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중국)과 한국은 서로 미승인국 상태였으며, 외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쌩까던 나라였으나 - 오히려 당시 소련과 한국의 관계가 더 나았을 정도다 - 이 사건은 예외였다. 그 중공이 불시착 소식 듣자마자 교신을 시도했으며 납치범, 승객 등의 처우를 위해 2년만에 고위급 외교단 33명 급파했다. 훗날 밝혀지길 저 승객중 일부는 유도탄 학자가 있는데 저 사람이 중국 국방 최고 기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바로 외교협상을 시도한 것이였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의의는 바로 1953년 이후 단절된 한-중 외교 관계의 첫 수립이었다. 실제로 이후 중국은 아시안 게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며 한국과의 관계를 맺어갔으며, 이 사건에 상호 국명을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공식적으로 표기했다.
참고로 불시착한 당일에 승객들은 춘천 내 모든 중국집이 총동원해서 식사를 해결했다. 이 날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한국식 중화요리를 맛보았다고 한다.
역사란 참 우연의 연속이구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