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팀이 옥상 문을 따고 들어가자 1팀도 침입에 성공하였다. 내부가 너무 어두워서 야시경을 켜야 할 정도였다. 물론 스크린을 통해서 보고 있는 군 지휘자와 오페라도 야시경으로 보는 거와 똑같은 느낌으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녹색 바탕에 조금 지글거리기는 했지만 암흑 천지 보다야 낫겠지. 하지만 특수 부대가 아닌 오페라는 이런 영상으로 보는 것이 불편한지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때였다. 미세하게 팅 -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무전기를 통해서는 부대원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폭음이 울려 퍼졌다.
“ 무, 무슨 일이지? 채널 번경!”
헬기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보니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지개벽이 난 것 마냥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근처에 사람들을 대피시켰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대형 참사가 날 뻔 했다. 군 지휘자도 한동안 넋이 나가서는 스크린에서 눈을 때지 못하였다.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용의자나 증거는커녕 그들은 돌무더기나 뒤져야 했다. 비록 산산조각이 나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뭐가 또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잠시 후. 사고 지점의 조사를 위해 제 3팀이 보내졌고 녹화 테이프도 조사팀에게 보내졌다. 이제는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오페라는 마냥 기다리는 것이 지루한지 옆에서 보좌하고 있는 군 지휘자에게 말을 텄다.
“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그 아이’에 대한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죠?”
“ 아직 수사에 대한 진전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전혀 겁먹지 않고 또잇또잇 정확히 말하였다. 그 우직함에 여신마저도 살짝 이끌릴 정도였다. 보통 이런 종류의 실망을 불러일으키는 대답은 하기 어려워하는 게 보통이다. 더군다나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가! 이 나라의 정치적, 종교적 통치자인 여신 오페라가 아닌가! 여신 앞에서도 겁을 먹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충성심이 뛰어나기 때문이리라. 그와는 반대로 겁이 많을수록 교육이 덜 돼 있고 충성심도 부족하다는 소리겠지. 오페라는 따분한지 손가락을 까딱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나나~ 나나나~”
그 소리가 어찌나 영롱하고 아름다운지 옆에 있던 군인마저 발끝을 까딱일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프리즘이 소리로 형용 된다면 분명 이런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찬란한 무지개 빛 멜로디는 채 2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그냥 저냥 노래만 부르는 것이 따분했나 보다. 그러다가 때마침 떠오른 것이 있는지 무릎을 탁 쳤다.
“참참. 심심한데 우리 무작위 도청이나 해보지요?”
“알았습니다.”
군인이 왼 발을 쿵 - 하고 울리자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무작위 도청이다. 아무 가정이나 무작위로 골라다가 그 집의 통화나 일상의 대화를 엿 듣는 것. 바로 그것이다. 통화 내역이나 실시간 통화 내용을 듣는 것이 가능한 건 A국의 독특한 법안 때문이다. 우선 집집마다의 케이블 선은 반드시 홀리 크로스의 성을 거쳐야만 하며 또한 집마다 달려 있는 빨간 역 십자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도청장치에 불과하다. 물론 신이 정하신 뜻이니 누구도 토를 달지는 못한다. 토는커녕 의심조차 하지 않겠지. 그녀가 단순히 정치적인 지도자에 머물렀다면 이런 정책은 시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는 정치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지도자이다! 민중의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도청감청도 용서가 되는 이유는 그녀가 바로 여신이기 때문이고 말이다.
[여보. 나 할 말이 있어.]
[뭐가요, 여보?]
역 십자가를 이용한 도청이 시작됐다.
[정말 이상해. 예전부터 그랬단 말이야.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지만, 이제는 말해야겠어.]
[그러니까 뭔데요 그게.]
[나... ... 시력이 너무 좋은 거 같아.]
[시력이요? 에이, 당신도 참.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별 시덥지 않은 내용에 군인이 화선을 바꾸려 했으나 오페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더 들어보자는 것이다. 군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고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여보. 시력이라면 나도 좋은 걸요. 너무 좋아서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팬티 색깔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걸요. 어디 보자 - 뚜뚜뚜뚜뚜. 으앗! 노 팬티다!?]
[나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당신이야말로 너무 그렇게 우뚝 솟아 있으면 내가 부끄러워지잖아요. 아잉.]
[... ...]
나름 화기애애한 대화에 오페라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옆에 있는 군인은 열중 쉬어 자세로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이건 무슨 목석도 아니고.
[알았어요, 알았어. 농담은 이쯤하자고요. 시력이 얼마만큼 좋기에 그래요?]
[대략... ... 몇 백 미터밖에 있는 글자나 곤충 따위가 눈에 보인 달까나? 다른 지역의 기후 변화도 다 보이고.]
[에이. 농담 말아요. 당신이 무슨 수퍼맨도 아니고.]
[진짜라니까?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내 눈을 좀 보라고.]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군인과 오페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동공이 놀라고 있다.
“우성인자!”
“간만에 우성인자의 출현이로군요.”
우성인자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의 출현 아닌 출현에 공기의 흐름이 싹 바뀌었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페라가 손짓을 했고 군인은 곧바로 무전기를 입에 갖다 댔다.
“지금 도청하고 있는 집의 위치를 확인하기 바란다.”
[H - 17구역. 좌표 370 - 415입니다. 이제 갓 결혼한 지 1개월 된 젊은 부부가 살고 있군요. 한창 좋을 때에요.]
오퍼레이터가 무전을 받았다.
“사설은 그만하면 됐다. 그리로 당장 해결사들을 보내. 남편 되는 사람을 잡아 오도록.”
[오랜만에 보는 우성인자의 출현이군요. 알았습니다. 그리로 해결사를 보내도록 하지요. 아참. 조금 전에 페르소나에서 신고가 들어왔는데요, 진짜 웃기지도 않아서. 아 글쎄, 귀신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지 뭡니까? 하하하!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에 있다고. 목소리를 보아하니 노친네들 같던데 노망이 들었나? 쯧쯧쯧. 이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귀신이란 소리에 오페라가 이를 갈았다.
[여신님?]
“아... 조금 있다가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알았습니다, 그럼.]
“도청을 계속하지요.”
갑자기 손부채질을 하는 것이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그렇게 퍽이나 수상한 티를 내가면서도 도청은 계속된다.
[어, 머레이냐? 난데,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내 지금 바쁘다. 네 일만 일이고 내 일은 일도 아니냐?]
[거 새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십년 우정을 확인하는 셈 치고 나 좀 도와줘.]
어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에 오페라의 귀가 쫑긋, 발기했다. 이게 누구 목소리더라?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래? 나 쥐뿔도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새꺄. 케이블과 관련된 일인데 너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하겠냐?]
[케이블이 뭐 어쨌는데.]
[방금 한 손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글쎄 장소를 말 안 하고 끊지 뭐야. 너라면 가능하겠지? 응?]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고작 그런 일로 전화한 거였어? 너 바보냐? 간단한 거잖아.]
[오 - 그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오페라의 얼굴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본 통화의 목소리 중 하나는 바로 케이블가이의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건 케이블가이의 목소리다. 오페라는 손으로 이마를 덮으며 계속해서 통화를 경청했다.
[재다이얼 눌러 새꺄.]
[미친놈! 그런 건 내 고결한 직업 정신에 배반하는 행위라고!]
[그래? 네가 부탁하는 일은 여신님께서 정하신 법도를 어기는 일인데?]
[야! 개새끼야! 너 정말 이러기냐!]
[뭐? 개새끼? 전화 이만 끊는다. 다음에 보자.]
[아아! 미안해! 잘못 했어. 내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욕을 해버렸어. 정말 미안. 진심으로 사과할 게. 좀 도와주라 마. 정해진 시간 안에 못 가면 나 땡전 한 푼 못 받는다니까? 임마 너는... ... 크흑. 잠깐 눈물 좀 닦고.]
오페라의 손이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임마 너는 여신님 밑에서 일 하니까 돈도 많이 받을 거 아니냐. 그런데 나는 맨날 도적질만 일삼다가 이제 마음잡고 제대로 좀 살아보겠다는데. 근데 네가 안 도와주면 내가 다시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잖니? 그렇게 생각 안 하니?]
[아, 알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는 시늉 그만하고. 그러지 않니 - 이러는 거 아니니 - 이 따위로 말하지 마라. 토 쏠린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그 말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 씹새끼야!!! 그만해!!!]
[얼마나 걸리겠냐?]
[ 원한다면 2분 안에도 가능하다. 너는 괜찮겠어?]
[마지막 1분을 남겨놔도 괜찮아. 내가 누구냐, 명색이 '미스터 택배맨'아니시겠냐!]
파직! 결국 팔걸이가 짜부라져 나무 톱밥을 토해냈다.
Scene 08. 아리아와 오페라.
그녀는 하루 종일 홀리 크로스만 쳐다보았다. 그레고리 성의 10층. 벽이 뚫린 돈쥬앙의 방에서 밤새도록 홀리 크로스의 성만 지켜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 세련되고도 고풍스런 매력에 빠져들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니, 망신이다. 이런 낭만적인 모습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쓴 웃음으로 자위하며 방을 둘러 자신의 물품을 찾았다.
“그나저나 내께 어디로 갔지? 돈쥬앙 이 새끼, 어디다 짱 받아 둔 거야? 바른대로 말 안 할래?”
