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할망구가 뭐라는 거야? 나도 모르게 눈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일레나 중위는 나의 눈을 피하더니 일어나서 책장으로 걸어갔다. 갈색 책장 앞에 서자 그녀의 금발이 더 두드러져 보였다. 이 와중에도 그런 게 눈에 띄다니. 그녀는 그 금발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기고는 ‘참전 용사의 정신 치료’라고 적힌 책 한권을 집었다.
“자넬 고쳐줄 수 있어. 그 점에 있어서는 나를 믿어도 되네. 난 수십 년 동안 정신과 치료만 해온 사람이니까.”
나도 기자 생활 수십 년 했는데, 신문에선 당신같이 말하는 의사들을 돌팔이라고 부른다고.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여기에는 아무런 장비가 없어. 검사 도구도, 실험용 흰쥐도 없지. 자네 말을 믿지만, 그걸 검증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해.”
“시뮬레이터를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 기술이라면...”
그녀는 말없이 책을 펼쳐 페이지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가 말하지 못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일개 병사일 뿐이라는 것... 일개 병사에게 그런 호사스러운 기회가 주어질리 없는 것이다.
“...데이터를 수집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 서너 번의 전투면 충분할 거야.”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일레나 중위는 조금 밝게 말했다. 그녀의 무책임함에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장교이고, 나는 일개 병사일 뿐이었기에 고개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의 통증이 심리적인 이유라면 통상 과거 기억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 검토해보게 되어있어.”
확신을 주려는 듯 그녀는 아까와 달리 단호하게 사실들을 읊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이대로 입실을 허가한다 해도 확정 증상 없이는 일주일이 고작이야. 그 안에 무언가 찾지 못하면 오히려 같은 증상으로 다시 진찰받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길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지만 알게 되면 그땐 너무 늦습니다.”
속 편한 소리에 부아가 치민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앞마당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몇 광년 거리를 산책 다녀오듯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아니, 늦지 않아.”
일레나 중위도 기분이 상한 듯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다 방법이 있어. 나와 논쟁해보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아...아닙니다.”
어떠한 묘책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이번에 입실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진 이상 더 이상의 논쟁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소파에서 조용히 일어나 그녀를 외면한 채로 나갈 준비를 했다.
울화가 치밀었다. 이것만 바라보고 버텨왔는데...
그 때, 등 뒤에서 그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뇌 도우미 연동시켜 봐”
연동 모드를 켜자, 일레나 중위의 이름으로 대화 채널이 생성되었다는 알림이 생겼다. 이런 대화 채널은 처음 봤는데?
“장교 권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밀 대화 채널이야. 앞으로 상담은 이 채널을 통해 하도록 하지. 전투 지역에 파견 되어서도 계속 유지될 테니까 통신 걱정은 할 필요 없고, 무슨 이야기든지 다 해도 돼. 작업만 걸지 말도록, 그런 거 아주 싫어하니까.”
바로 눈앞에서 선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정녕 내 문제를 해결해주려나? 아니면 내 죽을 곳으로 안내해 주려나?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억지 미소를 띈 채 경례를 붙이고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조원들과 잡담을 나누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피곤과 절망이 내 어깨를 내리 누르며 나를 지치게 하는데, 하나 믿고 있던 회심의 카드마저 내 손을 떠나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전장에 투입된다면 비참하게 죽거나 살더라도 아드레날린 과다 투여로 폐인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지. 아드레날린도 그나마 동료들이 안 쓰던 보급품을 얻어 온 것이었기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비참한 죽음이 현재 나의 유일한 선택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뇌 도우미를 켜서 이것저것 건드려보다 입대 직전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채 일자로 입술을 다물고 있는 무념무상의 노인. 몇 년 전 영정사진으로 쓰려고 찍었던 것이다.
바라는 것 없이, 관심 가지는 것 없이 그저 주위가 고요하기만을 바라는 생기 없는 눈이 렌즈 너머로 지금의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 흉한 몰골이었던가.
그 위로 갑작스럽게 메시지 알림이 떴다. 메시지는 총 두 개였다.
[ 오락구역 갑판 청소부에게 ‘약사’에 대해 물어보도록 ]
[ 80살에 어떻게 입대할 수 있었지? 그리고 왜 그 전 10년 동안의 기록이 잠겨있는지 보고하도록 ]
무슨 말이야? ‘약사’는 뭐고 10년의 기록은 또 뭐지?
문득, 입대 전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잘라낸 것처럼, 그 전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뇌 도우미를 뒤져보아도 70세 이후의 사진은 초라한 증명사진 한 장, 오직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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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단한 자기소개 & 10년의 기록 막힌 이유 – 오늘 내로 정리해서 보낼 것
2. 교육 때 들러서 ‘물건’ 수령해 갈 것 ]
의무관의 아침인사 메시지는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내게 닥친 첫 번째 안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벌써부터 내 주치의가 된 듯 나서고 있었다. 항 우울제라도 과다 복용한 건지 한층 높아진 톤의 비슷한 메시지들이 지치지도 않고 귓가를 때렸다. 자기소개라. 어젯밤의 길고 긴 회상들 사이에 어느 부분인가는 지난날의 기억이었고, 이를 말로 옮기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옮기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나는 우선 얼버무리며 메시지 창을 닫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아침을 먹으러 나섰다.
조사관이 나타난 건 그보다 더 안 좋은 일이었다.
“아, 한참 찾았네. 여기 있었구만.”
오랜만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식사에만 집중하느라 그가 옆 자리에 앉는 것을 알아챘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언제 옆에 앉은 거지?
“...저 조사관님, 저희가 오늘 조사를 받게 되는 겁니까?”
“아, 아냐. 그냥 얼굴만 보려고 온 거야. 다른 친구들은 방금 보고 왔거든.”
그에게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상한 무언가가 있었다. 차분하게 앉아 웃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사람을 대하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가게에 와서 예약해둔 물건에 흠집이 있는지 없는지 미리 살펴보러 온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 박 상병이라고 했지? 내일 조원들과 잠시 들러서 문답만 조금 하고 가.”
그는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거지?
“큰 사고를 겪어서 혹시 문제가 있나 보러 온 건데 다행이구만. 그럼, 교육 잘 받고 내일 보자고.”
조사관은 묘한 불쾌감을 남기며 사라졌다.
- 글을 좀더 빨리 써야 이야기가 진행이 될 텐데... 자꾸 사소한 부분에서 안써지네요. 이거 이야기 언제 전개하지...
기존 소설을 따라 써보면 좀 나아지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