눈 먼 포교자야.]
“ 여기, 자기 혼자 세상을 똑바로 볼 줄 안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양이 있사오니, 여기 이 파문당한 목자가 자비의 손으로 친히 거두어가리다! 에이~멘.”
[ 에이멘 좋아하고 자빠졌네.]
오보에가 능청을 떨며 물었다.
[ 그 개 같은 목자의 이름은 뭐지요?]
“ 키리에다, 이 쥐알탱이만한 꼬맹아.”
철컥. 키리에는 길다란 총구를 소녀에게 들이밀었고 소녀도 무기를 손에 쥐었다. 시체의 머리칼을 움켜 잡았는데 뿌득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의 몸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참으로 고약한 무기가 아닐 수 없다. 온 몸에서 날이 돋아난 시체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겠다니, 어떤 미친놈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다.
[ 자. 어서 덤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주지. 너도 이 인형 속에 쑤셔 넣은 다음에 칼이나 창 따위로 무참히 난도질 해주겠어. 아니면 너도 이런 꼴로 만들어 줄까? 온 몸으로 피를 흘리면서 말하겠지. 제발 살려 달라고. 살아 있는데 창자가 쏟아지는 느낌을 알아? 아니면 산 채로 눈알이 빠지는 느낌은? 상상해 봐. 어때,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 말이 많다.”
타탕! 키리에는 하품을 하며 총탄 두 발을 발사하였다. 두 개의 총탄은 분명 시간차가 있었을 텐데도 거의 동시에 오보에의 가녀린 두 손목을 끊어 놓았다. 그녀는 멍청했다. 아니 아니, 키리에 말고 오보에가 말이다. 지금까지 지루하게 얘기를 나눠보고 직접 그 위력을 눈으로 확인해 놓구서도 잠시 총이라는 물건의 위력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 위력과 특성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기에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오보에는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고 키리에는 총구 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연기를 후 - 하고 불었다.
“ 크흑!!!”
[ 왜? 아파? 그렇다면 이건 어때?]
키리에는 칼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그대로 오보에의 허연 허벅지에 내다 찔렀다. 오보에의 눈이 뒤집히며 다시 한 번 비명이 터졌다. 그 소리가 즐거운지 키리에는 허리를 뒤로 꺾으며 마녀같은 웃음을 흘렸다.
“ 흐윽! 아파! 그만 둬!”
[ 아니 왜? 너는 저 인형 속에 사람을 꼬라 박고는 칼로 마구 내찔렀잖아. 그들의 살려달라는 절규를 무시했잖아. 그러다가 네가 직접 그들의 입장이 돼 보니 어때? 재밌니? 좋아? 즐거워? 기분 째져? 작살나지? 지금 내가 그래! 아주 좋아서 미쳐 뿅 갈 거 같아! 니들이 왜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지 알 거 같아, Yeah~ Fucking Crazy~!!!]
여기까지 오고나니 이젠 누가 사람이고 누가 귀신인 지 모르겠다.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다. 이건 키리에가 귀신 사냥꾼이라고 해도 뭔가 뒤바꼈다. 뒤바껴도 한참을 뒤바꼈다.
“ 살려줘... ... 나 너무 아파... ... 다신 안 그럴 게. 나 죽을 거 같단 말야... ... 흐흑.”
[ 죽어? 누구 마음대로?]
키리에가 그녀의 귀를 잡아 끌어선 무언가를 살짝 귀뜸해 주었다. 빠른 속도로 입을 놀려 속닥속닥. 그 얘기를 들은 오보에의 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를 들어버린 모양이다.
[ 진짜? 그거 진짜야?]
키리에가 그녀의 귀를 잡아 끌어선 무언가를 살짝 귀뜸해 주었다. 빠른 속도로 입을 놀려 속닥속닥. 그 얘기를 들은 오보에의 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를 들어버린 모양이다.
“ 당연하지. 이름하야 귀신 사냥꾼인 내가 하는 말인데 설마 틀리겠어?”
둘이 요지를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그레고리 성이 흔들리며 귀신들의 비명이 합창으로 들려왔다. 소리가 발이 들린 것도 아닐 텐데 점차적으로 크게 들리는 것이 필시 귀신들이 이리로 몰려들고 있는 걸 것이다.
“ 허? 잠잠하던 놈들이 갑자기 지랄발광이군. 미친 건가?”