이곳엔 더 이상 돈쥬앙이 없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뜬금없이 혼잣말을 하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머리를 잡고 마구 쥐어뜯었다. 누가 보면 미친 여자로 오해를 사겠다. 지금까지의 행동들로 보아 충분히 버금가는 이미지이지만 말이다. 잠시 자해를 거두고 방의 이곳저곳을 뒤져 자신의 짐을 찾았다. 하지만 무기 정도나 있지 옷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 돈쥬앙의 옷장까지 뒤져야 했다. 자고로 남자 옷과 여자 옷은 구분이 되어 있지만 급하면 그것도 없는 법인가 보다. 남자 옷이라는 게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같은 여자인 오보에의 취향 보다는 나으리라. 오보에의 소녀 취향이 가득한 의상들은 그야말로 구역질이 났으니까 말이다. 15세 소녀이니 당연한 걸까? 아예 옷을 안 입자니 지금의 셔츠 차림은 너무 민망하다.
“옳거니! 이거 괜찮네.”
새 옷을 보고는 좋아라한다. 이것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키리에의 여성스러운 면모였다. 키리에가 꺼내든 옷은 ‘머스킷티어’의 느낌이 나는 그런 옷이었다. 고풍스럽고, 각이 지고, 딱딱한 분위기에 나름의 중후한 멋이 우러나왔다. 그렇게 상, 하의 제복에 군화까지 맞추고 나폴레옹이나 썼을 법한 모자를 걸치고 나니 완벽한 머스킷티어의 재탄생이다!
“딱 좋아.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걸?”
잠시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멋을 뽐내는데 그 너머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사람 마음을 간드러지게 만드는 그런 신음이 아니라 정말로 고통에 겨운 듯한 그런 신음성이었다. 군화발로 거울을 깨트려 보니 그 안에는 널찍한 빈공간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식량창고의 쌀가마니라도 되는 것처럼 초췌한 몰골의 여성들이 쌓여 있었다. 헬쓱한 얼굴들을 보아하니 이 안에 갇혀 살면서 돈쥬앙에게 필요 이상으로 과한 애정을 받았나 보다. 그 사랑스러운 촉수로 말이다. 그녀들 중 하나가 머스킷티어 복장을 한 키리에에게 힘없이 손을 뻗으며 사정하였다.
“제발... ... 살려주세요... ...”
“허?”
“마을로 돌려보내 주세요... ...”
“약한 척 하지 말고 두 다리로 일어서.”
키리에는 두 눈을 내리깔며 고압적으로 말하였다.
“지금은 아침이거든, 이 병신들아. 다시 밤이 오기 전에 얼른 일어나. 니들 발로 밖으로 뛰어나가란 말이야! 나는 바쁘니까. 짜증나게시리.”
딱딱딱. 놉다란 구두 굽을 튕기며 오페라가 앉아 있다. 자신의 지정석인 천 개의 계단 위의 의자에서 말이다. 버릇인지 뭔지 그녀는 발을 떨고 있었는데 덕분에 구두굽이 바닥의 대리석과 맞닿으며 딱딱한 소리를 냈다. 거기다가 손톱을 깨물기 까지. 여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다. 다른 무엇도 아닌 여신이다. 영어로 하면 Goddess. 여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신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물론 여신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이라면 필시 인간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그런 여신이 미천한 인간들과의 교차점이 있다면, 더군다나 아주 사소한 대에서 접점이 있다면 그건 분명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여신 오페라. 그녀라고 해서 날 때부터 여신이었던 건 아니다. 태어날 때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이제부터 이 여성, 오페라에 대해서 설명해 보려 한다.
그녀는 그냥 가난한 집의 아이로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도 오페라가 아니라 아리아였다. 여느 애들과 비교해서 빼어나게 수려하다는 점만 빼면은 보통의 애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 영특하긴 허나 그래봐야 오십 보 백보다. 원래 애들은 잘나봐야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그녀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어떤 사이비 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나라가 한창 과도기에 있었던 시기라 갖은 미신들과 사이비 교의 창궐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아무튼 오지라 그런지 다들 멍청해서 교리가 시키는 일이라면 가족을 땅에 묻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교리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1년에 한 번씩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4계절이 골고루 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물론 4계절은 그냥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 지역 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아리아의 마을은 거기에 해당 사항이 없다. 암튼 아리아는 총명하게도 교리의 허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어린아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그 교리에 주입 당하게 되겠지, 지금의 어린들처럼.
그러니까, 제물을 고르는 방식부터가 이상했다. 거대한 회전판에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서 그것을 돌린다. 그리고 그것이 멈추었을 때, 북 쪽을 가리키는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건 야바위지 절대로 하늘이 정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명 자기네들. 신의 대리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은 그 야바위판에 이름을 적지 않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릴까? 사실 아리아도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들의 전철을 밟을 뻔 했었다. 그런 그를 구제해준 게 바로 한 권의 책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보따리 꾼이 오곤 했는데 아리아를 보자마자
“이야, 너 진짜 이쁘게 생겼구나? 옛다. 이거나 한 번 읽어보련.”
이러는 것이다.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었다. ‘그들이 온다’라는 해괴망측하고 요상한 제목의 소설이었는데 우주인들이 지구를 습격해 온다는 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지구인들은 별 다른 저항을 못 하고 계속해서 도망만 치다가, 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비행선을 타고 우주로 도망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삶을 찾아서! 마지막에 희망을 남겨 놓는 훈훈한 결말 같지만 사실은 보는 이의 기분이 다 나빠질 정도로 뒷맛이 찝찝한 엔딩이다. 왜냐고?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은 대부분 여성(미인), 과학자(지식인), 정치가(권력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우주인의 습격과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이라는 설정도 상당히 충격적이었지만 최후에 살아남는 이들이 소위 말하는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순수한 아리아의 가슴에 칼을 휘젓기에 충분했다. 일단은 그렇게 SF 공상 소설로 시작했다. 보따리 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갖다 주었고 책을 받으면 아리아는 그것을 정신없이 읽어 내렸다. 책은 위대하다. 그리고 그 위대함을 아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몸소 깨달아나갔다. 그 몇 십장 안 되는 종이 안에는 이야기와 사상, 사상과 철학, 철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와 지식이 들어 있었다. 아리아는 그런 것들에 심취해 갔다. 이런 산골의 오지에 재미난 거라고는 배우는 것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읽은 글귀들은 차곡차곡 머리 속에 쌓여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
“사계절은 1년을 네 번으로 나누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으로 다가온다. 사계절이 전부 지나야 비로소 1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봄은 햇살이 따스하며 모든 생명력들이 가장 활기차게 살아 숨쉬는 시기이며 여름은 공기가 더우니 옷을 가볍게 입고 곡식들을 위해 씨를 뿌려라. 가을은 수확의 계절. 여름에 땀을 흘리지 않았다면 가을의 선선함은 너의 것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계절, 겨울은 유지와 소비의 계절. 그간의 노력에 의한 결실 속에서 따스함, 혹은 추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아리아는 연설 아닌 연설을 끝마치고는 벤치 위를 내려왔다. 그 앞에서 연설을 경청한 이들은 전부 신의 대리인들이었다. 아리아가 지식을 뽐내듯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반해 대리인들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완전 넋이 나간 표정이다. 사계절의 순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들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웬 꼬맹이 하나가 초를 치고 앉았으니 말이다.
아리아가 찾아낸 종교와 미신의 근원지는 ‘무지’였다. 세상이 워낙 어수선하고 깊은 곳의 촌 동네라는 점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너무 무지하다. 무식하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고 그 힘이라 함은 역시 지식이 되겠다.
‘반드시 바꿔 보이겠어!’
물론 좋은 취지였지만 그것은 마음대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리아가 조금씩 머리가 트이기 시작한 이상 대리인들이 그녀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다음 해가 되던 날. 그들은 제물을 정하는 회전판을 조작해 아리아가 제물이 되도록 선정하였다. 그녀는 절망 하였지만 교육을 잘 받은 부모님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빛 속에 들린 지독한 무지와 거짓 신앙을 말이다. 마을로부터 도망쳐 나온 아리아는 한 가지를 결심하게 된다. 온갖 비리와 사이비로 가득 찬 세상을 반드시 바꿀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과 같은 힘을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공부한 것이 정치와 종교였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듯 보였지만 상당히 닮은꼴에 속해 있다. 신의 대리인들이 정치와 종교를 융합시켜 흉기처럼 휘둘렀듯이 말이다. 아리아라고 못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보아온 것들이 그런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아리아는 그렇게 다짐을 곱씹으며 마을을 떠나 새로운 마을에 안착했다.
“힘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소인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키키키. 바보.”
이름도 없던 작은 마을에 아리아가 들어간 지 3년도 채 안되어서 하나의 종교가 탄생하였다. 어차피 쌔고 쌘게 신흥 종교였다. 시골 깡촌에 사이비 교가 하나 더 들어선다 해서 이상할 일도 없었다. 마을 내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집을 보게 된다면 그건 분명 아리아의 집일 것이다. 아리아는 붉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 와인을 홀짝였으며 옆에서는 남자 시중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시중이 모르겠다 하자 아리아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만약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힘이 총 100이라 치고 내가 80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20 밖에 힘을 가질 수가 없다는 얘기에요.”
“만약 제가 힘을 키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요. 거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힘이 애초부터 100밖에 되지 않거든요. 힘이 자란다면 당신은 애초부터 20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 10이나 15를 가지고 있었던 게 되겠지요. ”
“그럼 그 이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해요.”
시중의 귀를 잡아당겨서는 부드럽게 그 안에 답을 밀어넣었다. 아리아이 목소리는 그만큼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었다.
“상대방이 가진 힘을 그만큼 빼앗는 거죠. 상대방이 자연적으로 약해지거나 그 힘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야만 해요.”
