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아까 전부터 너를 쳐다보네?"
"아 쟤?"
낯선 남자애랑 한쪽 팔을 껴안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했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낯선 남자애랑 그것도 사이좋게 팔에 끼면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냥 아는 친구야. 어릴 적부터 알던 지내온 사이."
"아는 친구? 어릴 적?"
라고, 대답하였다.
나 또한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그녀 곁에 있던 남자애는 나를 힐끗 보더니....
"거 참 XX처럼 생겨서. 정말로 아무 관계가 아니지?"
"XX 같은 애 맞아. 요리 말고 잘하는 거 없는 이상한 애야."
"아? 요리를 해? 어쩐지 띨빵하게 생겼다 했네.
...그때 느낀 감정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분명히 이렇게 말하였다. 요리 말고 잘하는 것이 없다고. 옆에 있던 남자가 킥킥-웃으면서 XX 라고 자신도 장단에 맞추면서 XX라고 하였고.
옆을 쓱 지나가는 그녀에게 나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아는 척 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분명히 그렇게 말하였다.
"...으..."
짧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의식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얼굴을 때린 물방울이 내 눈을 뜨게 만들어 주었다.
"낯선 천장..."
눈을 뜨자마자 나온 첫 마디였다. 마치 이세계물 라이트 소설에 나올만한 대사를.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보였던 것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천장,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거로 추정되는 벽이 보였었다. 장식을 위해서인지 작은 사자상 얼굴이 곳곳에 붙여져 있었고. 돌로 만들어진 바닥의 차가운 감각이 내 몸으로 전달되어 왔고.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천장뿐만 아니라 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 덕분인지 입에서 거친 숨을 내뱉어지면서 뒤로 몇 보를 걸었다.
"진정. 진정."
나는 양손으로 뺨을 친 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은 상황 파악부터가 중요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질수록 상황이 악화할 수 있으니까.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있는 것은 벽이었다. 작은 사자 얼굴 조각이 붙여진 벽이.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서 한 발짝 걸어보았다.
저벅-
메아리가 들려왔다. 자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듯, 곳곳에 걷는 소리가 들려왔고, 눈앞에 보였던 것은 말 그대로 빛 한줄기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의 복도가 눈에 보였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 혼자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인가. 다가가려 할 때마다 무언가의 공포로 인해 다가갈 수 없었다.
어둠 속에 숨어있는 무언가가 나를 덮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프라이팬을 꼭 쥐었다. 뭐라도 싸울 수단이 있어야 한다고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고.
탁-
"!?"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다는 듯 멀리서 무언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한 불빛조차 없는 이 동굴인지 뭔지 모를 이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인해 떨려오는 손으로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뭐지? 혹시 사람인가? 아니면 이곳에 살고 있는 야생 동물인가? 곰이라던가 라는 생각이 오고 가는 와중에 강아지 크기만 한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꼿꼿이 서 있는 귀로 인해 토끼가 아닌가 했지만..
"...뿔?"
플래시 빛으로 들어오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대로 토끼가 맞았다. 그것도 뿔이 달린 토끼.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눈을 몇 번이나 감고 떠보았다. 일단 색부터가 뭔가 달랐다. 토끼들 중 전신이 연한 녹색의 털로 덮인 토끼가 있었나? 갈색이나 하얀색이라면 몰라도.
토끼 또한 내가 신기해 보였는지 고개를 갸웃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강아지와 같은 호기심 가득 찬 눈동자를 바라보는 토끼를 보면서 나온 소감은..
"귀엽다..."
농담 아니라 귀여웠다. 지나가던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안고 싶은 충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나를 감쌌던 두려움이 한 번에 씻겨갈 정도로.
쯧쯧-하면서 손을 뻗은 체 다가가 보았다. 도망가지 않도록,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오면서. 핸드폰에서 나오는 플래시의 빛이 점점 토끼에게 드리워지면서 서서히 가까워져 왔는데...
탁-하는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토끼의 뿔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갔다.
어!? 하는 작은 비명을 내뱉은 뒤 내 볼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져서 손을 이루어 만져보니...
"....피?"
붉은색의 액체가 내 손바닥을 젖히고 있었다. 뜨거움과 동시에 비릿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달려드는 토끼에게 땅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주운 뒤 있는 힘껏 던졌지만,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가볍게 옆으로 비켜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한 뒤 그대로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퍼억!
묵직한 느낌이 내 손으로 전달 되어왔다. 그 묵직한 것에 맞은 토끼는 그대로 벽에 붙여진 사자 얼굴에 부딪히면서 끼익! 하는 미약한 비명을 냈다.
