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와 십...”
“날씨 진짜 미쳤네...”
“누구 우산 챙긴 사람?”
남해와 친구들은 날씨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오늘 아침 등교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쨍쨍했다. 일기 예보에서도 분명 비 올 확률은 15% 미만이라고 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깨비의 장난처럼 하늘에서는 굵직한 소나기가 마구 쏟아졌다.
벌써 몇 시간 째란 말인가.
가방을 쓰고 달려가는 아이도 있었다.
운이든 준비성이든 하나는 좋아서 우산을 쓰고 가는 아이.
그 옆에 붙어 가는 아이나 어디서 우산이든 비옷이든 빌려온 아이.
안타깝게도 남해와 친구들은 그 무엇도 해당하지 않았다.
-야 큰일낫다
-나랑 낭낭이는 학교에서 좀 기다리다 간다
문자를 보내봤지만 금선과 낙랑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망했군.
“상남자특! 비 따위 두렵지 않다!”
원형이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갈 자세를 잡았다.
준오와 남해는 원형을 이상한 것 보듯 쳐다봤고, 잠시 후 원형이 전력으로 달려갔다.
촤악-!
“앗차거썅!!!”
그리고 운 나쁘게도, 높은 곳에 고여있던 물줄기가 때맞춰 원형에게 쏟아졌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원형은 바로 방향을 돌리려다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추한 몰골이 된 원형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시... 싯.... 시시시싯... 싯... 바...”
원형의 눈에는 억울함이 꽉 차올랐다. 그리고 그 눈으로 하늘을 노려봤다.
“하아아, 어쩌냐.”
“그러게...”
준오의 눈에 교문 쪽의 우산을 들고 서있는 사람이 보였다.
준오가 손가락을 들어 그 사람을 가리키자 남해와 원형도 그 사람을 봤다.
“와, 누구는 우산 갖다줄 사람도 있네. 개부럽다.”
“어, 저 사람...”
남해에겐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그때 그 사람이 남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쪽으로 총총총 달려왔다.
급하게 나온 것인지 얇은 옷이었다. 하지만 신발과 양말이 모두 젖은 것을 보면 오랫동안 빗속에서 사람을 기다린 모습이었다.
누굴, 누가 기다렸는지 추위에 떨면서 기다렸겠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지랖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미아. 우산 아래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미아였다.
“아, 남해야!! 이제 하교하는 거야?”
“누, 누나? 어떻게...? 날씨도 추웠을텐데...”
미아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우산을 남해에게 건넸다.
“받아. 돌아가야지.”
남해는 우산을 받고 몇 번이나 우산과 미아를 번갈아 봤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그런 남해를 현실로 돌려보낸 건 준오와 원형이었다.
“에”
준오와 원형이 살짝 남해를 밀쳤다.
남해는 우산을 받아들며 그대로 미아의 우산 아래로 골. 남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둘을 돌아봤다.
“넌 그거 쓰고 먼저 가라.”
“너, 너흰...”
“야 이 꼬라진데 뭐 더 맞으면 어때!”
그 말과 함께 원형은 다시 빗속으로 전력질주했다.
준오는 급히 가방을 머리에 쓰고 원형을 따라갔다.
“야, 야! 같이 가!”
남해는 미아에게 받은 우산을 쓰며 멍하니 둘이 나가버린 교문을 한참 쳐다봤다.
“우리도 가야지.”
“네, 네... 누나...”
우산 아래에서 남해는 미아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미아는 그런 남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스윽 남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악귀처럼 듀얼만 하고 지내지 말고, 저렇게 청춘도 즐겨야 하는 것을...”
-“저녀석은 집에 돌아간다. 딱 하나만 보고 달리고 있으니까.”
약간 떨어진 곳의 그림자 안에서 용연과 가이저는 몸을 슬쩍 빼고 둘을 쳐다봤다. 둘의 모습을 보며 담소를 나누던 가이저는 문득 미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봤다.
그리고 미아와 눈이 마주쳤다. 확실했다.
-“...!”
