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이런 시간에 심부름이라니.
아무리 이키아 선생님이라도 이번은 무리한 부탁이었다.
확실하게 오늘은 힘들다고 말하려고 했다.
"네. 알았어요."
하지만 난 어느새 나갈 채비를 하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학원에 나갔다 들어온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으니 달리 준비할 것은 없었다.
옷은 교복을 입은 그대로 신발장으로 가 단화대신 단순한 모양의 운동화를 갈아신었다.
"오, 이번에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는구나."
"보복이 두려우니까요."
전에 몇번이고 이키아 선생님의 심부름을 피했다가 화려한 보복을 당한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시범조교로 쓰겠다며 방과후에 남아 이상한 춤을 연습시키지 않나, 시험지 보기에 내 이름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하고: 위 본문의 제임스의 발언을 보았을때 분며이 제임스는 사람에 빠진게 틀림없어!" 같은 터무니 없는 오답지를 낼때면 다른 녀석들의 반응은 항상 '푸웁'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고는 했다.
이키아 식 보복은 확실히 두려운 것이지만, 이번은 순전히 이키아 선생님의 후환이 두려운 것 때문은 아니었다.
계속 이 어두침침한 방에 있다면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날 것 같았다.
더 이상 나와 관련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그 심부름이란건 뭔가요."
"응. 중요한 서류를 학원에 두고 온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것 좀 가져다 주지 않겠냐?"
"설마 지금 선생님의 집으로 가져오라는?"
"당연하다."
이 선생님을 학생을 자신의 마음대로 너무 부려먹는다.
등, 하교 길을 다시 반복하는 것도 모자라 이키아 선생님의 자택까지 갔다와야 하는건가.
내가 있는 기숙사 멘션에서 전철역까지는 10분, 전철을 타고 학원까지는 15분....물건을 챙기고 학원에서 이키아 선생님의 집까지는 30분정도.
1시간이 넘다니 데미지가 너무 크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으면 나중에는 막차를 놓칠지도 모르겠다.
* * *
"이런 걸 학생에게 맡겨도 되는 거냐고."
이키아 선생님의 연구실 책상위에 놓여 있는 서류란걸 발견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중요한 서류라고 말한 것 치고는 서류들은 아무렇지 않게 책상위에 널부려져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의 신상기록부 같은 것이었다. 얼굴 사진과 학생의 간략한 신상기록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신상기록부라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이 종이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간략한 신상의 밑에는 또렷하게 '징계 기록'이라고 적힌 란이 있었던 것이다.
꽤나 여려명의 신상기록부, 아니 징계기록부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까.
일부러 그것들을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뜻보기에도 그것들의 공통점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징계 기록에 무언가들로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가방도 두고 왔으니 이 걸 그냥 손으로 들고 갈수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책꽂이 사이에 서류봉투가 끼어있었다. 낡고, 군데 군데 주름이 가있었지만 그럼 어떻겠냐는 생각으로 봉투에 서류들을 넣고 입구에 풀칠까지 다 했다.
그러고나니 얄궃게도 깍둑이 같이 혼자 숨어있던 다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책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신상기록부. 그건 책상위의 글씨들로 빽빽히 차 있던 다른 것들과는 달리 얼굴 사진과 신상을 제외하고는 꽤나 허전한 것이었다.
이키아 선생님의 연구실은 햇빛이 들어오는 차양을 제외하고 모두 벽면이 책장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것을 집어서 책장 구석 낡은 책들사이에 꽂아두고 그곳을 나왔다.
어둠이 깔린 계단을 따라 2학년들의 교실이 있는 3층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딱. 딱. 그러다 무엇인가 톡,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누구도 없는 복도라 그것이 크게 들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의 감정을 담아 살벌하게 외치고 있는 것처럼 벽을 타고 건물을 울리고 있었다.
2학년 A반에서 희미한 불빛이 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오는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딱. 딱. 똑. 똑. 그것은 내게 익숙한 소리였다.
초록 칠판에 분필이 부딪히며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는 수상쩍은 소리.
우리 학원은 절도와 안전상의 목적으로 저녁 8시가 되면 학원의 출입을 금지한다. 간혹 물건을 두고 간 사람들이 경비실에 허락을 맡고 들어가는 일 말고는, 학교 축제 기간을 제외하고 이 시간에는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험기간에 더욱 엄격한데 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시험문제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8시가 훨씬 넘은 이 시간에 아무도 없는 학원에서 어떤 수상쩍은 녀석이 칠판에다 분필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거다.
나는 2-A 반의 문앞으로 갔다.
교실에는 복도로 난 창이 있었으나 교실 안에서 커튼을 처놓아서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볼 수 없었다. 단지 누군가 한 명이 교실의 안에서 전등을 키지 않은채 수상쩍은 일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할까.
당장 문고리를 잡고 옆으로 밀어버리기에는 며칠 전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기억에 있어 무리였다.
혹시 그 녀석, 설마 베가가 이 야심한 시간에 자기의 교실에서 이상한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런걸 목격하고 만다면 베가는 기어코 이번에는 내 머릿속을 끄집어내 기억을 지우려 할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이 안에서 베가가 내가 망상한 그대로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무서운 장면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섬뜩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괴짜다 괴짜라고.
드르륵.
하지만 나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수상한 누군가는 칠판에 무언가 커다란 글자를,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뒷모습은 분명히 우리 학원의 여학생이었다.
주름이 있느 스커트 위에 노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후드로 머리를 덮고 그 안에는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딸각. 그 소리와 동시에 교실안을 비추던 등불이 꺼졌다. 그녀가 자기의 손전등을 끈 것이었다.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유달리 어두운 오늘 밤과 모자를 덮어쓰고 있는 탓에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전봇등 빛에 하반신만 보일 뿐이었다.
"오랜 만이네"
"날....알아?"
그녀는 대답을 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차피 상관없다. 나도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난 그녀에게 물어야만 했다.
어째서 그녀는 지금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곡 있는거야. 넌."
"무슨 짓을 벌이냐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얼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그녀가 헛웃음 소리를 내고 말했다.
"당연한거 아니야? 너도 고등부 2학년이라면 3년전에 너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3년전.
그녀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3년전의 능력시험일 것이다.
"뭐야 마치 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얼굴은?"
그녀가 비웃듯이 날 쳐다보았다.
"나 있잖아. 너 얼굴은 분명히 기억해. 그때도 그런 얼굴이었지. 넌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인 것 마냥 저 멀리 떨어져서 불 구경하듯 그 썩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잖아?"
그리고는 되묻는다.
"기억하잖아? 너도 공범자였으니까."
난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얼마만에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인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사람에게 화가 났다.
"그럼 그 공범이라는 내게 복수하면 되잖아. 왜 이렇게 하면서까지 그 녀석에게."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인거야. 베가. 너의 욕심이 모든 걸 망쳐버린거야. 절대 이제와서 그 욕심 같은거 버리지마, 너에게 받은 고통들 모두 돌려줄테니까.'
그녀 뒷편에 칠판에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어째서 그녀는 지금 그토록 베가를 원망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가 섬뜩하게 웃었다.
"착각하지마. 너같은 놈들에게도 언젠간 되갚아 줄거야. 하지만, 지금이 아닐 뿐이지."
그녀는 그리고 앞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러니 기대해. 이번 시험에서 그 베가가 어떻게 처참히 무너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