"쳇"
내 손에 쥔 프라이팬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토끼(인지 뭔지 모를) 에게 휘둘린 후라이팬을. 내가 아끼는 거인데 아까전부터 무언가를 때리는 용도로 쓰이네.
"이러라고 쓰는 프라이팬이 아닌데."
한탄과 함께 프라이팬을 양손으로 쥔 체 천천히 토끼에게 다가가 보았다. 처음에는 어떤 움직임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발로 툭툭 가볍게 건드려 보기도 했지만 역시 반응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닌가 했는데..
삐이이이!!!
귀 찢어질 거 같은 날카로운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귓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감각을 느낀 체 한 5초 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쓰러진 토끼의 고개는 축-하고 땅에 붙여졌다.
"방금 뭐한거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한 건가? 동물들의 최후 발악이라 하면 어떻게든 상대를 물어뜯거나 모든 힘을 다해 달려드는 게 아닌가? 울음소리 요란하게 내뱉는 게 아니라.
탁! 탁! 탁! 탁! 탁!
의문은 금방 풀리게 되었다. 듣기만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는 설마 했는데...
뀨! 뀨! 뀨!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와 함께 없는 수많은 토끼가 나한테 달려들었고, 나는 히익-하는 뒤를 돌아 뛰려 했지만, 눈앞에 보인 벽은 나한테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어.
볼에 흐르는 피의 뜨거움을 느낀 체 토끼들이 서서히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었고, 가까이 올수록 내 머릿속은 온갖 단어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토끼들에게 뿔에 찔려서? 과다 출혈로 쓰러진 뒤 산 채로 잡아먹히고!?
끼엑-하는 소리와 함께 토끼 한 마리가 뿔을 내민 체 나한테 돌진 하여서 프라이팬을 날리려고 할때 였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 붉은 안개가 휩싸이면서 아까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던 토끼들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현기증에 걸린 거처럼 비틀거리더니 서로 부딪히거나 벽에 뿔이 박히기까지 했고.
이 무슨? 이라고 말하려던 차,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핑거리스 장갑을 낀 내 팔을 잡아 당긴 손의 주인은, 비록 말이 없었지만 빨리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당기고 있어서 나는 그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 사이를 지나면서 한 손으로 코와 입을 막는 사이 눈앞에 붉은색 망토를 입은 누군가가 눈에 보였었다. 얼굴에 안개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망토에 달린 후드까지 쓴 누군가가.
안개 그리고 뿔 달린 토끼 무리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따악!
핑거리스 장갑 낀 손의 손가락을 튕기니 토끼 무리는 불길에 휩싸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온 화염으로 인해 토끼들은 끼이익! 하는 고통으로 인한 비명을 내고 있었다. 몇 마리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불에 붙인 채 도망가는가 하면, 반대로 빠져나가지 못 한 체 짧은 비명과 함께 불길에 먹혀버린 토끼들도 있었다.
불길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면서 눈앞에 광경이 조금씩 보여지기 시작했다. 초록색 털을 가지고 있던 토끼들 대다수가 새까맣게 타버렸고, 그 불길 속에서도 어찌 살았는지. 숨이 붙어있던 토끼도 있었다. 이미 타버릴 대로 타버린 몸으로 인해 고통의 신음과 함께 남아 있던 생명의 불씨마저 사라졌지만.
"저…. 저기..."
붉은 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체 아까 전부터 내 손을 잡고 있던 누군가에게 말을 거니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목소리에 답하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로브의 그림자로 감춘 얼굴에 나는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브를 쓴 사람은 아무 대답 없이 바라보자 나는 이걸로 부족했나?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조금만이라도 늦었으면 봉변을 당할뻔 했어요. 매우 감사드립니다."
"(알 수 없는 언어)"
"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영어도, 한글도 아닌 다른 무언가의 언어로.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다. 하도 놀랄 일이 여러 번 한꺼번에 터져서 말이 제대로 귀로 못 들어온 거라고.
"저기 제대로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하셨나요?"
"(알 수 없는 언어)"
"하나도 못알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보였었다. 갑자기 몰려오는 현기증을 비롯해, 몸이 무거워지면서 서서히 다리의 힘이 풀리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언어)!"
로브를 쓴 사람은 내가 쓰러지기 직전 소리를 외치면서 쓰러지기 직전의 내 몸을 양팔로 감쌌다. 마치 괜찮냐고 물어보듯 외치는 목소리는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내 눈도 힘이 없다고 말하듯 스르륵 눈이 감겨졌고.
------------------------------------------------------------------------------------------------------------------------------------------
피드백 및 오타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