“어떤 의미로 보자면 마키아벨리즘과 닮아 있으면서도 그 보다 더욱 악질처럼 들리기도 하는군요.”
“후후. 원래 권력 놀음이라는 게 다 그래요. 뺏고 빼앗기고. 부채질은 이만하면 됐고 이만 들어가 봐도 좋아요.”
시중이 퇴장하고 새로운 시중이 바톤 터치를 하였다. 아리아는 방금 들어온 사내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얘기를 전해들은 그는 방금 퇴장한 시중의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가 쿠당탕! 하더니만 와르르! 쏟아지고 푹! 하는 북 가죽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아리아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도 따분한지 턱을 괴고서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상념의 심연 속으로 천천히 머리를 담갔다.
‘이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만 해도 얼마 걸리지 않았어. 이 정도면 내 이론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는 반증이겠지. 이제 슬슬 발을 넓혀 볼까? 솔직히 말해서 이 마을은 너무 작아. 여기만으로는 만족이 안 된다고. 그래. 발을 넓히자. 우선은 내 고향부터 찾아가 볼까? 지금까지의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많이 변했을런지, 때마침 궁금하기도 하던 참이니까 말이야. ’그들‘도 여전히 그러고 있을까?’
아리아는 웃으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의 이름은 ‘정치와 공포의 상관관계’, 올해로 그녀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이다.
페르소나에는 다시금 밤이 찾아왔고 그녀, 키리에도 슬슬 장비를 챙겨 들고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레고리 가의 식구들은 총 4명이다. 첫 째 장남인 돈쥬앙, 둘 째 딸인 오보에. 그리고 그들의 부모인 그레고리와 부인 플룻. 자식들은 전부 처리했으니 이제 두 부부만 남았다. 물론 키리에의 목표는 그레고리 가의 귀신들만이 아니다. 귀신 사냥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모든 귀신들을 잡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키리에의 목적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목적이 아닌 수단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키리에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검은 쇳덩이들을 조립해 나갔다. 전부 다 조립하자 처음엔 쇳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 길 다란 총신의 라이플로 변모하였다. 전체 길이만 해도 2m가 되는 엄청난 길이의 총으로, 스코프만 붙이면 즉석으로 저격총도 된다. 샷 건과 장검은 등에 매고서 키리에는 방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일직선의 긴 복도가 나왔는데 그 광경에 키리에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기 가수의 사인회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귀신들이 길 다란 복도에 우르르 몰려 있었으니 말이다.
“이봐들, 난 스타가 아니라고. 내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었나?”
철컥! 키리에가 장신의 라이플을 허리에 끼우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비좁은 복도에 꾸역꾸역 들어차 있는 귀신들. 그리고 이 라이플의 특징은 ‘관통’이다. 이런 찰떡궁합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리 생각이 미치자 즐거운지 키리에의 입 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키리에는 기다릴 것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그러자 ‘퉁!’하는 울림과 함께 총탄이 발사되었다. 총알이 총구를 벗어났고 차례대로 귀신들을 꿰뚫었다. 그리고는 저 멀리의 성벽까지 뚫고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제 1발을 발사하기 무섭게 키리에는 탄피를 빼냈고 2발을 장전했다. 관통력이 상당하다는 메리트가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디 메리트가 아닐 수 없다. 허나 귀신들이 이미 줄줄이 구멍이 난 지라 시간은 충분했다. 철컥!
“Bang!!!”
두 번 째 탄이 다시 귀신들을 뚫었고 힘을 전부 소진하자 키리에의 귀안이 모두 빨아들였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많이 있는 건지 싹 청소를 하기 무섭게 다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복도는 청소를 해도 해도 끝이 없잖아? 지저분하기는.”
키리에는 라이플을 버리고는 대신 장검을 뽑아들었다. 복도의 귀신들도 날카로운 손톱을 주무기로 공격해 왔지만 리치는 장검이 훨씬 길었다. 키리에의 검이 한 귀신의 배를 찔렀다. 귀신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오합지졸이었다. 둘이 합쳐봐야 하나만도 못한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지형적인 이점까지 더한다면 키리에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이야아아아!!!”
귀신들 중 선두에 있는 놈의 복부를 찌르고는 그대로 복도를 내달렸다. 덕분에 뒤에 있는 귀신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쓸려다가야 했다. 그 기백이 어찌나 쎈지 거대한 불도저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이런 비좁은 복도에 멍청맞게 많은 인원을 끌고 온 것 부터게 에러였다. 이렇게 돼 버리면 우군이 우군이 아니라 짐덩어리가 되니 말이다. 잠시 후, 난장판이 된 복도에는 키리에가 혼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대략 이 자리서 처리한 귀신들이 60명 쯤 될까? 그리고 여지껏 잡아온 놈들의 숫자를 따지자면 500쯤 되겠다.
“헤. 500이라. 한 이쯤 되면은 그 망할 년을 잡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내가 잡았지만 참 많이도 잡았구나.”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암튼 그렇게 힘 없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어깨는 뭐랄까, 참으로 초췌해보였다. 그럴만도 할 것이다. 며칠을 잠도 안 자고 귀신들과 치고박고 싸워댔으니 말이다. 물론 도중에 살짝 잠에 들기는 하였지만 그건 잠이라기 보다는 기절에 가까웠다. 많이 힘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자해를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무 힘든 나머지 정신이 나갔는지 그녀가 갑자기 벽에 머리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이익! 시끄러워! 제발 내 귓가에 대고 지껄이지 마! 저리 꺼져!”
어찌나 세게 들이 받았는지 이마가 깨지고 피가 튀었다. 귀신들과 계속 마주하다 보니 아예 그냥 귀신에 들렸나 보다. 피가 튀어 바닥을 적실 즈음에야 그 행동을 멈추었다.
“휴. 이제야 좀 잠잠해졌네.”
적당히 피를 좀 흘리고 나서야 개운한지 그녀는 성의 상층부로 마저 향하였다.
‘곧 있으면 마지막인가. 슬슬 대미를 장식하러 가 보자고.’
아리아의 나이가 17세가 되던 해. 그녀는 자신의 호위대를 이끌고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자신의 옛 동네는... ... 너무나도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이 한창 혼란스러울 시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게 아닐까? 어떻게 해서 이런 꼴이 된 걸까. 완전 난민촌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도 다 떠났는지 별로 있지도 않고. 소수,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자칭)신의 대리인이었던 자들이 마을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사연이었다. 얘기를 들은 아리아는 그들을 비웃었다. 놀라거나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비웃었다. 무지한 탓에 사이비들에게 홀려, 간이고 쓸게고 다 빼주다니.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는데 누가 누구를 원망하리오. 돈을 가지고 도망친 사기꾼들만 해도 그렇다. 고작 그런 작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등의 대범한 일을 저지르다니! 아리아는 생각했다.
‘그릇이 너무 작아.’
고작 푼돈을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른 데에서 열이 받은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사람을 죽일 정도라면 그보다 더욱 큰 걸 욕망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래서 그놈들 보고 그릇이 작은 거라 한 것이다. 다시 찾은 옛 고향에서 아리아는 다짐했다. 자신은 그보다 더욱 큰 이상을 향해 날아갈 것이라고. 물론 그에 따르는 피해들도 어느 정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변혁에는 필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세상은 영웅을 필요로 했고 아리아는 스스로가 딱 제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하나씩 도시를 점령해 나가, 이제는 언론에 회자될 만큼 힘을 기른 거물이 되어 있었다. 이것도 그녀가 다 방법을 달리 한 덕이다. 어릴 적 그녀의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던 신의 대리인들은 공포와 엄격한 규율을 모토로 내세웠지만 그녀는 그와 정 반대의 방법을 택했다. 물론 그들이 사용한 방법도 괜찮았지만 방법의 특성상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적정선의 테두리 안에서는 확실한 효과를 보장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언제나 기본은 하지만 절대 기본을 뛰어넘을 수는 없달까나.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배품과 인덕이다. 성모 마리아를 연기하는 게 조금 역겹기는 했지만 저변을 넓히는데 이만큼 좋은 것이 또 없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인물의 반열에 오른 그녀는 정치 쪽으로도 눈을 돌리게 된다. 그녀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고 그녀도 슬슬 권력의 맛을 알아가고 있었다.
“야이 새끼야, 머레이!!!”
택배맨 - 웨인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를 쳤다. 아직 번호도 안 눌렀다.
“아차. 전화를 안 걸었네. 칠사공구... ...”
번호를 누르고 통화가 연결되기만을 기다린다. 딸깍. 전화가 걸렸다.
[네. 머레이입니다만.]
“머레이! 개놈의 새끼야!”
[이크, 웨인이냐? 무슨 일인데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어쭈? 정녕 네 잘못을 모르겠단 말이냐? 지금 당장 바이크 타고 쳐들어간다?”
[올 테면 와봐라 새꺄. 여기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이 몇 명인데, 오면 아마 벌집이 될 걸?]
웨인이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리며 성을 냈다.
“네가 2분이면 위치 추적 가능하다고 했잖냐. 그런데 실제로는 몇 분이 걸리셨드라? 28분이나 걸렸잖아. 나 한바 터면 너 때문에 돈 못 받을 뻔 했거든? 그랬거든?”
웨인의 추궁에 머레이는 뜨끔한지 괜히 헛기침을 하였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 치고는 많이 늦은 게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라고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수화기를 고쳐 쥐며 변명을 시작하였다.