미아는 가이저를 보고 놀란 기색도 없이 계속 쳐다봤다. 가이저는 그 눈빛이 불편했다.
호기심도 아니다. 공포나 놀라움도 아니다. 꼭 뱀이 눈에 들어온 먹잇감을 한입에 삼킬 수 있을까 생각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러고서 미아는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남해에게로 고개를 돌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건넸다.
“너희 학교 축제가 언제랬지?”
-“방금...”
-“그 이상 말하지 마라.”
가이저는 왠지 굉장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미아는 대체 왜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본 걸까?
룡성의, 수호자의 감이 속삭이고 있다. 분명 가까운 시일 내로 뭔가 사고가 터질 거라고.
가이저는 그 감이 제발 빗나가기를 바랬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그 사고가 제발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 가능한 라인이기를.
...
“야호! 축제다!”
“축제래 봐야 뭐 있냐. 그냥 동아리들이 성과 좀 보여주는 건데.”
“하지만 수업은 안하죠?”
싱글벙글 원형의 대답에 준오는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원형도 원형이었지만 남해 역시 올해의 학교 축제가 기대된다는 눈치였다. 작년 학교 축제 때는 대회 때문에 아무 것도 즐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축제 때 우린 뭐 해?”
“넌 대체 아는 게 뭐냐.”
“듀얼? 이야, 돌아보니까 작년에 난 한 게 없구나.”
“까짓 거 올해 그만큼 놀면 되지!”
작년 내내 대회, 대회, 또 대회, 예선, 그 때는 집에 돌아가고 말겠다는 의지로 충만해서 가진 것을 모두 걸고 듀얼에 임했으니까.
남해는 그 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뭐부터 할 거야?”
강당 앞에 걸린 대자보 앞에는 꽤 많은 아이들이 보였다. 남해와 친구둘도 가까이 다가가 대벽에 붙은 무수한 동아리의 홍보문들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모습이 마치 부활동 시작할 때 동아리 찾아다니던 때 같았다.
“오컬트 동아리는 뭐 해놨으려나.”
남해는 그때 기억을 되짚으며 대자보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오늘의 최대 이벤트]까지 시간은 넉넉하니까.
...
“후후후. 어서오세요...”
4층 구석의 오컬트 동아리의 동아리실 앞. 수정 구슬이 올려진 작은 탁자와 커다란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있었다.
“오랫만이네요 소야 선배.”
“아, 남해구나!”
소야는 남해랑 처음 만났을 때와 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오컬트 동아리 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소야가 너무 반갑게 남해를 맞이하자 원형이 슬쩍 준오를 돌아봤다.
“저 둘이 아는 사이였어?”
“몰라. 남해 쟤 동아리 찾는다고 여기저기 다닐 때 만났나보지.”
“그렇군...”
“부원 결국 모았나보네요?”
“응, 턱걸이로 넷 간신히 모았어.”
남해가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다른 부원들도 참 오컬트 동아리 하게 생긴 애들이었다. 마녀, 귀신 분장에 요정 같은 무언가로 분장한 애까지.
그 사이 준오와 원형은 동아리실 근처 벽에 붙은 안내문을 읽어나갔다.
“1번. 순서대로 입장해 주세요. 2번. 귀신의 집 내부 구조를 누설하지 말아주세요...”
“5번... 어, 6번이 없네.”
“7번. 이 안내문에는 11번이 없습니다. 11번 안내문은 무시해주세요. 8번. 1번부터 6번까지의 안내문을 꼭 주의해 주세요.”
“6번 없지 않아? 11번은... 11번. 7번 안내문의 내용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안에는 특별한 건 없으니 안심하고 들어가도 좋습니다...”
뭔가 꺼림칙한 내용들이다. 뒤에 나올 내용을 무시하고, 앞서 말한 안내를 부정한다. 그러다가 없는 내용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원형은 벌써부터 다릴 떨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럼! 이제 안쪽도 준비 끝났으니까...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동아리실 안에서 부원들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남해가 앞장서서 들어갔고 망설이는 원형의 손목을 준오가 붙들고 안으로 끌고 갔다.