[ 멍청이! 그야 당연한 거지. 그레고리 가의 둘째 딸인 이 오보에의 비명이 울려 퍼졌으니 나의 충실한 하인들이 저렇게 분개하는 것도 놀랄 건 없잖아? 얼간이 같으니라고.]
“ 그래? 그렇다면 이거 재밌게 돌아가는군. 하나의 미끼를 가지고 얼마나 낚을 수 있을지 한 번 실험해 볼까? 응? 오보에양?”
키리에는 귀신들이 몰려들기 전, 품 안을 이리저리 뒤졌다. 남은 다이나마이트는 3개 뿐이다. 이대로는 역부족이다 느낀 키리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옆에 있던 전화기를 집었다. 비록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기능에는 별 다른 하자가 없었다.
페르소나는 밤이 되면 유령 도시가 돼 버린다. 실제로도 유령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니 유령 도시도 맞는 말이기는 하다만은 말이다. 지금 현재도 불빛 하나 없는 유령 도시, 이름 그대로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뿐인 페르소나에 작은 불빛이 하나 들어왔다. 한 가정에서 불을 켠 것이다. 노 부부가 사는 조촐한 집이었다.
“ 할멈. 왜 깨셨슈 그랴?”
“ 도오저히 오금이 떨려서 자암이 와야지이 말 이외다.”
남편 되는 사람은 혀를 차며 늙은 부인을 보듬었다.
“ 이그 이그. 무서운 건 나도 매한가지 아니겠수.”
“ 할아버엄. 우리 그러지 말고오 신고 합시다. 이러다가 우리 마을 아주 자악살이 나겠어요.”
“ 그래 그래. 그럽시다. 우리 칠복이도 사라지고 사는 맛이 안 나네 그랴. 우리 신고합시다.”
남편이 허리를 토닥이며 천천히 수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홀리 크로스 하나만 믿고 두 다리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번호를 누르던 중,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 저기 할멈? 근데 우리 벌써 신고하지 않았던가?”
“ 잉? 그게 무슨 소리여어. 우리가 원제?”
“ 왜, 있잖여. 마을 이장인 잔다르크 양반이랑 합의 봐서 했잖애. 지금 저~기 성에서 싸우고 있는 양반이 홀리 거시기 아닌감?”
“ 이잉. 그랬나?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벌써 노망이 들었나 보네에.”
“ 으이그, 할멈도 참. 허허.”
늙은 부인은 머쓱한지 어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랬지 참. 이미 신고를 했었지 참. 마을 이장인 잔바르크와 합의를 봐서 신고를 했었지 참. 다시 그레고리 성 - 오보에의 방. 키리에는 오보에의 뒤에서 칼로 위협하며 그녀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촛대를 무기로 들고 있는 젊은 집사 귀신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촛대에는 초가안 끼워져 있어서 날카로운 삐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저런 걸 무기로 쓰다니, 그 상상력에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 고맙게도 다들 모여주셨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모두 한 자리에 모였으니 내가 크게 한 턱 쏠게! 아주 화끈하게 말이야! Bang Bang!”
키리에는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는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하였다. 검으로는 오보에의 목을 옥 죄었다. 그런 키리에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사 귀신들은 애 떨어질라 조바심을 내었다. 사람이 귀신을 인질로 잡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물론 키리에가 어디까지나 귀신 사냥꾼이기에 성립되는 시츄에이션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당한 시츄에이션임에는 변함이 없다.
[ 큭. 당신은 어차피 성 안을 빠져나가지 못 해. 우리 손에 죽을 거라고! 헛 된 발악 따윈 여기서 그만 두시지.]
“ 빠져 나가? 내가 무슨 도망을 친다 그래. 아직도 나를 모르겠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댁들은 귀신이고 나는 글쎄 귀신 사냥꾼이라니까? 오케이? 언더 스탠드? 아니, ‘그 밑에’ 말고 멍청맞은 Sucker들아.”
[ 흥! 사냥꾼이 사냥감의 손에 죽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굳이 우리들이 아니래도 당신은 우리 오빠나 부모님 손에 반드시 죽게 될 거야. 우리 오빠랑 부모님이 얼마나 강한데!]
“ 당돌한 인질이구만 참.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말 많은 인질은 처음이야. 에이! 난 이렇게 나불나불 입 싼 인질 따윈 필요 없어. 옛다 가져가라!”