[와, 이 이기적인 놈 보소. 내가 부탁 받은 건 사실이지만 위치 추적이라는 게 불법이에요, 씨이발놈아! 내가 이런 일 하고 있다는 걸 여신님께 들켰다가는 내 목이 달아나, 목이! 돈 받고 해도 모자랄 판에 그것 좀 늦는다고 성화냐! 그리고 말 하는 걸 보니 고객한테 받을 건 다 받은 모양이구만? 어쩌라고?]
“음.”
말문이 막히는지 웨인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혀를 찼다. 사실 머레이의 말이 다 맞는 말이다. 기세를 몰아 머레이가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놈의 부탁, 그만 좀 해. 나라고 언제까지 네 기저귀를 갈아줄 수는 없다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 응? 당신들 뭐야. 으응... ...?]
“머레이?”
머레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말을 하자 웨인이 눈썹을 움직였다.
[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그 총, 치우지 못 해? 으... ... 으아악!!!]
“무슨 일이야?”
드르르륵! 그것은 분명 기관총이 연사되며 불을 내뿜는 소리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에 웨인이 치를 떨었다. 머레이의 비명 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웨인의 고동을 울렸다. 분명 그 총에 머레이가 맞았을 것이다.
“어이, 머레이! 머레이!!!”
수화기 너머의 머레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한 편,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머레이의 옆에 전화기가 있고, 그 전화기를 병사 중 하나가 집어 들었다.
“머레이!!! 이 씨발 새끼들아! 머레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신이 지금 남 걱정 할 때가 아닐 텐데요.]
“뭐?”
[지금 추격대가 당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도망가시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겁니다. 어디까지나 도망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분노한 웨인이 소 새끼 말 새끼 온갖 쌍욕을 퍼부었지만 벌써 연결은 끊어져 뚜 - 뚜 - 뚜 - 거리고 있었다. 가차 없이 수화기를 집어 던진다.
“개새끼들! 머레이를!”
웨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분노했다. 하지만 한 가지 슬픈 건 그렇게 분노할 시간조차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이 안 서고 있는데 순간 총탄들이 등 뒤의 벽을 뚫고 쳐들어 왔다. 개중에 몇 개는 머리통과 어깨를 스쳤다.
“왁!”
다급해진 웨인은 지진이 난 것도 아닌데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불이 켜 있지 않은 어두운 사무실. 총탄이 뚫고 들어온 구멍 사이로 새벽의 파란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전화가 끊긴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나 빨리 찾아오다니. 웨인은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하지? 씨발,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젠장! 젠장! 어떻게 하지.”
괜히 몸을 뒤지며 의미 없는 행동들을 반복하는데,
“응? 이건... ...?”
주머니에서 뭔가가 나왔다. 꼬깃꼬깃 지폐 뭉치들이었는데 그 안에는 못 보던 종이가 끼어 있었다. 4번 가량 접힌 종이였는데 그것을 펼쳐보니, 지도였다. 어딘가의 건물 내부 지도였다.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홀리 크로스 성의 내부 지도가 아닌가? 웨인이 식은땀을 닦으며 의아한 듯 눈을 꿈뻑였다.
“이게... 이게 왜 내 주머니에 들어 있지?”
책상 위로 손을 뻗어서 다이나마이트 자루를 집어 보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서 그 안에 새겨져 있는 정 십자 마크를 확인하였다. 이 세 가지를 확인한 웨인의 머리에는 온갖 복잡 다양한 생각들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내 정리가 됐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밖을 살핀다. 웨인의 아지트는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그 앞으로는 군인들이 엄청난 숫자로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근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고 헬기와 바이크를 탄 병사들 까지 대기 중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전후좌우가 다 막힌 것 같았다. 병사 중 하나가 확성기에 입을 대고 말하였다.
[아아 - 안에 있는 이 들으시오. 헛된 저항은 포기하시고 투항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면 안 됩니다.]
3층에서는 대답이 없다.
[이보시오. 그 안에서 저항해 봐야 시간만 허비할 뿐입니다.]
“좃 까시네!”
쿠르릉!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3층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바이크로 벽을 부수면서 3층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정면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총구를 들어 조준하였지만 쏟아지는 콘크리트 파편 때문에 제대로 된 사격은 기대할 수 없었다. 총탄이 몇 개 발사되긴 하였지만 바이크의 몸체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그렇게 바이크를 탄 웨인은 탄도처럼 튀어나가 금세 군인들을 멀리했다. 워낙 번개처럼 벌어진 일이라서 군인들은 잠시 벙쪄 움직이질 못했다. 군인 중 하나가 삐걱대다가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우... 추, 추격! 잡아라!]
바이크 기동대가 1순위로 달려 나갔고 헬기 부대가 2순위로 추격에 들어갔다. 웨인은 한 손으로 폭탄 자루를 들고서 바이크를 몰았다. 비록 거친 운전이 전문이라고는 허나 한 손으로 풀쓰로틀을 하려니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삐끗하면 그 날로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하지만 바이크에서 떨어져 죽나 저 치들에게 총 맞아 죽나 거기가 거기다, 굳이 고르라면 웨인에게는 전자 쪽이 더 좋으리라. 그렇게 좋아하던 바이크와 최후를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속도가 300을 상회할 즈음, 웨인의 고개 옆으로 손톱만한 크기의 쇳덩이가 따라 붙었다. 뭔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맙소사, 총알이잖아!‘
뒤에서 추격 중인 병사들이 총알을 갈긴 것이었다. 웨인의 바이크가 총알과 엇비슷한 속력으로 함께 달리는 중이고 말이다. 저 멀리서 T자 형 코너가 나오는데 여기서 속도를 늦출 수도 없었다.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펴보니 그 외에도 여러 개의 총알들이 따라 붙고 있었다. 난자 하나에 따라 붙는 수십의 정자들이 아마 이런 꼴일 것이다. 웨인은 바이크의 앞 바퀴를 들면서 동시에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는 뒤쪽에 힘을 실은 뒤 반동으로 그 무거운 기체를 허공에 띄웠다. 말하자면 바이크로 점프를 한 것이다. 속도를 늦추자마자 점프를 하니 총알들이 무서운 속도로 그 밑으로 지나갔고, 바이크가 바닥에 닿자 웨인은 여유롭게 T자 코너를 빠져나갔다.
“더 쫓아와 봐 시발놈들아! 그 많은 숫자를 가지고도 나 하나 못 잡아서 빌빌 대냐! 빙신들!”
바퀴가 다 마모될 정도로 커브를 틀어서 코너를 빠져나간다. 기체는 뛰어나지만 웨인에 비해 바이크 스킬이 딸리는 군인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해야 했다. 단 몇 초 차이도 속도전에서는 엄청난 차이로 변하는 법. 여기서 대부분의 바이크 부대는 따돌릴 수 있었다. 바이크는 그렇다 쳐도 헬기는 코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헬기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웨인은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두 발로 걷는 짐승은 네 발로 걷는 짐승에게서 도망칠 수 없고, 네 발 달린 짐승은 날개가 달린 짐승에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군.’
헬기에서는 무자비하게 개틀링 건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 주먹만한 탄들이 잠자고 있던 건물들을 일깨우며 도시를 순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댔다. 누가 오페라의 직속 부하 아니랄까봐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망설임도 없고 조준 실력도 형편없다. 이게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도 아닌 데 우리의 주인공 - 웨인은 안 맞추고 애꿎은 건물들만 부수고 있다. 파괴력은 넘치지만 조준이 힘든 개틀링의 특성 때문이다. 애초부터 개틀링은 전차나 때려 부수는 용도이지 쥐새끼를 잡은 용도가 아니니까. 사수는 안 되겠는지 운전수를 향해 고개를 흔들어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운전수는 운전대에서 빨간 버튼을 개방하며 무전을 시도했다.
“여기는 독수리. 미사일 발포의 허가를 요청 바란다. 반복한다. 미사일 발포를 허가 바란다.”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을 보고 있는 오페라는 무심히 손짓 하였고 동시에 미사일이 발사 됐다. 그보다 조금 일찍 웨인이 유턴과 동시에 바이크를 세웠고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왔던 방향을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덕분에 미사일의 폭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달려드는 바이크를 따돌린 뒤 웨인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페라아!!! 이 개 년! 개 같은 년!”
민가를 향해 함부로 미사일을 쏜 것에 대해 웨인은 울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목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믿으며 쓰로틀에 얹은 손에 꾹 꾹 힘을 눌러 담았다.
“제길. 어디 보자.”
웨인은 다이나마이트 보따리를 입에 물고서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홀리 크로스 내부에 약도가 아주 상세히 찍혀 있었다. 웨인은 바삐 눈알을 굴리며 약도를 확인하는 한 편,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포위망이 좁혀 옴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바이크가 움직일 만한 예상 경로는 모조리 막아 놓은 상황. 완전 무장한 군인들과 바리케이트까지 모든 준비가 완료다. 딱 한 군데는 제외였다. 어차피 그 쪽은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항구, 굳이 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빠르다 한 들 바이크로 바다를 횡단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바다라고?! 그래 씨바. 간다. 가!!!”
웨인은 도리어 속도를 밟으며 더욱 빠른 속도로 항구를 향했다. 헬기 위에서 감시하던 병사들은 설마설마 하였지만 오토바이는 속력을 줄일 줄을 몰랐다.
“저 미친!”