생각 외로 내부는... 꽤 디테일하게 혐오스러웠다.
“오... 윽...”
마치 피로 쓴 것 같은 시뻘건 글씨.
불길하게 깜빡이는 입구의 흐릿하고 작은 조명에 벽에 그려진 기분 나쁜 그림.
겨우 네 명의 학생들이 학교 축제를 위해 급조한 곳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의 퀄리티.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자, 발판을 밟은 것을 트리거 삼아 천장에서 낙하해오는 조형물.
원형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
“왁, 어, 어어어어!!”
“얌마 니가 더 무서워!!”
오컬트 동아리의 동아리실은 동아리실치곤 넓었다. 하지만 귀신의 집을 만들기엔 좁았다.
그렇기에 넓이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길이 미로처럼 꼬아져 있었다. 얼마나 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나무판자로 된 다리에 오르자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스윽, 무언가가 일행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힉!! 뭐, 뭐야!”
“부원이겠지...”
다리를 지나자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찰박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고장난 것처럼 괴상한 고음과 함께 사람의 비명, 그리고 웃음소리가 함께 고막을 찢어버릴 듯 커다란 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히히!!
찰박거리는 소리도 더 커졌고, 일행의 뒤에서- 소복을 입은 누군가가 달려왔다.
원형이 죽어라 앞으로 도망치자 준오와 남해도 엉결겁에 원형을 따라 앞으로 달려갔다.
얼마 달리지 않아, 검은 천막을 걷고 둘은 동아리실의 반대편 입구로 나올 수 있었다.
“와, 와. 와. 으하하하하하하하... 하... 하아아아아...”
원형은 다리에 힘이 쫙 풀려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준오와 남해도 고작 동아리 결과물치곤 꽤나 섬뜩한 경험이었다.
“후후, 즐거우셨나요...”
어느새 출구 근처로 자리를 옮긴 소야가 일행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남해와 준오는 고갤 끄덕였고, 원형은 가로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한번 사용한 어트랙션을 정리하는 중이겠지.
“이야...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지?”
“진짜 그렇다. 동아리 부원도 고작 넷뿐이던데.”
“맞아. 특히 그 귀신이 제일 신기하더라.”
“마지막에 소복 입은 귀신?”
“으, 걔도 끔찍했는데 왜 벽면에서 우리 비웃으면서 쫓아온 그거 있잖아.”
원형의 말에 남해와 준오는 물음표를 띄웠다.
천장에서 떨어진 어트랙션, 발목을 스친 귀신도 있었지.
스피커의 기분 나쁜 소리, 마지막에는 소복 입은 귀신까지...
하지만 벽면에 나타난 귀신은 보지 못했다.
“그냥 너 너무 겁먹어서 헛것을 본 거 아냐?”
“아 씨... 아닌데...”
남해는 문득 용연이 예전에 소야 선배를 보고 내린 평가가 기억났다.
기가 허하고 음기만 가득해 귀신이 머물기 좋은 몸이라고 했지. 그러면... 그런 소야 선배에게 꼬인 귀신인걸까?
에이, 아니겠지.
“자자! 다음 장소로 어서 가자!”
...
“어서옵쇼!”
이곳은 실습실에 위치한 쿠킹 동아리의 [듀얼밥]. 부원들이 밝고 기운찬 목소리로 방문객을 반겨준다.
동아리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느낄 수 있는 지방 타는 냄새.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지.
시간은 이제 곧 열한시. 배가 고플 시간은 아니지만 일찍부터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온 학생들이 출출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
“아... 좋은 냄새다...”
입구에서는 용용형제 중 마룡이 열심히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비룡이 손질한 재료를 바탕으로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있었고.
체력이 좋고 근력이 있는 동생과 손재주가 좋고 실력이 있는 형의 적절한 역할분담. 그 사이사이는 다른 쿠킹 동아리 부원들이 돕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부원들을 적재적소로 배치하고 있는 인원이 현 쿠킹 동아리의 동아리장 유란.
상상 이상으로 이곳은 장사에 진심인 것 같다.