키리에는 어이없게도 기껏 잡은 인질을 집사들 쪽으로 밀쳐버렸다. 집사들은 그래도 아가씨라고 굽신굽신 오보에를 받았는데, 그녀에게는 키리에만 볼 수 있고 집사들은 볼 수 없는 특별 선물이 딸려 있었다. 오보에의 등짝에 붙어 있는 최후의 다이나마이트 3개! 오보에도 모르는 사이 붙였기에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눈만 동그랗게 뜨며 집사들의 경악에 당황하였다. 집사들이 경악하는 사이. 키리에는 슬로우 모션으로 자세를 잡고는 오보에의 등에 부착된 다이나마이트를 총으로 쏘았다. 퍼버벙!!! 그것은 그레고리 성의 옆구리에 구멍을 낼 만큼 강력한 폭발이었다. 키리에 자신도 자세를 낮췄다고는 하나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작은 생체기들을 입은 데에 반해 놈들은 싸그리 전멸이다. 이 정도면 해볼만한 장사 아니겠는가? 얼굴에 검댕이를 잔뜩 묻힌 키리에는 눈으로 귀신들을 흡수하고는 씨익, 웃었다. 꺼먼 얼굴 속에서 눈알과 이빨만 허옇다. 그렇게 웃음을 남기고 키리에는 장신을 잃었다.
“ 할멈!”
아까 전 그 노 부부의 집이다. 어두웠던 집에 다시금 불이 밝았다. 그레고리 성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다시 잠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남편이 콜콜 자고 있는 부인을 일깨웠다.
“ 왜 그러슈 할아범.”
“ 이거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홀리 거시기에다가 신고를 하던가 해야지 원. 이건 뭐 오금이 저려서 당최 살 수가 있나? 이러다가 우리 마을이 완전 작살 나겠어!”
남편은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전화기가 바로 코 앞인데도 나이 때문인지 참 느리다. 느려터졌다. 그런데 도중에 부인이 불러세웠다.
“ 아니 당신. 조금 전에도 이러지 않았수우?”
“ 그게 뭔 소리당가?”
“ 아, 아니외다. 전화 거쇼. 난 잘 테니까아. 거 참 이상하네... ... 분명 기억이... ...”
“ 흠, 싱거운 사람.”
부인은 이상 야릇한 데자부를 느끼며 다시금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남편도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화기를 귀에 걸었다.
Scene 06. 화려한 만남!
[ 시간은 한 30분 정도 있다가 이리로 와 주세요. 아까 말한 물건들 중에서 하나도 빼먹으면 안 되요. 알았죠? 그럼 바빠서 이만.]
" 어이! 이봐, 잠깐! 끊지 말아봐!"
사내의 애타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전화는 무심히 끊겼다. 비좁은 사무실 안.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투덜거린다. 지금까지 여러 손님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런 예의없는 손님은 처음이다. 자기 할 말만 쏙 하고 확 끊어버리다니! 적어도 위치 정도는 말해주고 끊어야 예의지! 사내는 가지 말까 - 하고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 그래.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라면 이런 예의없는 주문이라도 수락해야는 거겠지. 그런 직업 정신, 자세야 말로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길이니까! 프로는 손님을 가려받지 않아."
그는 연신 프로페셔널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다시금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 어, 머레이냐? 난데,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 내 지금 바쁘다. 네 일만 일이고 내 일은 일도 아니냐?]
" 거 새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십년 우정을 확인하는 셈치고 나 좀 도와줘."
사내의 부탁에 수화기 너머의 친구라는 양반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래? 나 쥐뿔도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 새꺄. 케이블과 관련된 일인데 너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하겠냐?"
케이블이란 소리에 수화기 너머 친구의 목소리가 트였다. 일단 목소리 부터 트이는 걸 보니 정말 전문이기는 한가 보다. 하지만 또 나름의 자존심을 위해 관심 없는 척 건성으로 말을 이었다. 괜히 헛기침만 흠흠.
[ 케이블이 뭐 어쨌는데.]
" 방금 한 손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글쎄 장소를 말 안 하고 끊지 뭐야. 너라면 가능하겠지? 응?"
[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고작 그런 일로 전화한 거였어? 너 바보냐? 간단한 거잖아.]
" 오 - 그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사내가 수화기 깊숙히 귀를 파묻으며 묻자 친구의 대답은,
[ 재다이얼 눌러 새꺄.]
이었다. 순간 사내는 목줄기에 짜르르 풍이 밀려오는 것을 느껴야 했다.
" 미친놈! 그런 건 내 고결한 직업 정신에 배반하는 행위라고!"
[ 그래? 네가 부탁하는 일은 여신님께서 정하신 법도를 어기는 일인데?]
" 야! 개새끼야! 너 정말 이러기냐!"
