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13일,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칠대한을 선언하고, 명나라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2만여명의 후금군, 바유트군, 사할차군을 이끌고 명의 영토로 진격했다. 그의 첫 목표는 무순, 동주, 마근단, 그외 주변 진보 및 국경지대의 농경지역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누르하치는 머지 않아 군을 쪼갰다. 방어력이 다소 약한 동주, 마근단 외 기타 지역에 대한 공격부대는 좌익 4구사였으며, 전역의 주요 목표였던 무순에 대한 공격을 담당할 군대는 누르하치가 직접 통솔하는 우익 4구사에 더하여 각 구사에서 차출된 바야라, 사할차, 바유트군이었다.
누르하치가 군을 나누었던 시기가 언제인지는 사료마다 기록이 다르다.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은 4월 13일 출병 당일에 군을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문노당의 서술을 빌리자면, 이 때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로부터 30여리를 진군한 뒤 군을 두 개로 나누어 하나를 자신이 지휘했으며, 이 중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 진군, 이후 그 날 밤을 구러 지역에서 숙영했다.1
하지만 실록에서의 기술은 다소 다르다. 『만주실록』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대군이 허투 알라를 출병한 뒤 구러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숙영하고, 이후 다음 날인 4월 14일에 누르하치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 때 좌익 네 군사는 동주, 마근단을 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고, 우익 네 구사와 바야라들은 누르하치와 버일러들의 통솔하에 무순으로 진군했다.2
즉 사건의 서순을 본다면 이렇게 정리된다.
1.원당/노당계 사료
4월 13일 누르하치의 출병 -허투 알라에서 30리 진군 - 군 분할(우익 4구사 무순 진군, 좌익 4구사 동주, 마근단 진군) - 우익 4구사 구러 지역에서 숙영
2.실록계 사료
4월 13일 누르하치의 출병 - 구러 지역까지 진군 뒤 구러 지역에서 전군 숙영- 4월 14일 군 분할(우익 4구사 무순 진군, 좌익 4구사 동주, 마근단 진군)
삽화 출처 : 칼부림
두 기록 모두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확답할 수 없다.
원당/노당계 사료의 경우 30리를 진군한 뒤 군을 나누었다는 구체적인 서술이 존재하여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으며, 뭣보다 실록보다 우선적으로 검토되는 후금사의 기본 뼈대라는 점에서 타 기록보다 보다 선행적으로 고려된다.
하지만 실록의 경우, 최소한 무순 전역에 관련하여서는 원당/노당에서 생략된 부분도 추가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컨대 좌익 4구사를 동주, 마근단에 투입했다는 서술이나, 무순 공략군에 팔기 각 구사에서 선발된 바야라 역시 편성되었다는 서술 역시 실록에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보자면 실록처럼 충분히 진군한 14일에 군을 두 개로 나누는 것 역시도 설득력이 충분하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뭣보다도, 실록의 경우 기존의 기초 사료들을 재정립, 편집하여 엮어낸 사료이기 때문에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던 오류를 편찬의 과정에서 바로 잡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오류가 생겼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기에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뭣보다 실록이라고 해서 원당과 노당의 내용을 무조건 추가적으로 보완하는 것도 아니고, 원당/노당에서 언급된 부분을 다루지 않기도 했다. 예컨대 누르하치가 4월 14일 무순 방면 공략군과 동주/마근단 방면 공략군을 다시 여덟개로 쪼개어 진군시킨 사실은 실록에서 언급되지 않으며 오로지 노당과 원당에서만 언급된다.3
해당 부분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군을 쪼갠 기록이 하나는 실록에 실리되 그 사건의 발생 일자가 변경되었으며, 하나는 아예 삭제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필자는 사관들이 실록을 편찬할 때에 고의 내지는 실수로, 원당에 존재하는 누르하치가 군을 쪼갠 두 개의 기록을 하나로 합쳐 4월 14일의 기사에 일괄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 보니, 노당/원당에 존재하는 4월 13일의 '군을 좌익 4구사와 우익 4구사로 나눈 기록'과 14일의 '군을 여덟 개로 나눈 기록'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논지를 따르자면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에 서술된 기록이 맞으며, 누르하치는 13일에 군을 두 개로 나누고, 14일에 다시 여덟개로 나누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되었던지, 4월 13일에서 4월 14일 사이에 누르하치가 군을 두 개로 쪼갠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상대적 주력군은 누르하치 휘하에서 종군하며 무순으로 진군했고, 나머지 군대는 동주와 마근단, 주변 지역의 정리를 위해 움직였다.
1.『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3일. 『구만주당』의 서술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2.『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3일.
3.『만문노당』무오년 음력 4월 14일, tere inenggi juwe jugvn be genehe jakvn gvsai cooha, jurgan jurgan i meni meni dosire teisu jakvn jurgan i fakcafi gene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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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필자
청나라 기술이 맞겠지
둘 다 후금/청 기술이다
여기서 나는 네가 제대로 글을 안 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금때는 정신 없었을거라 생각해서 말야
정작 청 때는 윤색과 기록 소실, 생략의 문제가 있다.
실록은 자료 취합 엄청해서 만드니까 정확성은 실록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건 흔히 기록의 나라로 칭해지는 조선에서도 엄대엄으로 갈리는 문제임.
그렇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