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처형자. 기동.
1년 전쟁 이후 각 콜로니 공사들은 콜로니마다 1개 소대 규모의 모빌슈트대를 편성하여 콜로니방어대로 주둔시켰다. 그것은 지구연방이 적극 권장하며 지원을 약속한 부분도 있지만 실상은 지구연방 스스로가 우주 공역에 대한 완전한 제해권의 상실을 인정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편으로 그러한 정책은 지구연방 정부에 있어 짭짤한 수익원이었다. 지구연방이 명목상으로 지배하는 애너하임사가 독점하다시피한 모빌슈트 시장에서 지구연방군은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모빌슈트 구매자들과 협상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애너하임은 적어도 대외적으로 오직 지구연방에게만 납품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구연방군에 있어 각 콜로니들은 구형 무기를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는 최고의 시장이었다. 그러한 사기극은 그리프스 전역 직후 정점을 이루었지만 부작용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전투에서 격추당해 사실상 작동불능이 된 기체를 새 기체로 포장해 파는가 하면은 실험기 단계에서 제작 중지가 된 프로토타입을 비싼 값에 팔아치우고 구형 병기를 싼 값에 팔면서 거기 딸린 퇴역 예정 연방군인을 용병으로 고용하라는 조건까지 걸어댔다. 처음에 콜로니들은 지구연방군에 순응해다. 그러나 지구연방군의 만행은 금새 발각됐고 이후 콜로니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콜로니 방위대를 꾸리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콜로니의 사람들이 구슬땀 흘려 일구어낸 재화를 지구연방군의 돼지들 손에 고스란히 바칠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시나프스 베이의 콜로니방위대도 그러한 방침 하에 꾸려져 있었다
"마리.."
쟈브로니 롤랜드는 파일럿 슈츠를 입은 채 격납고 너머로 보이는 반구형의 대지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스테이터스는 콜로니 공사의 직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가진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다. 늘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베풀던 이 사내는 평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과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직원 중 하나가 그의 변화를 눈치채고 말을 걸어왔다.
"몸이 좀 안 좋을 뿐입니다. 걱정 마세요."
쟈브로니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조금도 치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색한 미소는 보는 이의 걱정을 돋을 뿐이었다.
"과장님. 이번 건은 저희들에게 맡기시지요. 쉬고 계세요."
"아닙니다. 제가 하지요. 그보다 그 콜로니 거주구에 진입했다는 모빌슈트의 정체는 파악됐습니까?"
"몇 번 무전을 넣었는데 도통 답이 없답니다."
"식별신호는?"
"연방군입니다. 아마 뭔가 특별한 훈련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느낌이 드는군요. 아시다시피 우리 콜로니엔 연방군 연구시설이 있었잖아요."
"그럴 듯 하군요."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입전도 없이 무대포로 콜로니에 진입하다니 이번 건은 좀 심했어요. 충분히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정도죠."
직원은 투덜거리며 뒤돌아섰다. 쟈브로니는 그에게 평소의 넉넉한 미소를 던지며 굽혔던 허리를 쭉 폈다.
"그렇다면 좋겠군요."
그는 자신의 위에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며 서 있는 모빌슈트를 응시했다. 높게 솟아오른 뿔. 붉게 번득이는 모노아이. 하이자쿠.
"요즘 모빌슈트 상대로 이 녀석으론 버거우니까요."
***
밖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에 갇히다 시피 리된 마리와 로이드에게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멈추지 않는 사이렌 소리는 그들에게 충분한 불안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마리는 걱정스런 얼굴로 안절부절 방안을 서성였다. 그에 반해 로이드는 평상시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벽에 팔짱을 낀채 기대고 서 있었다.
"로이드!"
마리가 소리쳤다.
"왜?"
로이드는 짜증이 섞인 얼굴로 마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마리의 표정이 진짜인 걸 알고는 이내 부드러운 얼굴로 풀며 팔짱을 풀고 똑바로 일어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고!"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얼핏 본 바로는.."
"바로는..?"
그때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도어가 열렸다.
