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해를 품어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을이네요.”
노을보다 아름다운 그녀는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누르며 말했다.
“당신이 가는 곳에도 이처럼 노을이 아름답겠지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없는 땅의 노을은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그곳에 머무르실 건가요?”
그가 짧게 ‘1년’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1년 이란 시간의 크기에 놀란 것 같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없는 1년’이란 크기에 놀란 것이겠지.
태어나기도 전에 약혼을 하고, 그녀가 태어나고 17년 이란 세월동안 서로가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둘이었다. 반 년 뒤. 그녀가 성인식을 받고 난 뒤에 바로 다음 날에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1년……이나요?”
그녀의 태도에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고 있는 치마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속에서 소리가 새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뒤섞여 원래의 감정들이 뭐였는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반쯤 잠겨있던 노을이 완전히 바다너머로 사라졌을 때 간신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꼭. 꼭. 살아서 돌아오세요. 저 기다릴 거니까. 꼭. 돌아오세요.”
그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반년 후. 그녀의 성인식이 있던 날. 그녀는 그가 전장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뇌가 얼어붙은 것 마냥 아무런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했던 그의 정신이 깨어났다. 그는 따뜻한 액체 속에 둥둥 떠 있었다.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밝은지 어두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 주기적으로 쿵 쿵 쿵하고 부드러운 진동과 소리가 느껴졌다. 그러나 불안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따뜻했고, 포근했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낙원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아무런 근심 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바로 여기가.
그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몸을 웅크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하루 잠깐 깨어나고, 다시 잠이 들고, 다시 깨고, 다시 잠이 드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을 감싼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이 격하게 출렁였다. 종국엔 그를 감싸고 있던 액체가 빠져나가더니 물렁물렁한 벽이 그를 조이며 한 쪽 방향으로 밀어냈다. 그는 처음에는 몸부림치며 저항했으나 결국 그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밀려난 끝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는 그 구멍에 머리를 박고 버둥거렸다.
한참동안 악전고투한 후에 그는 그 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차가운 것이 그에게 닿았다. 그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곳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긴 했으나 단순한 소음일 뿐 그에게 어떠한 의미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무언가에 발이 잡혀 거꾸로 매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엉덩이에서 고통이 퍼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막혀있던 목구멍과 숨구멍이 턱하고 뚫렸다. 그가 비명을 지르고 얼마가지 않아 엉덩이의 고통이 사라지고 따뜻한 것에 감싸였다. 쿵 쿵 쿵. 그에겐 익숙한 낙원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그 진동을 느끼며 다시 잠이 들었다.
낙원만큼은 아니지만 새로운 생활도 편했다.
풍만하고 부드러운 것에서 나오는 달콤한 즙으로 배를 채우고, 아무런 생각 없이 배에 모인 것을 아래로 뿜어내는 것이 과정이 추가되었지만 그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가끔씩 부유감과 주위의 것이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그는 그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먹고, 싸고, 자는 것을 반복하며 그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단순한 소음이었던 것들을 받아들인 그의 뇌는 그 소리들의 의미를 분류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는 여전히 먹고, 싸고, 자는 것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어느 날. 그의 눈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구는 안쪽으로 들어오는 빛을 전기적인 신호로 바꾸어 그의 뇌로 보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뇌는 자극을 받으면서 그 기능을 발아했다. 그는 두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한 여자였다.
여자의 얼굴은 그를 각성시켰다.
생겨난 지 1년을 간신히 넘긴 그의 작은 뇌가 20년 어치의 경험을 쏟아냈다. 경험의 격류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자아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그가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여자가 말했다.
“네, 엄마에요. 엄마. 따라해보세요. 엄. 마.”
그는 재미있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의 뇌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가 웃음을 그쳤다.
상충되는 두 가지가 부닥쳐 그의 자아를 뒤흔들었다. 그는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몸을 보았다. 알록달록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몸뚱아리가 보였다. 근육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포동포동하고 하얀 살결이 보였다. 그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창을 잘 써서 신창이라 불리던 그였는데 지금 꼴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어, 어부!”
아니다. 이게 아니다.
“아부!”
그는 다시 여자의 이름을 외쳤으나 그의 혀는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뱉어냈다.
그가 여자의 이름을 말하기 위해서 악전고투하는 사이에 한 남자가 여자와 그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남자를 반겨주었다.
“여보.”
여자는 남자를 ‘여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가 아닌 남자에게. 남자는 가볍게 여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앞에서.
그는 분노하여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어이쿠. 아직 어린데도 힘이 넘치는군. 장군감이야, 장군감.”
그에게 얻어맞았건만 남자는 오히려 껄껄 웃으며 그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남자의 주먹과 자신의 주먹의 크기를 비교하여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다. 아니 인정했다.
그는 환생했다.
그는 아기가 되어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전생에 사랑했던 그녀였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어, 어머. 왜 그러니? 배고프니? 방금 젖을 먹었잖니. 혹시 기저귀 때문에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갑자기 자지러지게 우는 그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절할 때까지 울부짖었다.
현령(縣令 : 현을 관할하는 지방관. 지금으로 따지면 군사지휘권도 가진 소도시 시장정도.) 윤백천의 집안은 난리가 났다. 윤백천의 유일한 아들이자 가문을 이을 장손 윤민경이 덜컥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기 때문이다. 윤민경은 무언가를 먹이려 하여도 도리질을 하고 억지로 먹여도 이내 토해버리고 온 종일 울기만 했다.