부웅! 웨인의 바이크가 허공을 날았고 웨인도 함께 날아올랐다. 지도는 물에 젖지 않게 입 안에 우겨 넣었고 다시 다이나마이트 자루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물 속에 풍덩! 웨인은 물 속으로 The아지는 탄환들을 피해 더욱 깊숙한 곳으로 잠수했다. 어차피 지하수로라면 손바닥 안처럼 훤하다. 이대로 홀리 크로스의 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웨인은 그렇게 숨을 참으며 바다 깊숙이 잠수하였다.
다시 아리아(오페라)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A국의 각 지방의 시장을 선거하는 날이 왔다. 그동안 지도자가 없어서 혼란스러웠음을 감안해 자체적으로 시장들을 선출하기로 한 것이다. 아리아에게는 인지도와 파워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때 마침 이름도 아리아에서 오페라로 개명하였다. 이름에서 풍겨져 나오는 아우라를 감안해서 생각해 낸 결론이다. 아리아라는 소박한 이름 보다야 오페라라는 양식미 넘치는 스케일이 큰 이름이 낫지 않겠는가! 시장 선거에서는 신도들을 이용해서 대부분의 표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미 그 지역은 아리아의 표밭이나 다름이 없었다. 표밭,,, ,,, 참 어감이 좋다. 암튼 아리아 아니, 오페라의 종교는 속도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자신은 모르지만 중금속이 몸 안에 차차 축적되듯이 말이다. 시장의 만기일은 2년이다. 어차피 오페라는 시장 보다는 교주에 가까웠으니 그 쪽 일에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개중에 총명한 신도들에게 다 맡기면 될 일이었다. 직무는 그렇게 신도들에게 맡겨두고 오페라는 A국의 지도자 선출 선거에 대비했다. 어차피 여론은 물 타기이다. 급물살을 타고 있는 오페라에게 거칠 것이란 없었다. 2년이 지난 후 지도자 선출 날.
이 이후로는 뭐 말이 필요한가? 결국 그녀는 종교의 힘으로 지도자 선출 선거에서 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종교와 정치를 융합시켜 이룬 그녀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의 손에 죽을 뻔도 하였다. 그러한 박복한 운명 속에서 그녀는 승리를 거머쥐었고 권력을 쟁취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더 이상 책이 들려 있지 않았다.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그 날부터, 지금까지... ... 더 이상 책은 들려 있지 않았다.
Scene 09. 홀리 크로스?
지하 기관차가 다니는 지하도. 매표원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주위를 살피고 있다. 이번 기관차의 목적지는 페르소나다. 허나 저번의 사건 이후로 기관차가 작살이 나 버리고, 당분간은 그리 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걸어서 갈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안 그래도 소문이 흉흉한데 누가 거기까지 걸어서 갈까? 때문에 다음 차가 올 때 까지는 당분간 탑승객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 잠깐 눈이나 붙일까 하는데 정체불명의 두 사내가 이리로 걸어 들어왔다. 페르소나로 가는 기차는 없을 텐데 무슨 일일까? 차이나 풍의 옷을 맞춰 입은 사내들이었다. 족제비 눈 마냥 쫙 찢어진 눈을 해가지고는 생긴 것도 닮은 것이 쌍둥이인가 보다. 매표원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런 건 알 거 없고, 페르소나로 가는 길이 어딥니까.”
“켁. 당신네들도 페르소나로 간단 말이오?”
“당신네들‘도’?”
중국계로 보이는 쌍둥이는 서로가 한 세트인 냥 고개를 틀었다. 자기네들 말고 또 온 사람이 있다니, 그게 누굴까? 더군다나 페르소나는 살인귀들이 넘쳐난다는 곳인데 말이다. 쌍둥이는 두 입이 한 입 인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
“그 전에 왔다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아... ... 그, 여자였어요. 홀리... ...”
“됐습니다. 그나저나 페르소나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이쪽.”
지하로 왼쪽 통로를 가리킨다. 중국계 쌍둥이가 그리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매표원이 난색을 표했다. 당분간은 열차가 안 들어온다지만 재시간이 되면 열차가 올 것이다. 아무리 발이 빠르다 할지라도 어찌 열차보다 빠르리오. 이건 그냥 자살 행위이다! 레일 위를 걸어가겠다니! 매표원이 필사적으로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몰차게 밀쳐버렸다.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열차 따윈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이보슈들! 거기로 가면 위험하단 말이오! 미치겠네!”
매표원은 바닥을 치며 입맛을 다셨다. 저들이 죽으면 곧 자기 탓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잡아 말리자니 저놈들의 눈빛이 범상치가 않다. 쭉 찢어져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슬몃 검은자위가 보일라 치면 그렇게 아니 무서울 수가 없었다. 매표원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열차도 없고 불빛도 없는 지하 터널 안은 마치 낡은 동굴처럼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좀 전의 매표원이 전기를 넣었는지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허나 이 여우같은 형제는 별로 놀라하지도 않는데 이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심상치가 않다. 가슴에 창이라 적힌 자가 청이라 적힌 자에게 물었다. 저쪽이 창이고 이쪽이 청인데 사실 누가 청이고 누가 창인지는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창. 페르소나의 귀신들이 이 통로에서도 가끔 발견된다고 하지?”
“그래 청. 아주 가끔이지만 사람들 말로는 그렇다고들 하더라고.”
“가끔.”
“그래, 가끔.”
둘은 쌍둥이라 그런 건지 걸음걸이나 자세도 똑같았다. 마치 둘을 미세한 실로 엮어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터벅터벅 느렸던 둘의 걸음이 점차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속이 붙은 것처럼 속도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더니 둘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4개의 다리가 하나의 다리인 냥 뛰어오르자 날카로운 도끼가 가로로 공간을 베었다.
[크하하! 쌍둥이 먹잇감인가? 귀엽군.]
허공에 뛰어오른 상태에서 창이 청에게 말했다.
“청. 조금 전에 한 말은 취소야.”
“잘 생각했어.”
둘은 바닥에 우아하게 착지하자마자 절제된 동작으로 총을 꺼냈다.
“나와라.”
“나와라.”
창과 청을 기습한 건 거대한 거미 같은 모습의 귀신이었다. 인간의 상체가 돋아나 있고 우람한 두 손에는 묵직한 도끼가 두 개 들려 있다. 때문에 동작 자체는 느려 보이지만 리치 자체는 상당히 길고 강하다. 다리도 거미 다리. 8개나 되니 이동 속도가 빠르기도 할 것 같았다. 기괴한 괴물의 등장에도 창청 형제는 반응이 없었다. 원래부터가 그렇게 무감각한 형제인가 보다. 거미 귀신이 어디 덤벼보라는 듯이 폼을 잡자 창청 형제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귀신이 쫓아올 세라 뒤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굳이 못 이길 것도 없었지만 마땅히 귀신을 죽이거나 잡아둘 수단도, 능력도, 시간도 없다. 딱히 이런 곳에서 지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놈들! 감히 도망치는 것이냐!]
창청 형제는 동시에 눈을 내리깔며 혀를 내밀었다. 2명이 동시에 놀려서 그런지 귀신의 수치심도 덩달아 두 배다. 열이 난 귀신이 성을 내며 쫓기 시작했다. 무게가 제법 나가는지 쿵쾅쿵쾅 통로가 다 울릴 정도였다.
[겁쟁이 녀석들! 이 몸이 무서운 게로구나!]
한 편, 정면에서는 푸득푸득 하는 조류의 날개 짓 소리가 울렸다. 뭔가 하고 실눈을 뜨고 보니 날개를 단 하녀 귀신들이 맞은편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무기로는 긴 창을 앞세우고 있었다.
“위험.”
“하군.”
앞뒤로 적들이 달려드는 와중이라 제법 위험한 상황이었다. 창과 청은 서로에게 등을 기댔고 각자의 정면을 향해 총을 꺼내 들었다. 날개를 단 하녀 귀신들은 사격만으로도 충분히 떨꿔 낼 수 있었지만 거미 귀신은 잠시 주춤하게 만들 뿐이었다. 제대로 된 타격은 줄 수 없었다. 창청 형제는 서로의 어깨 너머로 새 탄창을 교환한 뒤 다시 정면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통통 튀어 오르는 듯한 두 형제의 달리기는 무척이나 날랜 것이어서 아무리 다리 8개가 달린 거미라 하여도 쫓아올 수 없는 속도였다. 애초에 묵직한 도끼를 두 개나 들고 누군가를 쫓는다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거미 귀신은 훌쩍 도끼를 내던지고는 추적에 몰두했다. 어느 정도를 내달렸을까? 일정 이상 통로를 내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불빛이 사라졌다. 이곳은 전에 모종의 사건 때문에 천정이 날아간 곳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막아 놓기는 했지만 전기선 까지는 차마 놓지 못한 모양이다. 창청 형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거미 귀신도 콧김을 씩씩거리며 뒤따라 들어갔다.
[이놈들! 절대 놓치지 않는다!]
8개의 다리를 역동적으로 놀리며 어둠 속으로 따라 들어간 후, 한 5초 정도가 지났을까?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열차가 어둠을 찢으며 정력적으로 어둠을 뚫고 튀어나왔다. 열차에 정통으로 들이받힌 귀신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빠르긴 하였지만 암튼 나이스 타이밍이다. 그럼 창청 형제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
“이네.”
벽에 철썩 같이 붙어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청은 왼쪽, 창은 오른 쪽. 열차가 전부 지나가자 형제는 다시금 어둠 속을 내달렸다. 귀신이 언제 다시 몸을 재구성하고 달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새벽녘. 그들은 이윽고 페르소나 이장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을 자고 있던 이장은 벌개진 눈으로 쌍둥이들을 쳐다본다. 창청 형제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꼬라 보았다. 무슨 눈싸움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기를 10초. 먼저 입을 연 건 잔바르크였다.
