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세상따위 망해버리라고 난리를 피우던 정신나간 용을 때려잡고, 그에 대해 조촐하게 축하하는 자리였다. 왕과 그 가족, 그리고 고위 귀족과 나의 동료들이 모여 2시간 동안 계속될 저녁을 먹는 자리. 주요리가 나오고 모두의 잔에 술이 채워졌을 때, 왕은 술잔을 들어올리게 하고는 길고 장황한 연설을 이어나갔다.
위가 스스로를 소화시키는 거 아닌가 걱정할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경험상 연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여러모로 나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옛날에 30분 동안 이어진 연설을 못 참고 음식을 먼저 먹었다가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적이 있다.
다행히 이곳의 왕은 그리 말을 많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10분 정도로 끝냈다는 말이다. 모든 말을 끝마치고 왕은 나를 바라보았다.
“용사님도 한마디 하시겠습니까?”
보통이라면 거절했겠지만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에는 이 만한 기회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식탁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 얼굴하나하나가 전부 어떤 자리를 가도 최고의 대우를 받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 왼쪽에는 나의 동료들. 근 십 년 동안 나와 행동을 같이 해준 자들.
이 정도면 나의 발언이 흔히 말하는 공신력(난 아직도 이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진실을 말하는 데에 진실을 전달하는 사람이 뭐가 중요하지?)이라는 것을 얻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용사 칼리만 리아쥬입니다. 오늘부로 용사에서 은퇴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건배.”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따라서 건배를 외치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이러는 걸까? 보통은 따라서 건배를 외쳤는데 말이다. 혹시 내 뒤에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나? 연회의 예절이 나라마다 달라서 고달프다. 지난번의 나라에서는 내가 마지막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옆에 앉은 동료에게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물어보려고 했을 때.
“#(!$*!#)%#!*%!#)#@*$%@$(!!!!”
수많은 소리가 섞인 괴성이 홀을 가득 채웠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뭐라고 고래고래 외쳤고, 음식과 음료들이 식탁 위를 날아다녔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왜 이러는 걸까?
…….
아, 혹시 이게 요즘 건배를 하는 새로운 방식인가? 큰일이다. 유행은 너무 빨리 변해서 따라가기 힘들다.
나도 유행에 따라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던지려고 했을 때, 내 왼쪽에 앉아있던 동료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멱살을 잡았다.
“야 임마! 너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술잔을 던지는 게 유행이라서 이러는 건 아닌가보다.
또 내가 뭘 잘못 한 거지? 도대체 이번엔 뭐지?
“뭐가?”
“은퇴라니,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론데? 은퇴하겠다고.”
“왜!”
“용사를 그만두고 싶으니까.”
“왜!”
“하기 싫어서.”
“왜!”
“지겨우니까.”
“왜!”
동료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동료가 납득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할 때, 멱살을 잡고 있는 동료 옆에 앉은 또 다른 동료가 멱살을 잡은 동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정도로 해둬라. 보닌. 윽박지른다고 의사소통이 되는 게 아니니까.”
“유스빈! 너도 들었잖아! 이 자식이 은퇴하겠다고 하잖아!”
혹시 이 소란 내가 은퇴하겠다고 해서 일어난 건가? 왜? 내가 은퇴하는게 이렇게 소란을 피울 일인가?
“보닌. 칼리만도 생각이 있다. 일단은 칼리만의 말을 들어.”
내 멱살을 잡은 동료. 그러니까 보닌 헤이스는 나와 또 다른 동료, 그러니까 유스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보닌의 표정을 봐서는 화가 난 게 분명한데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보닌은 화가 나면 일단 손찌검을 하는 성격인데 말이다.
“아, 저기, 용사님? 저기,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용사님이……은퇴하신다고요?”
내 오른쪽에 앉아있던 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보닌이 멱살을 잡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지 못 한 나는 말로서 왕의 의문을 해소시켜주려 했다. 그러나 유스빈이 먼저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소란을 일으켰군요. 지금 여기에 대해서는 확정된 것이 없으니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일단은 저희들끼리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자리를 뜨는 것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왕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그 입에서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한참을 뻐끔거리던 왕은 결국 말을 내뱉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닌, 칼리만을 놔줘. 지금은 이야기를 할 때다.”
보닌은 곧장 놓지 않았다. 대신 한참을 나를 노려보았다.
“보닌.”
유스빈이 다시 말하고 나서야 보닌은 나의 멱살을 놓았다. 그러나 노려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는 게 더 불안하다. 차라리 평소처럼 때렸으면 좋겠다. 보닌은 손이 먼저 나가기는 하지만 일단 때리고 나면 뒤끝은 없는 성격이니까. 저게 폭발할 때까지 전전긍긍할 바에는 몇 대 맞고 끝내는 게 낫지.
유스빈은 보닌을 잡아끌었다.
“따라와.”
보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마지못해 간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며 유스빈에게 끌려갔다.
일단은 이걸로 일단락이 되었다. 보닌이 아직 화를 풀지 못한 상태지만 유스빈이라면 보닌을 잘 달래겠지. 아니면 나중에 몇 대 맞아주면 되고.
지금은 밥이나 먹자.
허공을 날아다니는 불상사를 피한 음식을 내 앞으로 옮기고 거기에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도 다.”
유스빈이 다시 돌아왔다.
아, 나도 따라오라고 한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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