[ 뭐? 개새끼? 전화 이만 끊는다. 다음에 보자.]
" 아아! 미안해! 잘못 했어. 내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욕을 해버렸어. 정말 미안. 진심으로 사과할 게. 좀 도와주라 마. 정해진 시간 안에 못 가면 나 땡전 한 푼 못 받는다니까? 임마 너는... ... 크흑. 잠깐 눈물 좀 닦고."
사내는 눈물 닦는 시늉까지 해가며 계속해서 말을 했다.
" 임마 너는 여신님 밑에서 일 하니까 돈도 많이 받을 거 아니냐. 그런데 나는 맨날 도적질만 일삼다가 이제 마음 잡고 제대로 좀 살아보겠다는데. 근데 네가 안 도와주면 내가 다시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잖니? 그렇게 생각 안 하니?"
[ 아, 알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는 시늉 그만하고. 그러지 않니 - 이러는 거 아니니 - 이 따위로 말하지 마라. 토 쏠린다.]
"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그 말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 씹새끼야!!! 그만해!!!]
친구의 부탁 아닌 부탁에 사내도 거기서 농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표정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 얼마나 걸리겠냐?"
[ 원한다면 2분 안에도 가능하다. 너는 괜찮겠어?]
" 마지막 1분을 남겨놔도 괜찮아. 내가 누구냐, 명색이 '미스터 택배맨'아니시겠냐!"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붉은 문신으로 '정십자가'가 세겨져 있었다. 역십자가 아닌 정십자가다.
빨강. 지금 이곳은 눈이 다 피곤할 정도로 붉었다. 그 붉음이라 함은 너무도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어서 절로 야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키리에가 지금 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붉고 고급스런 침대 위에 묶여 있었다. 이곳은 붉은 방. 꽤나 넓었는데 방의 둘레에는 이와같은 침대들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그 숫자가 꽤나 많다.
' 뭔 침대가 이렇게 많담.'
여기서 일했던 하인들의 숙소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고급스럽다. 너무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웠다. 숙소 개념으로 보자면은 역으로, 침대의 숫자가 너무 적은 편이고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 대충 감이 오는 걸. 내 예상이 맞는다면 여기는 그레고리 가의 장남 방이겠군. 계집 놀음과 술에 절어 살던 탕아, 돈쥬앙!'
이야기는 키리에도 대강 알고 있다, 귀신이 되어서도 색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 답다고나 할까나.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에 있는 침대들의 용도도 뻔하다. 마을의 여성을 잡아다가 이 침대에 묶어놓고 한 없이 즐기려는 속셈이겠지. 아니, 벌써 즐겼으려나? 모르겠다.
" 지금 내가 묶여 있는 것도 그 이유인가? 망할!"
중얼거리며 포박된 손목을 이리저리 흔들던 중, 문득 하체가 선선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어디서 바람이 세나 - 생각하며 턱을 당겨 밑을 내려보는데, 그걸 본 순간 놀라서 까무라칠 뻔 하였다. 아니, 까무라쳤다.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여성스러운 면모였다. 그녀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 돈쥬앙이라는 놈이 한 짓인지 옷이 홀딱 벗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속옷과 셔츠는 입혀진 상태였다는 것 정도? 정말 아쉽지 아니 않을 수가 없다. 키리에가 당황해 하며 다리를 베베 꼬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 오우! 웰컴~ 웰컴~ 웰컴 투 더 마이 러브룸!]
그다. 돈쥬앙!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의 등장에 키리에는 이를 갈았다. 하얀 양복, 멋드러지게 텃에 나 있는 수염. 겉으로만 보자면 세련되다 못해 부티나는 미남이다. 속이 썪어빠진 강간마라는 점이 문제지만 말이다. 실로 특이한 귀신이 아닐 수가 없다. 다른 귀신들은 복수심에 미쳐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기에 바쁜데, 이 놈은 살아 생전의 욕망을 버리지 않고 이성을 잠식 당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게 다 돈쥬앙이 타 귀신들 보다 뛰어나다는 반증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수든 색욕이든 한 가지 감정만이 가득하다는 점은 결국 다 똑같다는 소리인 것 같다.
[ 저는 그레고리 가의.]
말을 가로챈다.
" 그레고리 가의 장남으로써 살아 생전의 나이는 스물 다섯. 좋아하는 것은 술과 여자 같은 향락등과 관련된 것들. 그리고 아끼는 것은 오보에와 수염."