“당신들은 뭡니까.”
“홀리 크로스의 사자입니다.”
“홀리 크로스?”
“홀리 크로스 모르십니까?”
“아니.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황당한지 쌍둥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반색했다.
“지금 저희랑 장난 하시는 겁니까? 직접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어떤 노인 분께서 마을에 귀신이 자꾸 나타나서 사람을 해친다고 하시던데, 이장님과 상의 하에 신고하신 거 아닙니까?"
이장의 떨려오는 손가락 끝, 그 끝이 창가 쪽을 가리켰다. 아니, 창가가 아니다. 창가 건너의 낡은 고성. 그레고리 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이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호, 홀리 크로스의 사자라면 이미 저기에 있는데... ...”
창청 형제의 눈빛이 달라진다. 여기에 진짜 홀리 크로스의 사자가 있는데 그렇다면 저기에 있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현재는 새벽녘이었지만 아직 해가 떠오르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키리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레고리 성의 옥상으로 발길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방해 공작 같은 건 없었다. 이미 올라오면서 전부 잡들이를 했으니 훼방꾼들이 나타날 리 만무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직 다 잡은 것은 아니다. 아직 두 명 분의 귀신이 남아 있었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그레고리와 그의 부인 플룻이다. 이제 마지막 결전만이 남았다.
‘뭐. 따지고 보면 이것도 아직 메인 디쉬는 아니지.’
옥상의 낡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니 검푸른 컬러의 하늘이 드러났다. 하늘이 이런 걸 보니 이제 곧 있으면 해가 머리를 들 거 같다. 하지만 그 때 까지라면 시간은 충분하다. 키리에의 맞은편, 옥상의 저 끝에는 그레고리 부부가 서로의 팔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둘 다 40대 초중반의 외모였지만 나름 중후한 멋과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색이 바래지 않다니, 질투가 날 정도다. 그리고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둘 다 검정색 정장과 드레스로 옷도 맞춰 입고 있다. 키리에가 샷 건을 겨냥하며 뺨을 긁적였다.
“할로. 그레고리 부부들이올시군. 오랜만이야. ‘그 때’ 이후로는 처음이지?”
마땅히 위협할 가치도 못 느끼는지 총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눈치로 보아하니 그들은 애초부터 저항할 의지조차 없어보였다. 체념한 듯한 그런 눈빛? 뭐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슬픈 끼가 보여서 키리에의 마음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안색이 별로 안 좋네? 창백한 것이 핏기가 하나도 없어 보여. 귀신이라 핏기가 없는 건 당연한 건가? 아하하!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거 정말 웃긴 걸! 하하! 이봐 이봐, 댁들은 별로 안 웃긴가 봐?”
키리에가 배꼽을 잡으며 걸어가더니 웃기지 않냐며 그들을 툭툭 쳤다. 이쯤 되면 사냥꾼이 아니라 깡패 수준이다. 그녀가 등을 구부린 채 웃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니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커녕 입조차 열지 않았는데 말은 무슨 놈의 말일까? 갑작스레 튀어나가 그들의 멱살을 휘어잡는다.
“야이 새끼들아. 그게 사실이야? 응? 사실이냐고!”
취조하듯이 그들을 거칠게 몰아 세웠지만 그들은 계속 슬픈 눈을 하고서 함구했다. 키리에도 답답한지 계속 그러다가 이내 손을 놓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눈에도 영문 모를 슬픈 빛이 어렸다. 비록 그렇게 복잡한 감정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지만 손 안의 스위치를 누르는 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성을 올라오면서 중간 중간 설치해 놓은 다이나마이트들이 괴성을 지르며 폭발해 나갔다. 그 폭발들은 성의 척추에 해당하는 기둥들을 부셔갔고 그렇게 차차 균형을 무너트려갔다.
성이 무너져 간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던 그레고리 성이 철거를 당하듯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물론 그 위에 있던 키리에와 그레고리 부부도 건물 더미에 휩쓸려야 했다. 쿠르릉! 그레고리 성이 무너지자 집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치를 보며 조금씩 문 밖으로 나왔다. 성이 무너졌으니 귀신들도 끝이 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조심스런 예상은 다행히도 들어맞았고 귀신들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드디어 귀신들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서로를 얼싸 안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한 편, 뿌연 먼지 구덩이 속에서 누군가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귀신이 발이 달려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다행히도 그 안에서 나온 이는 귀신이 아니고 키리에였다. 만신창이가 된 키리에의 등장에 사람들은 영웅이라도 귀환한 것 마냥 떠받들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녀는 멍한 듯 움직임이 없었고 이장이 다가와 손을 맞잡는 순간에도 마땅히 반응하지 않았다. 슬쩍 이장의 얼굴을 흘겨본다. 그의 얼굴을 보니 처음 만났던 상황이 떠올랐다.
( 바닥엔 고급 카페트가 깔려 있고 여기저기엔 산짐승들의 박제가 위화감 있게 진열 돼 있었다. 제법 사는 모양이다. 벽에 걸려 있는 엽총을 보고는 이번엔 키리에가 물었다.)
‘ 혹시 총 좀 다룰 줄 아세요?’
‘ 아, 아닙니다. 그냥 취미지요, 취미.’
‘ 그렇군요.’
그 때를 생각하니 슬며시 조소가 세어 나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여기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키리에가 허리를 뒤로 꺾으며 깔깔깔 귀곡성 같은 폭소를 터트렸다. 모두들 위화감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순간 그녀가 웃음을 끊으며 소매에서 총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이장의 이마에 그 끝을 겨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람들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고, 그녀는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Son of Bitch."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Scene 10. 과거 편 : 그레고리 가의 비극.
옛날 옛날에 페르소나라는 마을에는 그레고리라는 부자가 살았답니다.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여느 부자들과 달리 매우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었죠.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생계에 위험이 닥칠 때 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곤 했어요. 때문에 그레고리의 덕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레고리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답니다.
“에헤헤. 그레고리 양반, 이 시간이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동네 이장인 잔바르크가 이죽이죽 웃으며 그레고리에게 다가왔다. 이곳은 그레고리 성을 에워싸고 있는 인근 숲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장의 등장에 그레고리는 고개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잔바르크가 이죽거리며 다가오는 폼이 심상치가 않다.
“성에만 있는 게 여간 갑갑하다 보니 이렇게 새벽마다 나와서 산책을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어인 일이십니까.”
“아니 뭐. 다름이 아니라 말일세,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나?”
“일단 들어나 보지요.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해 볼 테니.”
그레고리가 뭐 별 거 이겠냐는 생각을 하며 웃어넘기자 이장이 싹싹한 행동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레고리는 당최 사람이 좋아서 마을 사람들의 잡다한 부탁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부탁이라고 해봐야 집에 못질을 하는 거라든지 짐 나르는 것, 그리고 농사일을 돕는 게 고작이었지만, 최근에는 그 성향도 조금씩 변하는 것만 같았다. 가령 돈을 꾼다던지 말이다. 암튼 이장의 부탁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요즘 수렵에 관심이 많아져서 말일 세.”
“수렵이요? 총을 쏘고 덫을 놓아서 짐승들을 사냥하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장은 기대에 부푼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고리는 난감하다는 듯이 이마를 긁적였다.
“이 숲의 짐승들을 사냥할 생각입니까? 그건 안 됩니다. 이 숲에는 분명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모여 살지만 다들 성격이 온순한 녀석들 뿐 입니다. 그들을 공격한다면 성격이 포악해 질지도 몰라요.”
“그래봐야 고작 주인 없는 짐승들 아닌가? 내가 잡아서 죽을 끓여먹던 전을 부쳐 먹던 무슨 상관인가.”
“대부분의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제가 짐승들의 주인인 셈이군요. 암튼 그건 안 됩니다. 제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입니다. 부탁을 받은 것이니 거절할 권리도 제게 있는 것이겠죠?”
그레고리가 하도 완강하게 나오자 잔바르크의 표정도 어둡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부탁할 땐 살살거리며 다가오더니 거절당하자 이내 태도 돌변이다. 이장의 표정 변화에 그레고리도 많이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는 이런 날도 있었다. 해가 쨍쨍하니 신진대사가 활발할 오후 2시였다. 예전 같았으면 시끌벅적 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어째 조용했다.
“이런.”
마을을 돌던 그레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어르신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는 골아 떨어져 있었다. 정말 한심함의 극치였다. 하다못해 마을의 청결을 위해 쓰레기라도 줍던 사람들이 지금은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져서는 술에 절어 산다.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의 아낌없이 주는 자선 덕에 사는 걱정이 없어졌을 테니 말이다. 바라는 거 없이 베풀기만 하던 그레고리의 가슴에도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어디 멀리에선가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뭔가 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이, 갑자기 나타난 마을의 꼬맹이들이 그레고리를 이끌었다.
“너희들은?”
“아저씨,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 에요. 지금 마을 어귀에서 잔치가 벌어지려 한다구요.”