“오...”
“제일 빨리 나오는 건 뭐야?”
“훔무스 있어요. 만이만이 맛이써요. 이집트식 콩 수프에요. 다들 좋아해오.”
이집트에서 온 교환학생 아야 라지크가 어색한 말투와 함께 수프를 한 국자 퍼 보였다.
원형은 잠시 그 수프를 쳐다보다가 대충 자리로 휙 가 앉았다.
“어? 넌 안 먹어?”
“난 콩 싫어해...”
“برغوث...”
아야가 싸늘한 표정으로 슬쩍 원형을 흘겨보고 중얼거렸다. 남해는 한참이나 사색이 된 얼굴로 아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말은 아닙니다. 애굽*어로 귀찮은 녀석이라고 하는군요.”
-“넌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냐?”
-“목사 서재에 꽂힌 책들 중에 괜찮은 것이 꽤 많덥니다.”
용연이 남해의 그림자 안에서 올라와 슬쩍 귀띔을 해줬다. 아야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훔무스를 저어주고 옆에서 익어가는 빵을 한 번 뒤집었다.
남해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구는 라지크를 보며 식은땀을 한줄기 흘렸다.
“너... 제대로 말할 줄 알잖아...”
“컨셉인 것입니다. 이쪽이 훨씬 다른 애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 이름도...”
“그건 비밀로 하는 겁니다.”
라지크는 생글생글 웃으며 입가에 검지를 댔다. 남해는 그 모습이 꼭 고양이인 척 하는 호랑이로만 보였다.
저 애 정도면 그냥 호랑이도 아니고 어디 빙하시대 검치호 정도는 될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쓰는 카드들’의 수준이 다르니까.
아직도 그 듀얼을 생각하면 소름이 다 끼쳤다.
“신기한 요리다. 나 그거 하나 줘.”
“십오 백원이에요 고마워오. 만나게 머거요.”
준오가 돈을 꺼내자 아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명랑하고 어눌한 말투로 수프를 떠서 빵과 함께 접시 위에 얹어 준오에게 건넸다.
남해도 준오와 원형의 옆에 앉아서 메뉴판에 손을 가져갔다.
“오, 이거 괜찮네. 풋내도 별로 안나고 맛있어.”
“나는... 국수 한그릇.”
“볶음밥도 하나 추가!”
“7번 테이블에 국수 한그릇 볶음밥 한그릇! 금방 나갑니다!”
주문을 받은 학생이 소리치자 비룡이 잽싸게 냄비에 물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날랜 손놀림으로 조리기구를 착착 준비해나가고, 사용한 조리기구를 옆의 다른 부원이 받는다. 그 사이 손질을 마친 재료가 마룡의 손을 떠나 비룡에게로 도착.
“저도 옆에서 보지만 정말 신기하다입니다.”
“만두 추가요!”
“네, 곧 준비해드릴게요! 유란 선배, 4번 테이블 만두 추가!”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그렇고, 안을 가득 채운 맛있는 냄새도 그렇고 동아리실보다 거의 식당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네, 국수 나왔습니다!”
“비주얼 괜찮은데?”
좋은 냄새가 나는 국물에 갓 삶아 탱글탱글한 소면. 예쁘게 얹어진 고명도 뺄 수 없지.
한참 유란이 비룡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남해는 그것보다 막 나와 따끈따끈한 국수에 집중하기로 했다.
“음, 음!”
“야 내거 나오면 좀 줄테니까 나도 좀 덜어줘라.”
-야 요리부 얘들 진심이다 니들도 어서 와봐
-ㅇㅋ 지금 간다
남해는 원형에게 국수를 조금 덜어주고는 교회 채팅방에 사진을 올렸다. 금선과 낙랑도 곧 이쪽으로 올 모양이다.
소야 선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이쪽의 만족도가 더 높았다.
“만두 나왔습니다! 볶음밥 아직 준비 안됐어요?”
...
준오와 원형 둘 다 각각의 동아리에서 콜이 와서 가버렸다. 남아버린 남해는 식당, 아니 쿠킹 동아리에서 합류한 금선, 낙랑과 함께 다음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여기!”