"에리카 중위님!"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에리카 스타이너. 마리는 그녀를 보자말자 그녀에게 다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네? 전쟁? 전쟁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일단. 진정해. 마리. 훌륭한 군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황하거나 흥분해서는 안 되는 법이거든."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
말을 하는 도중 에리카는 힐끗 로이드 쪽을 응시했다. 로이드는 어느새 다시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쿨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흠.. 쟤는 원래 저런 성격일까? 침착하다고 해야 하나 무신경하다고 해야 하나..'
한편 그 말을 들은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약간은 텐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에 에리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놀라지마. 마리. 정체불명의 모빌슈트 3기가 콜로니에 돌입했어."
"뭐라고요?"
"하지만 걱정 하지마. 콜로니수비대의 모빌슈트 그리고 이 배의 모빌슈트도 움직일 테니까."
"저기.. 우리.. 우리 집은 괜찮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모빌슈트는 콜로니 시가지에 모여 있거든. 마리네 집은 교외 아니었니?"
"네.. 그렇지만."
"게다가 알려지기로 그 모빌슈트의 식별패턴은 연방군이야. 아마 어떤 훈련 때문에 온 것 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는 게 좋아."
"지구연방군요? 하아.. 난 또 뭐라고. 그런데 중위님도 지구연방군 아닌가요? 왜 같은 지구연방군끼리 서로 일을 모를 수 있는 거죠?"
"지구연방군 정도 거대한 조직은 지휘체계가 상당히 복잡해. 계급의 높낮이는 분명히 있지만 가끔 지휘권이 충돌되는 일이 종종 있지. 아무튼. 일단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콜로니보다는 여기가 안전할 거구 일단상황이 종료되면 부르러 갈 테니까."
에리카는 그렇게 말한 후 방을 나섰다. 그때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저기 화장실은 어떻게 하죠?"
"화장실?"
"아까처럼 문을 잠그시면 갈 수가 없잖아요. 나야 뭐 이 녀석이 보든 말든 아무 때나 보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말한 후 로이드는 마리 쪽을 힐끗 봤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마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야? 이 로이드! 이.. 이 변태가...!"
"흠. 그래? 그럼 일단 문은 잠그지 않을게. 화장실은 복도 건너 오른쪽 꺾으면 있어."
"감사합니다. 중위님."
처음으로 로이드가 보내는 감사의 표시였다.
"하지만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면 안 돼. 전투상황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마리와 로이드는 각각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다시금 적막이 실내를 감쌌다.
"저기 마리."
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왜? 로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흠. 로이. 너 쉬야 하고 싶었구나! 진지한 척 하더니 사실은 오줌이 마려워서 견딜 수 없었던 거 아냐?"
"시끄러."
로이드는 인상을 쓰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마리는 로이의 귓볼이 붉게 물든 걸 포착했다.
"어휴. 이래서 남자는 언제까지나 애라니까."
홀로 남은 마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비스권외.
"아... 대체 여기서 뭐하라는 건지. 하지만 에리카 중위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별 일 없을 거야."
그것은 마리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인지도 몰랐다.
"아마도."
***
그곳은 어둠에 반쯤 잠긴 고즈넉한 방이었다. 방을 완전한 어둠에 잠기는 것을 저지한 것은 중앙에 자리 잡은 꺼져가는 벽난로의 불씨였다. 한 사내가 집게로 벽난로의 잿더미속을 휘젓자 불길은 미약하게 되살아났다. 그 남자는 벽난로 옆에 가지런히 쌓인 장작 하나를 집게로 집어 난로의 잿더미 속에 잘 갈무리하며 장작에 불이 붙기를 기다렸다. 그 옆엔 또 다른 사나이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쥔 글라스에 진한 향기가 풍기는 위스키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헬리우스 포론 놈이 결국 먼저 움직였군. 그나저나 녀석은 대체 어떻게 우리들의 정보를 얻은 것일까? 20년간 연방의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우리들을 말이야."