“잔치?”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이들이 이끄는 대로 가 보았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양반들이 무슨 잔치를 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따라 가보니 정말로 통나무에 죽은 멧돼지를 묶어서는 통구이를 하고 있었다. 절대 성의 주변 숲에서는 사냥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해버렸나 보다. 그리고 통구이 옆에는 고급 포도주들이 드럼 단위로 있는데 대체 몇 드럼이나 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이 많은 포도주들을 무슨 재주로 산걸까? 궁금하기 그지없는 그레고리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물었더니 “에이, 알면서 뭘 새삼스레 물어보고 그래요?” 이렇게 대답하며 뜬금없이 웃는 게 아닌가? 그레고리는 말문이 막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안 봐도 뻔했다. 그레고리를 믿고 어디에선가 외상을 한 거겠지. 그런데 옆으로 조금만 눈을 돌려보니 더욱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장 잔바르크가 엽총을 들고서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필시 저것도 외상으로 구입한 거겠지. 분노한 그레고리는 으적,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레고리는 고민했답니다. 베푼다는 것은 분명 호의적인 것이며 스스로도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나태해진 것은 골치였죠. 분명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어요. 누가 뭐래도 사실이죠. 자신이 벌려놓은 일. 결국 자신의 손으로 수습을 해야 했어요. 바꿔야 했어요. 이대로 두면 안 됐어요! 그레고리는 결단을 내려야했지요. 그래서 내린 결론은 마을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원조를 끊는 것이었어요. 조금 매정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다시 일하게 만들어야 했어요. 만약 이번 일로 인해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면 과거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한 단죄라고 생각하겠지요. 착한 그레고리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어요. 실제로도 그는 속죄를 위해서라면 변절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구요. 마을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베풀지 않자 그를 손가락질 하며 매도했어요. 사람 하나가 나쁜 놈 되는 것은 참으로 한순간이더군요. 신기할 정도로 잔인했고 잔인할 정도로 신기했어요. 마을 사람들이 외상으로 구입했던 수십 통의 포도주와 엽총, 그 외에 기타 탄환들과 여러 가지들. 딱 거기까지만 손을 써주고 그레고리는 이 이상 마을 사람들과 단절을 선언 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레고리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으며 흥청망청 변하지 않더군요. 물건들을 외상으로 구입하고 일도 하지 않고... ...
그것은 거대한 비극을 빚어낸 작은 트러블이었어요. 이번 일로 호되게 당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작당 모의를 시작하죠. 그 때 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장난이 그렇게 까지 큰일을 만들어 낼 줄을 몰랐겠죠. 그 작은 장난이란 다음과 같았어요. 그레고리가 정 십자의 반군으로 의심된다는 허위 제보였죠. 설마 그레고리가 진짜로 반군 측에 끼어 있겠어요? 물론 아니죠. 허위 신고였어요. 그런데 조사차 잡혀 들어갔던 그가 ‘악마의 자식’이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서 돌아왔어요. 마을의 광장, 처형장으로 말이죠. 운명의 장난이랄까요.
하늘을 별들이 수놓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허나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 보니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페르소나의 광장. 이제 곧 무대가 설치되고 그 안에서 처형식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보통의 처형식은 온갖 야유와 함께 갖가지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게 보통이지만 이 날의 처형식은 특이하게도 숙연했다. 다들 숨죽이며 자신들이 죽는 기분으로 그를, 그들을 바라보았다. 잡담을 한다거나 하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반군으로 허위 신고를 한 건데 알고 보니 악마의 자식이었다니! 물론 그가 실지로 악마의 자식이었다는 걸 알았다 해도 진짜 신고를 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레고리는 분명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미안함, 죄책감, 안타까움 등의 감정들이 광장 안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레고리가 단두대에 고정되며 소리쳤다.
“난 아니오! 아닙니다! 난 악마의 자식이 아니에요!”
애처로운 눈으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쳐다본다. 억울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사람들은 우물쭈물, 그의 눈빛을 피하기만 할 뿐이다.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요! 한 마디만 말해줘요! 난 아니라고!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구요!”
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안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무리 속에는 키리에도 은근슬쩍 끼어 있었다. 모포로 신분을 가리고서 예리한 눈으로 그를 찌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크흑! 제발... ... 제발!”
철컹! 단두대가 내려갔다.
“꺄악!”
“으아악!”
사람들은 환호성 대신 비명과 신음성을 냈다. 결국 “난 아니오! 아닙니다! 난 악마의 자식이 아니에요!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요! 한 마디만 말해줘요! 난 아니라고! 악마의 자식이 아니라구요! 크흑! 제발... ... 제발!” 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돼 버리고 말았다. 넌센스다. 다음은 부인의 차례였고 그 다음은 돈쥬앙, 오보에의 순이었다. 그리고 하인들은 너무 숫자가 많은 관계로 총살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처형식이 진행되는 동안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마지막 한 명이 숨을 거둘 때 까지 그들은 지금의 참극을 눈으로 담아갔다. 대량의 피가 광장을 적신 그 날의 달은 그러니까... ... 무척이나 시리고 섬뜩한 것이었다.
자, 여기까지가 그레고리 가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우리들은 악마의 자식이 뭔지도 몰랐어요. 우리 하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총에 맞아 죽어야 했고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머리를 잘려야 했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대답을 듣고 싶네요. 네? 키리에씨?
“뭐라고? 니들 방금 뭐라고 했어.”
두 부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커녕 입조차 열지 않았는데 말은 무슨 놈의 말일까? 난데없이 튀어나가 그들의 멱살을 휘어잡는다.
“야이 새끼들아. 그게 사실이야? 응? 사실이냐고!”
강압적으로 그들을 거칠게 몰아 세웠지만 그들은 계속 슬픈 눈을 하고서 입을 닫았다. 키리에도 갑갑한지 계속 그러다가 결국 손을 놓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눈에도 영문 모를 슬픈 빛이 어려 있었다. 비록 그렇게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지만 손 안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딸깍. 스위치를 누르자 성을 올라오면서 중간 중간 설치해 둔 다이나마이트들이 괴성을 지르며 폭발해 나갔다. 그 폭발은 성의 균형을 관장하는 기둥들을 부셔갔고 그렇게 차차 균형을 무너트렸다.
성이 무너진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던 그레고리 성이 철거를 당하듯이 한순간에 쓸려 내렸다. 당연히 그 위에 있던 키리에와 그레고리 부부도 건물 더미에 휩쓸려야 했다. 쿠르릉! 성이 무너지자 집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치를 보며 슬며시 문 밖으로 나왔다. 성이 무너졌으니 귀신들도 끝 난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들의 조심스런 예상은 다행히도 들어맞았고 귀신들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드디어 귀신들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서로를 얼싸 안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한 편, 뿌연 먼지 더미 속에서 누군가가 절룩절룩 걸어 나왔다. 귀신이 발이 달린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다행히도 그 안에서 나온 건 귀신이 아니고 키리에였다. 넝마가 된 키리에의 등장에 사람들은 영웅이라도 돌아온 것 마냥 떠받들고 노래했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움직임이 없었고 이장이 다가와 손을 포개는 순간에도 마땅히 반응하지 않았다. 살짝 이장의 얼굴을 흘겨본다. 그 얼굴을 보니 처음 만났던 상황이 떠올랐다.
( 바닥엔 고급 카페트가 깔려 있고 여기저기엔 산짐승들의 박제가 위화감 있게 진열 돼 있었다. 제법 사는 모양이다. 벽에 걸려 있는 엽총을 보고는 이번엔 키리에가 물었다.)
‘ 혹시 총 좀 다룰 줄 아세요?’
‘ 아, 아닙니다. 그냥 취미지요, 취미.’
‘ 그렇군요.’
그 때를 생각하니 슬몃 조소가 세어 나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키리에가 허리를 뒤로 꺾으며 깔깔깔 귀곡성 같은 폭소를 터트렸다. 모두들 의아함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순간 그녀가 웃음을 끊으며 소매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이장의 이마에 그 끝을 겨누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람들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고, 그녀는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Son of Bitch."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Scene 11. Meet Again.
총구를 벗어난 피스톨은 강력한 속도와 회전으로 이장의 머리 속에 들어가 뇌를 갈아 버렸다. 뒤통수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뚫렸고 생명을 잃은 이장의 몸은 풀썩 쓰러지더니 부르르 경련을 떨었다. 본래 너무 놀라거나 하면 몸이 굳으며 잠시간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고 한다. 머리 속이 뿌옇게 백지화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총구를 돌려 옆에 멍하니 있던 이의 머리통에도 바람구멍을 냈다.
“꺄아악!”
그제 서야 멈춰있던 시간이 풀린 듯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영웅에서 괴물로 돌아서는 순간이다. 키리에는 영어로 된 욕을 내뱉으며 혼비백산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총탄을 갈겼다. 근접하는 사람이 있으면 칼로 찌르고 베어버렸다. 그야말로 무차별의 살육! 미친 행동이다! 건물 더미에 깔려 있었던 탓에 힘이 좀 빠지기는 했지만 일반인들이라면 문제가 없다. 조금 강해봐야 키리에의 손바닥 안에서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으니.
“죽어! 죽어!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아!”
키리에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그레고리 가의 비화를 알게 된 시점에서, 마을 사람들의 이면성에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다. 자신들 때문에 귀신이 출몰했는데 이젠 그 귀신들마저 없애기 위해 홀리 크로스에 신고까지 하다니! 그레고리 가의 과도한 복수심도 잘못됐지만 그것의 원인은 결국 이 사람들에게 있다.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며 도망치는 사이, 머지않은 곳에서 대규모이면서 규칙적인 소리가 서서히 밀려왔다. 군인들의 군화 발 밟는 소리, 탱크의 캐터필러 돌아가는 소리, 헬기의 로터 돌아가는 소리까지! 대규모의 군부대가 여기로 몰려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슬쩍 어깨 뒤로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홀리 크로스의 군부대가 쫙 깔려 있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아무리 날고 기는 키리에라 하더라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덧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대신해 홀리 크로스의 부대가 메웠다. 그 중에는 여신 오페라의 모습도 보였다.