[ ... ... 후후후. 잘 알고 계시는군요. 평소에 절 사모하시던 분인가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레이디의 사랑을 남몰래 받고 있었다니, 과분할 따름입니다.]
' 지랄하네."
키리에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돈쥬앙이 놀라며 말했다.
[ 이런 이런. 이거 실수했군요! 이렇게 레이디를 애타게 하다니! 기다리십시오. 이제 곧 저의 뜨거운... ...!]
돈쥬앙이 당장에 지퍼를 내리고 달려들자 키리에가 골반을 틀며 외쳤다. 이런 경우없는 상황에서는 키리에도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나 보다.
" 나! 난... ... 과격한 게 싫어요."
그녀의 허벅지를 놓아주며 돈쥬앙이 물었다.
[ 과격한 게 싫다면 어떤?]
" 부... 부드럽게."
바닐라를 혀 끝에 찍어바른 것처럼 목소리가 달콤살콤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돈쥬앙의 남근에 불끈!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단지 목소리 하나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키리에는 유혹 하듯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말을 더했다.
"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을 상대해 보구서도 아직도 모르겠나요? 여성들은 과격한 거나 큰 거, 그리고 빠른 거는 원하지 않아요. 부드럽고~ 적당하고~ 천천히, 느릿느릿한 걸 좋아해요."
키리에의 언변에 돈쥬앙은 평소엔 느낄 수 없는 이상야릇한 감정에 고취되었다. 사정 때의 쾌감도 이런 느낌을 주지 못하였다. 대체 뭘까, 이 감정, 이 느낌은. 돈쥬앙은 잔뜩 흥분해가지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키리에를 향해 걸어갔다.
" 키스해줘요. 부드럽게."
그녀의 부드러운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갠다. 그리고는 그녀의 붉고 촉촉한 입술 위로 살며시 혀를 가져갔다. 그러는 도중에 눈이 마주쳤는데 키리에의 동공 속에서 수상한 낌새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함정!? 돈쥬앙이 급하게 입을 땠고 동시에 키리에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목이든 귀든 어디든, 어디 한 구석을 물어뜯으려는 속셈이었다. 허나 그보다 먼저 돈쥬앙이 눈치 채버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 젠장할! 이 앙칼진 암코양이 같으니라고!]
돈쥬앙이 한 박자 빠르게 반응한 덕분에 키리에의 이빨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벽에 등을 기댄다. 황홀한 기분에 도취되어서는 멍청맞게 상처 입을 뻔 하다니! 돈쥬앙은 반성하며 이를 갈았고 키리에는 아까워 하며 이를 갈았다.
" 씨이발! 꺄악! 아까워!"
[ 요망한 년! 감히 날 속이려 들어?]
" 뭐가 이 개같은 자식아! 너 따위 놈에게 강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차라리 날 죽여! 그냥 죽이라고!"
이것 마저 실패해버리다니. 이젠 끝이다, 끝! 키리에는 그리 생각하며 체념한 듯 인상을 구기며 눈을 감았는데 이 때, 근원을 알 수 없는 진동이 느껴졌다. 미세하게 건물을 흔드는데 '그것'은 점차 여기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듯 하였다. 확실하게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여기로 오고 있다! 이내 그것은 돈쥬앙이 기대고 있던 벽을 무너트리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덕분에 벽에 기대고 있던 돈쥬앙은 그 틈지막한 것에 찍 소리도 못하고 깔려야 했다.
" 앗싸, 29분 54초!!! 빌어먹을 머레이 자식! 2분은 무슨 얼어죽을 2분이야! 덕택에 늦을 뻔 했잖아."
그것은 어지간한 여성의 보다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커다란 바이크였다. 그 위에는 역시 검정색으로 통일한 가죽 슈트를 입은 사내가 엉덩이를 깔고 있었다. 그가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리며 말하였다.
" 약속한 물건 가지고 시간 내에 왔수다... ... 만, 왜 그런 꼴을 하교 계슈? 지금 날 유혹하는 거요?"
" 미친 소리 말고 어서 나를 풀어줘요!"
" 내가? 내가 왜?"
" 그... 그야, 그래야 내가 당신에게 돈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돈이라는 말에 '짤랑'하는 소리와 함께 그제서야 키리에를 풀어주었다. 이런 상도 없는 장사치 같으니라고! 암튼 포박이 전부 풀리자 키리에는 택배맨의 뺨에 입맞춤을 선사하고 소리를 질렀다.
" 야호! 자유다! Freedom"
" 헤."