집게를 든 사나이는 말없이 장작을 집어넣고 불을 붙이는 작업을 계속했다.
"좀처럼 불이 붙질 않는군. 이걸 써보지 그래?"
글라스를 든 사내가 잔을 건넸다.
"로나블루인 28년산 같은 미주를 고작 장작에 불을 붙이는 용도로 쓸 순 없지."
진중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설득력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 드디어 입을 열었군. 중장 나으리. 입을 연 김에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높으신 견해를 구하고 싶네만?"
"높으신 견해라니. 당치도 않군. 정치적 안목은 나 같은 군인보단 자네 같은 정치가가 더 잘 알지 않나? 의원?"
"글쎄. 나야 시험하고 말싸움엔 소질이 있지만 소위 말하는 동물적 감각은 영 허당이라서 말이야."
의원이라 불린 자는 글라스를 기울여 안의 미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뱃속에서 올라오는 취기가 기분 좋게 위로 올라오는 걸 느끼며 의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첩보에 의하면 헬리오스 놈에 동조하는 세력이 꽤 많더군. 같이 쿠데타 놀이에 참석한 놈들은 소수지만 암묵적으로 녀석을 방조하거나 원호하는 놈들이 매우 많아. 다카르가 그렇게 쉽게 녀석들 손에 제압된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 이거지."
그의 말에 중장이라 불린 사나이는 집게를 내려놓고 벽장 위에 비치된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의원이 그에게 술병과 함께 얼음 통을 내밀었다.
"고맙네. 친구."
중장은 글라스에 얼음을 담은 후 술을 반분 따라 잘 휘저었다. 달그락 하며 얼음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게 실내에 울려 퍼졌다. 중장은 차갑게 식힌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샤아 동란은 겉으로 어스노이드와 스페이스노이드간의 해묵은 감정을 청산하는 어떤 계기로 보였지."
"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지. 반전 단체에서 특히. 멍청한 놈들. 지들이 설치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걸 왜 모르지?"
"하지만 샤아가 지구를 멸하려 한 건 사실이야."
"살리려 한 거 아닌가? 지구를?"
"용어의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겠군. 내가 말하는 지구는 지구 위에 사는 인간들과 그들의 재산을 말하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동물이니까.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군."
"하여간 샤아의 액시즈 낙하 시도는 지구인들, 소위 어스노이드들이 애써 잊으려 하던 악몽을 떠올렸지. 바로 공포라는 치유하기 힘든 상흔을 말이야."
"공포라..."
"공포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 문제는 그 방법이야. 어떻게 뇌리에 심어진 공포를 몰아낼 수 있을까? 수천 수만가지의 방법이 있겠지. 마치 그 일이 없었던 일인양 잊어버릴 수도 있고 필사적으로 그 공포와 싸워 극복하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제일 명쾌한 방법은 하나 뿐이야. 자네도 배웠지 않나? 총수의 가르침을."
"공포가 문제라면 공포의 원인을 멸하라. 그럼 공포도 소급해서 사라질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아마 이런 취지였던 것 같은데?"
"어스노이드들의 공포는 전례 없이 극에 달했어. 비록 네오지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주엔 언제든지 잠재적인 지온이 될 가능성이 있는 수십 억의 스페이스 노이드들이 버티고 있고 그리고 지구 주변엔 엑시즈를 대신할만한 커다란 운석도 널려 있지."
"흥미로운 가설이군. 공포라. 그리고 그 공포를 지우려는 어스노이드들."
의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방법은 전례 없이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나겠지.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니까."
중장은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방 한 켠 어둠 속에 잠겨있던 거대한 모니터가 켜지며 한 영상을 송출했다. 그것은 모빌슈트에서 내려다 본 어떤 거리의 전경이었다.
"호오... 이것은?"
의원이 물었다.
"이게 바쁘기 그지없는 의원님을 부른 이유이지."
"콜로니 내부군. 그런데 화질이 썩 좋지는 않군."
"실시간 송출이니까. 잘 보게. 헬리오스 포론이란 사내의 방식을."
중장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화면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