처음의 강당 앞 대자보. 낙랑이 손가락으로 한 종이를 가리켰다.
학생회에서 준비한 [학교의 역사]. 금선은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윽.”
“왜?”
“재미없을 거 같지 않아?”
“그래도 궁금하잖아!”
“나도 궁금하긴 해.”
마치 두 동생의 무리한 부탁을 받는 큰누나처럼 금선은 한숨을 쉬더니 고갤 끄덕였다. 승낙의 뜻이었다.
“그래, 가자.”
학생회의 기록은 1층, 그것도 별관에 위치한 교장실 바로 옆의 응접실이었다.
평소에는 외부인사들을 대접하는 곳답게 굉장히 깔끔하고 넓었다.
학생회장 지혜와 부회장 진철도 한쪽에 앉아 입장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몇 명인가 선객으로 와 있었다. 꼭 박물관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벽면에는 신문 기사의 스크랩이나 인터넷 기사의 프린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어... 윽...”
여러 수상자들의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특히 그 중 제일 큰 사진은 남해가 1학년 때 교대표 결정전에서 학교 최초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때의 그 사진이었다.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거기에 입을 맞추는, 우승자라면 한 번씩은 취한다는 트로피 키스.
자리에서야 당연히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꽉 들어찬 상태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렇지 않게 취한 포즈지만 그 기록을 이렇게 벽면에 붙은 커다란 사진으로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르다.
“와, 이렇게 큰 사진으론 처음 봐.”
“대박. 남해 방에 붙여도 되겠다.”
“그... 그만 둬...”
“교장 선생님이 신경 써서 고른 사진이니까.”
한쪽에 앉아서 남해 일행을 보던 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교장님 픽이었나.
“그거 말고...”
“내 사진도 있네... 와, 이땐 진짜 나 말랑말랑했구나.”
서혜수 선생님도 어느새 벽면으로 다가와 자신의 사진을 감상했다. 16강에서 길디 긴 혈투를 치룬 끝에 8강 진출이 확정될 때의 사진. 사진 속 자신은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에 찬 얼굴이었다.
괜스레 그 시절의 추억에 잠긴 서혜수 선생님은 아련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지민이 사진도 있어! 금선이 네 사진도 있네.”
금선도 그 즈음 사진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지금과 전혀 달랐다.
중학교 3학년의 짧은 1년간 온갖 사건을 겪고 탁해진 눈이 아니라 아직 여러 가지로 눈빛이 살아있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어, 그렇네.”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금선의 옛날 모습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남해가 이세계에 떨어지고 그 첫 해. 남해는 죽어라 듀얼했다. 하고 또 했다. 누가 상대라도 카드라는 검을 뽑아, 듀얼 디스크라는 방패를 들고 전력으로 맞상대했다.
금선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금선은 과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왜 힐 같은 이상한 컨셉으로 듀얼에 임할까? 원래 세상에서는 어땠을까?
그런 이야기를 거의 해주지 않았다.
“너도 이렇게 눈이 빛나던 시절이 있었구나.”
“뭐. 불만있냐?”
남해는 굳이 더 물어보진 않기로 했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깃거리 하나는 있겠지.
...
“오.”
네 번째 목적지는 사진 동아리. 그동안 찍은 다양한 사진들이 쭉 걸려있었다.
학교 앞의 커다란 목련, 교내의 연못에 있던 연꽃,
가을철 낙엽을 찍은 사진과 눈으로 덮여 새하얗게 변한 학교의 전경.
가까운 곳에서 찍힌 생각 못한 아름다운 사진들.
그 뿐 아니다. 학교 내외의 행사 때 찍힌 사진들도 보였다.
저번의 놀이공원에서 찍힌 사진들처럼 희로애락이 담긴 표정들도 있다.
아까 1층의 학생회 기록물에서 본 사진들도 걸려있다. 대부분은 아마추어의 사진이었지만 몇 장은 신내림이라도 받았는지 프로 못지않은 구도와 조명의 사진도 있었다.