“카아아!!!”
키리에가 이를 갈며 짐승처럼 네 발로 달려들었다. 키리에에게는 검과 총이 있지만 저들에게는 검과 총과 대포와 개틀링과 레이저 건 까지 있다. 상대가 안 될 것이 다분함에도 그녀는 눈을 뒤집어 까며 바락바락 오페라에게 달려들었다. 철컥 철컥! 군인들의 총칼이 그녀를 가로 막는다. 그리고 그 둘이 부닥치기 전, 오페라가 손을 뻗자 모두의 행동이 멈추었다, 심지어 키리에 마저도. 키리에가 놀란 눈을 하며 이리저리 저항해 보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후후. 자식은 어미를 거스를 수 없는 법.”
키리에의 몸이 경직되더니만 그 상태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낚시의 릴이 옷의 목덜미를 찝은 것도 아닌데 천천히 그녀의 몸이 떠오른다. 오페라의 손가락을 따라 위로 올라가더니만 순식간에 더 높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위로 향했던 오페라의 손가락이 이번엔 밑으로 향했고 그러자 그녀의 몸도 순식간에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쳤다. 그 힘이 어찌나 쎈지 아스팔트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군인들의 표정도 동시에 일그러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키리에의 몸이 헝겊처럼 움직였고 그렇게 이리저리 마을을 휘저었다. 건물과 가로수를 부수고 바닥을 깨트리며 분수대를 박살내서 물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장난을 치는 오페라의 입가에는 비릿한 향기의 웃음꽃이 피었다. 그 웃음은 흡사 벌레의 날개와 다리를 뜯는 어린아이의 웃음과도 닮아 있었다.
“어디로 도망쳤을까 했는데 이런 곳에 숨어 있었네? 이 약삭빠른 미꾸라지 같으니라고. 이제는 다시 잡혔으니 다시 이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으련?”
펑! 바닥에 처박혔던 키리에의 몸이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며 화산처럼 튀어나왔다. 이 정도로 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직도 오페라의 모습에서는 여유가 흘러 넘쳤다.
“난 너 따위의 자식이 아니야!”
키리에가 헝클어진 몸뚱이를 일으키며 외쳤다.
“그래? 그렇다면 널 만든 건 누구지? 내가 아니면 대체 누구라는 거야? 다리 밑에서 주워 왔나?”
“나는... ...”
“너는 내가 만들었어.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
오페라는 군인들 사이를 헤집으며 다가왔다. 그 모습이 꼭 예수가 바다를 가르는 것처럼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키리에는 주적인 오페라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정신적인 압박을 넣어서 못 움직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눈만 부라리며 이를 갈아야 했다. 창조자의 손끝이 피조물의 입술에 닿았고 점차 밑으로 내려가며 말을 시작했다.
“너의 오밀조밀한 입술도, 봉긋하게 솟은 가슴도, 귀여운 배꼽도, 그리고 감춰진 은밀한 곳 까지 다 내가 만들었어. 넌 내 꺼야.”
“시끄러워, Motherfucker!”
“간혹 영어를 내뱉는 버릇도 내가 설정했어.”
“미친년!”
“입버릇을 나쁘게 설정한 것도 바로 나지. 왜 그래 우리 귀여운 강아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럼 네 입으로 한 번 읊어봐.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키리에는 대답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꼬옥 모았다. 심지어 말을 못하게 혀를 깨물려 했지만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쇠사슬로 엮인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고 하기도 싫은 말들이 술술술 세어 나왔다.
“큭! 내 이름은... 키리에. 대 귀신 전투용으로 마,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귀신을 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처형을 당한 우성인자들이 귀신이 되어서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주인님이... ... 으윽! 주인님의 비밀이 새어 나올 가능성을 나로 인해 차단한다.”
“우성인자는 뭐지?”
“세상의 사람들은 열성인자와 중성인자, 그리고 우성인자로 나뉜다. 나뉘는데... ...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 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 때문에 반란의 싹을 미리미리 제거하는 차원에서 발견 즉시 사살한다.”
“나는 누구?”
“주인... ... 님.”
“너는 누구?”
“당신의 사랑스러운... ... 강아지.”
키리에가 그리 말하자 오페라의 웃음이 새벽하늘을 찔렀다. 그와는 상반되게 그녀는 치욕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안하무인에 스스로가 천하무적이라 여기는 키리에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창조주 앞에서 무력해지니 이것 또한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구겨져있던 그녀의 얼굴이 다림질을 한 것 마냥 순식간에 펴졌다. 그러더니 잀ㄴ간 비웃음으로 물드는 게 아닌가? 그러한 변화에 오페라도 흥미가 당기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지, 그 표정은?”
“헤헤. 주인님은 기억 안 나세요? 제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어떤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 지 말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겠어?”
“헤헤. 제 왼쪽 눈에 대해서 말예요. 일명 귀안이라고 하죠? 이 눈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하긴, 나라 일 보시는데 바빠서 한 두 가지 정도 잊으실 수도 있겠죠.”
“귀안이라면 귀신들을 ‘봉인’해 놓는... ... 허억!”
순간 육중한 추가 그녀의 심장을 때렸다. 귀신이란 존재는 이미 죽음에서 출발한 존재이기에 다시 또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물론 키리에는 가능하지만 귀신을 생포하기 위해 만들어 둔 것이 바로 왼 쪽 눈. 바로 귀안이다. 귀신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장치! 물론 봉인의 발동 및 해제의 의지는 본인이 가지고 있다. 여지껏 귀안에 담아 놓은 귀신들의 숫자는 이미 세 자리 수가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귀신이 된 원인은 홀리 크로스의 우성인자 섬멸 프로젝트 때문이고 말이다. 처형을 시킨 장본인은 또 오페라이다. 이 귀신들을 개방한다면 여기에 있는 군인들이고 오페라고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오페라가 눈을 뒤집으며 외쳤다.
“스... ... 쏴! 쏴! 쏘라고, 멍청이들! 어서 쏘란 말이야!‘
“헤헷. 한발 짝 늦었네요, 주인님.”
번쩍! 키리에의 귀안에서 일순간 빛이 번쩍 하였다. 여신의 병사들도 발포 명령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누구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고 눈을 떠 보니 검푸른 하늘 위로 귀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잡아온 귀신들이었다. 그 중에는 오보에도 보였고 돈쥬앙도 보였고, 그리고 그레고리 부부도 보였다. 다리 없는 귀신들의 등장에 병사들은 당황했고 아무렇게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총성을 시발점으로 혼돈의 참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상대는 귀신이다. 아무리 정규 훈련을 빡시게 받은 군인들이라 해도 형체가 없는 귀신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총칼에 맞고 쓰러진다 해도 다시금 일어나 다시 달려들 테니 말이다.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도리어 자신들의 무기에 픽픽 쓰러지는 웃기지도 않은 상황까지 연출 중이었다.
이 틈에 오페라의 주박도 약해졌고 키리에는 그것을 벗어나 줄 풀린 개새끼 마냥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귀신들과 한 데 어울려 군인들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먼저 뒤뚱거리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는 입구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 총구를 들이밀고는 미친 듯이 연사를 하였다. 그 밑으로 피 비린내 그윽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주포가 발사되려 하자 키리에는 주포의 각을 90도로 꺾어 버렸고 그 상태로 대포가 발사되었다. 직각으로 올라간 포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고 다시금 밑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에 닿기 전에 키리에는 옆으로 몸을 날렸고 그 자리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오페라는 이 참극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망부석 마냥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무리 자기가 여신이라 해도 지금의 상황을 잠재울 힘은 없으니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혹시 모른다. 그녀가 태생부터 신이었다면 가능했을 지도. 허공에 떠 있던 헬기들이 귀신의 습격을 받아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거기에 깔려 죽고 폭발에 휩쓸려 죽는다. 탱크 속으로 귀신이 들어가 마구 헤집자 무작위로 주포가 발사되었고 그에 또 병사들이 살해당했다. 도망치기 위해 탱크를 움직이다가 캐터필러에 깔리는 사태까지! 말 그대로 혼돈, 카오스다!
귀신들의 숫자는 군부대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전멸 당하는 건 눈 깜짝할 새였다. 바닥에는 피로 인해 붉은 카펫이 깔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늘에서는 피 맛을 질펀하게 본 귀신들이 킬킬거리고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에서는 피를 한 말 뒤집어 쓴 오페라가 귀신들린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아름다운 속눈썹의 두 눈은 초점이 없다. 순식간에 참극이 일어났음에 공황 상태에 빠졌나 보다. 키리에가 칼에 묻은 피와 지방질을 털어내며 말했다.
“이런 걸 보고 흔히 인생역전이라고 하지? 안 그래?”
오페라의 초점을 잃은 눈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한참 뒤에야 화답이 이어졌다.
“넌 날 죽일 수 없어.”
눈빛도 돌아오고 말투가 또박또박 했지만 미세하게 그 끝이 떨리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오페라는 분명 떨고 있었다. 전지전능한 신이! 고작 미천한 인간 앞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못 죽인다고? 내가 왜? 뭐가 아쉬워서? Are You Crazy?"
"그... 그건, 그것 역시 내가 설정해 뒀기 때문이야. 네가 도망친다거나 배신할 걸 대비해서 생명의 끈을 이어놨거든. 내가 죽으면 너도 죽게 돼 있어. 아아. 그렇다고 해서 착각은 말아줘. 네가 죽는다고 해서 역으로 내가 죽거나 할 일은 없으니까. 호... 호호호호호!“
오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