불의의 기습에 택배맨의 코와 귀에서 스팀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환상을 훌훌 털어버리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키리에도 택배맨의 마음을 알았는지 대충 옆에 있는 그림을 집어다가 주었다.
" 이건?"
" 뭐긴 뭐에요. 귀신들이 사는 폐성이 되어버린 그레고리 성에 있던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진귀한! 유니크한 그림이지요."
" 뭡니까 진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런 거 안 받습니다. 현찰! 현찰 박치기!"
" 거 참. 뭘 모르시네, 이 사람이. 경매 시장 가서 알아보세요. 미친 부자 새끼들이 돈 지랄하느라 아유 그냥. 좀 특이하고 진귀하다 싶으면 진짜 쎄게 부른다니까요? 정말이에요. 가서 한 번 확인해 보라구요."
의심이 눈빛이 지속되었지만 키리에의 거듭된 설득으로 대충 넘길 수 있었다. 물론 키리에는 자신이 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고 막 지어낸 소리였다. 그래도 뭐 사실일 가능성을 배재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돈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결하긴 해야겠고... ... 이 바닥이 원래 다 그런 것이다. 그림을 건네받은 택배맨은 오토바이에 매달아 놓았던 큼지막한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 아가씨가 의뢰한 물건들이오. 그런데 이것들을 죄다 어디다 쓰려는 겁니까? 테러라도 할 참 입니까?"
키리에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들을 확인했다. 알 수 없는 쇳덩이들과 샷 건 한 정. 그리고 여벌의 칼 한 자루. 마지막으로 이 성을 통채로 날려버릴 수 있을 만치의 아니, 그러고도 남을 만큼의 다이나마이트 까지! 이 정도 무장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키리에의 입가에는 잔혹한 웃음꽃이 피었다. 괜히 옆에서 보고 있던 택배맨이 오싹해 할 만큼 섬뜩한 웃음이었다.
" 저기 말이외다. 이 성을 통채로 날려먹건 구워먹건 삶아먹건 그건 아가씨 맘인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폭탄의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전문가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말이죠 - 딱 스무 개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주문한 폭탄은 50개다.
" 상관 없어요. 현재에 쓸 것, 나중에 쓸 것, 그리고 언젠가 쓸 것 까지 합치면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니까요."
키리에의 말에 택배맨의 눈빛이 조금 묘해졌다. 그러더니 거리를 좁히고는 귀에다 속닥이는 게 아닌가?
" 저기 아가씨. 아가씨도 혹시 반 홀리 크로스 입니까?"
" 네?"
" 걱정 말아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키리에는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숨소리를 죽였다. 이런 곳에서 반군을 만날 줄이야.
" 이걸로 홀리 크로스를 치려는 거죠? 그렇죠?"
" 후후.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반군인가 보죠?"
택배맨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똑바로 세워져 있는 십자가가 깊히 세겨져 있었다. 역십자는 홀리 크로스에 대한 충성과 그 자체를 나타내는 상징이고 그냥 십자가는 그에 대한 불신과 불복종 즉, 반목을 나타낸다. 그 십자가를 보자마자 키리에의 입 꼬리가 기괴하게 말려 올라갔다.
" 아하 - 그러셨구나. 반군이셨구나... ..."
키리에의 손이 천천히 샷 건을 집어 올렸다. 기묘한 웃음과 손에 들린 샷 건,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빛까지. 택배맨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고는 천천히 뒤로 물렀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수상하게 여기고 발포할 지도 모른다. 와이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던 키리에가 슬쩍, 위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저러다 가슴이 다 드러나겠다.
" 아... 저... 마음은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는."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르겠다. 꼭 있다 - 숲을 가리키면 숲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말이다. 택배맨이 무얼 기대한 건지는 몰라도 키리에가 보여준 건 가슴에 나 있는 모 마크였다. 택배맨의 손에 나 있는 정십자와 상반되는 '역십자'! 무거운 추가 떨어진 것처럼 택배맨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충격을 받은 택배맨이 낮게 읊조렸다.
" 좃 됐다... ..."
" 움직이지 마."
택배맨이 움직이려 하자 키리에가 샷 건을 들어 위협했다. 이 정도의 지 근거리라면 아무리 날랜 사람이라도 피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 총은 탄피를 흩뿌리는 스타일의 분사형이기에 범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 이데올로기가 투철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도 사람 봐가면서 해야지. 안 그래?"