남해와 금선이 사진을 집중하며 보는 사이 둘의 뒤에서 윤수가 나타났다.
“어때? 저건 내가 찍은 건데.”
“윤수 너는 듀얼리스트가 아니라 사진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진짜 잘 찍었다!”
교대표 결정전 때 찍은 사진을 보며 남해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승부가 끝나고 완전히 탈진해버린 자세, 얼굴에 보이는 승리의 안도감.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듯 꽉 쥔 주먹, 구도도 굉장히 좋았고 조명까지 절묘하다.
“그런데... 이게 다야?”
사진은 정말 잘 찍었지만 이래서는 학생회가 준비한 기록물들과 별 차별화가 안된다.
“이게 다가 아냐. 다른 것도 준비했다고.”
사진 동아리의 전시회가 열리는 교실 바로 옆은 탈의실이 있었다. 사진 동아리는 이걸 어떻게 쓸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하나 대책을 마련했다.
사진부에서 준비한 옷을 입고 옆의 교실에서 추억거리가 될 사진을 찍는 작은 이벤트였다.
“그럼 무슨 옷 있는데?”
“카탈로그는 저쪽에서 보면 될 거야.”
“저쪽? 아...”
탈의실 앞에는 애리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에리가 앉은 의자 옆에는 종이뭉치가 보였다. 저게 윤수가 말한 카탈로그일테고.
“그럼 어디...” “카탈로그를...”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해는 다른 애들과 마주쳤다. 원형과 준오였다.
서로 왜 얘가 여깄지? 하고 어색해하는 사이, 탈의실 안에서 츄리닝을 입은 지민까지 등장했다.
“너흰 왜 여깄어?”
“그냥 다 모였네.”
카탈로그를 들고 있던 애리도 이정도 상황까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
이왕 모인 김에 한 번 준비된 옷은 입어보자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누가 입을지는 정말 깔끔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결정됐고...
“아아아아악!!” “왜 하필 얘랑 나야!!”
...남해와 준오가 마지막 둘이 되버렸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한판으로 끝내자, 가위...”
“탈의실이 둘이니까 너희 둘이 하면 되겠네.”
“뭐?” “어?”
윤수의 둘 다 분장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 모두의 의견이 그쪽으로 쏠렸다. 남해가 한참을 어이없어 하다 먼저 탈의실로 들어갔고 준오도 한숨을 쉬곤 다른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밖에서 카탈로그를 읽던 친구들은 의견 정리를 마쳤고, 윤수와 애리가 옷 한세트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들고 간 옷은 여성복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해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아 그게 뭐얗흫흐흐히하하하하!!”
남해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여장을 보고 금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잘 들지 않아 어색한 화장과 어울리지 않는 가발, 거기에 누가 봐도 남자인 어깨와 목 선. 역시 여자 옷 입은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원형도 끅끅대며 웃음을 간신히 누르고 남해의 사진을 찍는데 열중했다.
“아씨 나도 이상한 거 안다고! 그만해!”
“푸흫...후흐흐헤, 햐. 휴, 그래서 준오는?”
남해가 나온 뒤에도 준오는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만 들릴 뿐 도통 나오질 않고 있었다. 남해가 화장을 다 지우고 가발과 옷을 벗어던질 때까지도.
그리고 기나긴 분장 끝에 나온 준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비주얼이었다.
“뭐, 왜.”
가늘고 살집 없는 몸은 여자 옷을 적절히 소화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가짜 가슴과 붙임머리, 훨씬 얇은 알의 안경과 애리의 화장까지 더해지니 목소리를 빼면 준오는 여자애래도 믿을 모습이 되어 있었다.
원형은 남해에게 한 것처럼 사진을 연달아 찍어댔지만 표정은 전혀 달랐다.
“와... 남해는 여장을 했는데 얘는 변장을 하네.”
“애리야 사실대로 좀 말해봐 쟤 준오 아니지?”
“준오 여동생 준아야. 다들 인사해~”
준오는 잠시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지민을 잠깐 보고는 남해를 째릿, 하고 노려봤다.