윤백천은 혼인을 하고 5년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본 귀한 아들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니 애가 탔다. 윤백천은 공무도 손을 놓고 사방으로 아들을 살릴 방도를 찾았다. 사방으로 약을 구하고, 의원을 부르고, 아들을 치료해주는 사람에게 막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방을 붙였다. 하지만 윤백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윤민경은 나날이 말라가더니 종국엔 울 기운도 사라졌는지 눈을 감은 채 방에서 가늘게 숨만 쉴 뿐이었다. 윤백천은 평소 호인이라는 말을 듣던 자였지만 아들이 이 지경이 되니 만사에 신경질을 부리고 행동거지들이 험악해졌다.
윤백천의 아내이자 윤민경의 어머니인 이수윤도 마찬가지였다. 이수윤은 어린 아들이 앓자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정화수를 떠놓고 밤새 기도를 하며 밝을 때에는 아들을 간호했다. 하지만 차도가 없으니 이수윤도 병자가 된 마냥 하루하루 말라가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윤민경이 살기 힘들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아버지인 윤백천도 포기한 듯 방에 틀어박혀서 종일 술잔만 기울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이수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수윤 역시나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같이 산에 들어가 직접 정화수를 떠서 기도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의 곁을 지켰다. 주위에선 이수윤의 모정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비쩍 마른 이수윤의 모습을 보고‘저러다가 모자 나란히 무덤에 묻히겠네.’라며 혀를 찼다.
그는. 윤민경은 죽어가고 있었다. 윤민경은 아직 첫돌도 맞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윤민경은 세상의 빛을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스물두 해에 달하는 세월이 추가로 쌓여있었다.
윤민경은 환생자였다. 전생의 윤민경은 젊은 나이임에도 무재(武才)가, 그중에서도 창을 쓰는 실력이 뛰어나 신창(神槍)이라고 불리던 무사였다. 전생의 윤민경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둘 다 태어나기도 전에 혼약을 맺은 관계였지만 윤민경은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윤민경과 그 여자는 끝끝내 결혼하지 못했다. 전생의 윤민경이 외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먼 땅으로 떠난 후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전생의 윤민경이 사랑하던 여자의 이름은 이수윤이다. 그렇다. 지금 윤민경의 어머니인. 윤민경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된 것을 깨닫자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윤민경은 죽어가고 있었다. 윤민경이 바라던 바였다.
차가운 것이 윤민경의 얼굴에 닿았다. 윤민경은 경험으로 그것이 어머니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윤민경은 감정이 일어나는 기운조차 없었기에 그냥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이수윤은 윤민경을 안아들고 입에 젖을 들이대며 말했다.
“아가. 제발 먹어. 응?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죽어.”
이수윤이 간곡히 부탁하건만 윤민경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입을 벌리지 않았다. 이수윤은 울상이 되어 윤민경의 몸을 주물렀다. 얼마 전까지 포동포동하던 몸이 눈에 띄게 말랐다. 윤민경은 이수윤의 살이 빠진 만큼 자신의 심장이 조각나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름난 의원도, 진귀한 약재도, 간절한 기도도, 성심을 다한 간호도 윤민경을 살리지 못했다. 이수윤은 자신이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이수윤은 품 안에 있는 비쩍 마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수윤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수윤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이대로 아이를 떠나보내는 것은 싫었다. 터무니없고 멍청한 짓이라도 해야 했다.
윤민경의 입에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오더니 비릿한 맛이 혀 위로 퍼져나갔다.
“내 삶도 참으로 박복하다. 누가 말했던 것처럼 내 운명에 살이라도 꼈는지. 아니면 전생에 업을 쌓아 이런 건지.”
축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찍 내 곁을 떠나는구나. 1년 뒤면 돌아온다던 그 사람도 끝내 돌아오지 못하더니. 배 아파 나은 너마저도 이렇게 일찍 내 곁을 떠나려 하는구나.”
윤민경의 얼굴로 따뜻하지만 무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죽은 것처럼 살아오다가 네가 태어나 다시 살아난 것 같았건만…….”
윤민경의 부서진 가슴에 이수윤의 말이 스며들었다.
“아가, 살아라. 너마저 떠나면 이 박명 계속 이어나갈 자신이 없다. 부탁한다. 제발. 제발 살아라. 너는 내 생명이다. 이 어미를 위해서라도 살아라.”
보통의 아기에게 하는 것이었다면 단순히 기도를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민경은 보통의 아기가 아니었다. 윤민경은 똑똑히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들었고, 그것을 이해했다.
윤민경은 입에 들어온 것을 도리질로 떨쳐냈다. 그리고 버둥거리며 이수윤의 가슴을 찾아 빨았다. 비쩍 마른 몸에 생명이 흘러들어왔다.
이수윤은 윤민경이 스스로 가슴을 찾아 빠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 눈물이 흘렀다. 방금 전의 눈물과는 다른 이유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이수윤은 감격에 차서 말했다.
“아가, 고맙다. 그래, 살아라. 이 어미는 네가 살아준다면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
윤민경은 그간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분주하게 이수윤의 가슴을 빨았다. 이수윤의 젖으로 충분히 배를 채운 윤민경은 크게 트림을 하고 잠이 들었다.
훗날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윤민경은 이수윤의 왼쪽 새끼손가락 첫 마디가 잘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발견한 윤민경은 지난 번 자신의 입에 퍼져나갔던 비릿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수윤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새끼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수윤이 얼마나 윤민경을 끔찍이 아끼는 지 알 수 있었다.
윤민경은 다짐했다.
살자. 이미 한 번 죽어서 그녀에게 떨칠 수 없는 슬픔을 주었는데 모처럼 얻은 새 생명을 버려서 다시 그녀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말자. 어쩌면 그녀에게 웃음을 돌려주기 위해 새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서 그녀가 웃을 수 있게 하자.
이 생명은 그녀를 위해서.
내가 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삶의 시작부터 강렬한 NTR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