심장에 겨누었던 총구를 머리에다 겨누자 그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그대로 쏴버린다면 자신의 얼굴이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찢겨질 테니 말이다. 물론 죽는 건 아무래도 싫지만 심장이 찢기는 것과 얼굴이 찢기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죽는 건 아무래도 싫지만 심장이 찢겨서 죽는 것과 얼굴이 찢겨서 죽는 것 중 고르라면 단연 후자랄까나? 적어도 택배맨의 마음은 그랬다. 택배맨은 도망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고 키리에는 그런 택배맨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총구를 도로 내리는 게 아닌가?
" 사... 살려주는 건가요?"
" 본래 반군은 발견 즉시 사살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 쪽도 나를 살려줬으니까. 이걸로 서로 쌤쌤 된 거지 뭐. 난 빚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 아아. 감사합니다 누님!"
" 그리고 이거."
키리에가 무언가를 건냈는데 그것은 조금 전에 배달 받은 다이나마이트의 일부였다.
" 누님, 왜 이걸 저에게."
" 네 말대로 생각해 보니 양이 너무 많은 거 같아서 말이야. 이 많은 걸 지고 갈 힘도 가방도 없거든."
" 알았습니다만... ... 저 살려주시는 거 맞지요?"
" 맞다니까 그러네."
재차 확인을 한 그는 헤헤 거리며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손에 쥐어주는 게 아닌가? 손을 펼쳐서 확인해 보니 그냥 돈이었다. 지폐 몇 장. 꼴에 감사하다는 의미의 보답인가 보다. 키리에는 웃으며 놈의 손에 도로 돈을 들려 주었다.
" 돈 같은 건 필요 없네요 이 양반아. 됐으니까 어서 가. 나 많이 바쁘니까."
" 넵! 알았습니다 누님! 그럼 다음에 뵙... ... 아! 그건 안 되겠구나. 암튼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누님."
그는 키리에가 생각이 바뀔 세라 냉큼 바이크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자기가 뚫고 들어온 구멍 밖으로 나갔다. 키리에가 놀라서는 잠시 구멍 밖을 살펴보니,
" 맙소사. 여기가 대체 몇 층이야?"
오보에 하고 싸웠을 때가 5층이었는데 여기는 한 10층 쯤 돼 보이는 것 같다. 여기가 10층 위치라는 것이 첫번 째 놀라운 것이었고 두번 째 놀라운 것은 바로 택배맨이었다. 아니, 이 놈이 글쎄 총 앞에서 벌벌 길 때는 언제고 바이크로 성 벽을 미끄러져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는 건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성 벽을 타고 올라왔단 소리일까? 키리에는 내심 놀라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쿨럭 쿨럭!]
떡이 되어 있었던 돈쥬앙의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아니, 귀신이 잊혀져 있었다.
" 아참. 그러고 보니 당신을 잊고 있었군. 언제 일어났어?"
척 보아하니 많이 꼴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고고하게 막고 마시고 하던 양반이 엉망으로 바닥에 처박혔으니 말이다. 돈쥬앙에게 이런 굴욕은 처음일 것이다. 키리에는 이해 못할 그런 굴욕감이었다.
[크으.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이런 굴욕감... ... 수치심!]
“내가 그랬나. 괜히 열 받기는.”
[더 이상은 못 참아!]
콰지직! 돈쥬앙의 가슴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길 다란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첫 봐도 살상용 같지는 않았기에 키리에의 인상을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촉수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총 하나, 둘, 셋, 넷... ... 총 19개다. 침대의 숫자는 스무 개.
‘얼라리? 하나 모자라는 거 아닌가?’
모자라는 게 아니다. 돈쥬앙 본인 것 까지(!) 합치면 스무 개가 딱 들어맞는다. 대충 납득한 키리에는 샷 건을 들어보였다. 총신을 어깨에다 대고 안마 하듯이 토닥여 보였다.
“어때? 피할 수 있을 거 같아? 이건 보기보다 범위가 제법 된다고.”
[오호 - 그러신가?]
느글거리는 촉수 하나가 벽면에 나 있는 스위치를 눌렀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바닥이 마치 야바위판처럼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발이 없는 돈쥬앙이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지만 키리에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자세가 무너졌으며 동시에 총도 놓쳐 버렸다.
[후하하하! 저의 회전하는 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메인 디쉬에 들어가 보실까요?]
“ 개자식! 더러운 새끼!”
[후하하! 이거 어쩌나요. 당신은 곧 있으면 그 더러운 자에게 능욕을 당하게 생겼는데 말입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말이죠. 후하하!]