“선배, 저 여자 누구에요?”
준오가 거의 완벽하게 여자애 목소리를 내자 순식간에 동아리실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완벽하게 여자애 목소리를 내는 준오를 보며 남해는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수도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되었고 지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너... 너네 얘 목소리 들었냐?”
“준오 너 그런 특기도 있었어...?”
“아~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준오의 여장을 담당한 애리는 만족스러운 듯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준오는 윤수에게 건네받은 손거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봤다.
“근데 진짜 이게... 나?”
“그런 말 하지 마.”
화장도 화장이었지만 애리의 소품 선정도 탁월했다.
옆머리가 넓은 가발로 목선을, 셔츠의 단추를 맨 위까지 잠가 목젖을, 소매가 넓은 상의와 허리에 차는 힙쌕으로 팔과 허리를...
가려야 하는 곳은 적당히 가리면서 여성스러운 매력은 표출하는 복장 덕분에 준오는 슥 봐서는 정말 여자애처럼 보이고 있었다.
“어떡해.. 나한테 반할 것 같아...”
“저새끼 이상한 취향에 눈떴다.”
...
연극부의 연극도 보고, 도시락 형태로 준비된 점심도 간단하게 먹었다.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는 점차 특정 단어의 비율이 올라가고 있었다.
[금천제전]. 오늘 최대의 이벤트였다.
“근데 그래서 금천제전이 뭐냐.”
“이새끼 작년에 걸렀지 참.”
“뭐... 대충 프로 듀얼리스트들이랑 치루는 이벤트전이야. 매년 나오는 선수는 바뀌고.”
“그게 돼?”
“교장 선생님 인맥.”
그 말에 남해는 바로 납득했다.
교장 선생님은 한때는 수상경력을 줄줄이 늘어놓을 수 있던 프로 선수 출신으로 팀의 감독까지 역임했고, 그런 교장 선생님이 목사님의 애제자였다고 들었다.
이미 목사님과 같이 다니며 몇 번 경험해본 일들이다. 한때 업계의 거물이었던 만큼 인맥은 확실했다.
어딜 가나 환영받고, 누굴 만나도 아는 사람 투성이. 과거를 몰라도 알 수밖에 없게 된다.
“곧 시작하겠다. 빨리 가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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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埃及)은 한자어로 이집트를 뜻하는 말입니다. 저번에 나온 희랍(希臘) 역시 헬라스=그리스를 뜻하는 말입죠.
그간 일상편에서 쌓아온 단역들 총집합! 이 날을 위해 조연들을 모아온 것입니다!(아님)
다시 일하느라 글 쓸 시간과 체력이 후달리는 상태인지라 겨우겨우 이제라도 올리네요. 대충 다음 편까지가 이런 느긋한 파트고, 그 뒤로 본격적으로 달려야 하는데... 나 해낼 수 있을까.
준오의 여장은 삽화는 없고, 옛날에 그린 대충 비슷한 자료가 있으니 이거로 땜질합니다.
초안에서는 남해랑 꽁기꽁기한 이벤트도 생각했는데, 그럼 너무 남해 신세가 처량해지니까 빼버렸지요.
외전도 슬슬 손대야 하는데... 하는데... 으으윽...
평범한 남자아이가 여장이 어울릴 리 없다는게 세간의 상식이잖아요!!!
뭣 주인공은 여장이 어울리는 아이가 아닌 거냐
평범한 남자아이가 여장이 어울릴 리 없다는게 세간의 상식이잖아요!!!
하회탈의 수행사제
남해는 여자에 이어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도 엮이는군요. 과연 남해의 옆자리를 차지할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차지하지 못할 거 같은데오...
아앗... 그렇군요. 남해 쿤... 이 팬픽에서 여복이 없는 캐릭터였죠...??ㅠㅠ
나매쿤은 의외로 굵은 인상의 캐릭터였군요
아티스트의 전문성 차이도 있겠지만 뭐... 사실 여장이 잘 어울리는 케이스가 희귀한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