키리에는 자세를 바로 잡으려 노력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속도가 일정하다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변칙적으로 속도를 바꿔가며 키리에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오히려 일어나려 할수록 더욱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을 넘어지고 보니 눈 위로 별들이 뱅뱅 돌기 시작했다. 천하의 키리에라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 계속해서 바닥이 빙글빙글 회전하던 중, 키리에의 앞으로 샷 건과 장검이 나란히 늘어섰다. 보이는 김에 일단 잡기는 했지만 도저히 이 상태로는 놈을 칠 도리가 없다. 이 회전판이 멈추기 전까지는 절대 답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돈쥬앙은 다시 한 번 폭소를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하니 돈쥬앙도 웃을 때만큼은 기품이고 자시고 없는 거 같다.
[후하하하! 왜 그러시죠? 어서 저를 당해내 보시죠. 칼로 저를 찌르고 총을 쏴 보시라니까요? 어지럽나요? 구토감이 밀려오나요? 멈추고 싶나요?]
“칫!”
회전하는 와중에 아무렇게나 방아쇠를 당겨 보지만 천정만 긁어댈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키리에는 잠시 감정을 죽이고 이성적으로 전략을 강구했다. 그리고 가만히 회전에 몸을 맡긴 채 귀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공허한 회전 속. 그 안에서는 작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소리가 천천히 키리에의 귓가에 잡혀왔다. 따각따각. 서로 이를 맞물린 채 돌아가는 정교한 시스템의 소리. 톱니바퀴의 소리다! 소리의 정체를 알아 챈 키리에는 검을 역수로 잡고서 바닥을 향해 찍었다. 바닥이 돌아갈 정도면 섬세하면서도 거대한 톱니 장치가 밑에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대한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고 말이다. 그녀는 돈쥬앙의 정면에서 멈춰 섰고 총구를 들이밀며 짧게 한 마디를 던졌다.
“체크메이트다, 씨발 새끼야.”
쾅! 지축을 울리는 우레와 같은 총성이 터졌다. 그리고 전신을 탄피로 얻어맞은 돈쥬앙은 그대로 벽을 부수며 성 밑으로 추락하였다. 떨어지면서 촉수로 어딘가를 잡고 매달릴 만도 하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촉수들은 피스톤 운동에만(?) 강한가 보다. 돈쥬앙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흡수한다.
“이걸로 그레고리 가의 두 남매도 끝인가? 그럼 딱 절반까지 왔군.”
키리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부서진 벽 너머로 보이는 도시 풍경을 감상했다. 페르소나의 밤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어서 그다지 볼 건 없었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홀리 크로스의 성 만큼은 정말 절경이었다. 엉뚱한 시각으로 보자면 우뚝 솟은 남근처럼도 보였지만 달을 등지고 있는 홀리 크로스의 성은 분명 아름다웠다.
Scene 07. 도청.
비 내리는 음울한 마을. 이곳은 페르소나가 아니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홀리 크로스의 성과 상당히 근접해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석 대의 헬기가 날아들어서는 부대원들이 로프 강하를 시작하였다. 아무리 비가 내리고 어두컴컴한 시간대라지만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다. 당연했다. 이미 홀리 크로스의 전언이 떨어진 터라 인근의 사람들은 전부 대피소로 피한 후였다. 대원들 중 하나가 무전기를 들어 말하였다.
“여기는 두더지 셋. 하늘소, 들리는가.”
[여기는 하늘소. 잘 들린다, 오바.]
작전을 총괄 지도하는 이는 현재 여신의 옆에서 그녀와 함께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그 스크린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즉석으로 감시할 수가 있었다. 여신의 옆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 역시 군인답다. 스크린에서는 대원들이 어깨에 달려 있는 카메라를 통해 영상을 수신하고 있었다. 그 외에 헬기 안에서도 카메라맨들이 촬영 중이어서 여러 각도로 상황을 감상이 가능케 하였다.
“해당 포인트에 도착했다.”
[그럼 신속히 안으로 침투해주기 바란다. 살아 있는 자는 전부 생포하고 자료가 될 만한 것들도 모두 수집해 오도록.]
“알았다 오바. 그럼 작전을 개시하겠다.”
목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집이었다. 집 주소를 토대로 주인의 신원을 파악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주인이나 아예 집 자체에 대한 등록 정보가 없다. 이를테면 유령의 집인 것이다. 홀리 크로스 내에 자료가 없다는 것은 불법으로 세워
엄청 기네요... 재밌습니다!
감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