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이바의 두 남녀
새벽부터 시작 된 코미케 준비가 서서히 끝나가는 오다이바의 빅사이트. 총 1500개의 부스 중 타카하시는 가장 중앙 쪽의 30개 부스를 할당 받았다. 지난 코미케 때, 만 여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사고를 우려한 주최 측에 의해 동인회를 중지해야 했던 타카하시로서는 이번 코미케를 통해 더 많은 팬들에게 자신의 작품과 이미지를 전달 하겠다는 의지에 타오르고 있었다.
타카하시가 하루 종일 앉아서 사인을 해주게 될 테이블을 점검하고 있는데 뒤에서 야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타카하시씨-!”
“아, 야노씨 일찍 왔군요……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오늘 스탭 중 한 명이 불참하게 돼서 임시로 일하게 된 이경민씨라고 합니다”
타카하시 자신이 그린 작품 중의 캐릭터로 멋지게 코스프레한 사람이라 팬 중 하나이겠거니 했는데, 그것이 어제 매몰차게 거절했던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니, 타카하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민을 가까이에서 쳐다 보았다.
“아니, 여기서 뭐 하는 거에요?”
“보면 모르십니까 스탭입니다! 스탭!”
경민은 웃으며 당돌하게 받아 쳤다. 캐릭터로 분장한 옷치레가 여간 요란한 게 아니어서, 처음에는 스스로도 쑥스러웠지만 이미 새벽부터 이미지 트레이닝을 수도 없이 한 탓에 아무렇지도 않게 된 터였다.
“아니 무슨…… 당신 같은 사람이 코미케의 스탭을 한다고, 게다가 스탭 복장도 갖추지 않고…… 물론 그 캐릭터 코스는 최고지만……”
스탭 유니폼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핀잔을 주려던 타카하시였지만 캐릭터 코스가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말미에 가서는 말을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길을 가다가도 자신의 작품에 관련 된 것만 보면 흐뭇해 하고 즐거워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는 냉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경민의 캐릭터 복장을 보면 전혀 냉정하게 대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코미케에 대해 잘 모르실 테니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타카하시 선생님!”
경민은 이제 아주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버렸다. 타카하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이라는 전혀 생소한 나라에서 온 일반적인 대기업의 비즈니스맨이 갑자기 이런 냄새나고 정신 없는 동인 행사에 참가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상상외였던 것이다.
‘아니지, 이 남자가 코미케가 좋아서 이러겠어? 단지 내 그림을 쓰고 싶으니까 이러는 거지 신경 쓰지 말자’
이윽고 10시가 넘어 수 많은 인파가 전시회장으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 왔다. 첫 번째 인파의 대부분은 중앙의 타카하시가 열고 있는 부스 쪽으로 몰렸고 타카하시는 일단 자리에 앉아서 사인을 해주기 시작하면서 경민에 대한 일은 잊고 눈 앞의 팬들에게 몰두 했다.
경민은 한쪽 면에 서서 인파의 정리와 동인지의 수납 및 배포를 맡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타카하시의 팬들이 훨씬 많아 적잖이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타카하시의 인기는 경민이 생각하던 것 이상이어서 타카하시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 늘어선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타카하시는 벌써 4시간 이상 화장실도 가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경민도 팬들을 관리하면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타카하시의 지치지 않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대단한 체력이군’
보통 여자라면 벌써 힘든 기색을 하거나 쉬겠다고 할 법도 한데, 그녀는 사인회를 시작할 때의 명랑하고 밝은 표정에서 변화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경민은 단지 귀엽다고 생각하던 것이 이제는 왠지 모를 경외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프로인가……’
오후 6시, 코미케가 마감 되고 뒷정리가 끝난 뒤 경민은 잠시 행사장을 나와 오다이바의 해변에 서서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처음엔 타카하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키바에 가서 코스프레 복장을 사고, 야노를 불러 스탭의 일원으로 참여케 해달라고 일을 꾸몄던 것이지만, 하루 종일 코미케 현장의 분위기와 무엇보다 타카하시 그녀의 열정에 압도 되어 비즈니스 때문에 그녀에게 자신의 가공 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솔직하게 나갈 수 밖에 없는 건 前世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나 보군’
前世에 경민은 중요한 비즈니스나 교섭에 임해서 기업의 이윤에 따라 어느 정도 포장을 해주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대처해 버리는 바람에 큰 건을 날려 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사실 그런 일 때문에 고과 평가에서 실격하여 승진이 늦어져 버린 적도 있었고, 지금의 세계에서는 국제그룹이라는 대기업의 일원으로 몇 년간 충실하게 비즈니스맨으로 단련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코미케라는 분위기와 타카하시 그녀가 내뿜는 열정이 결합 되어 자신이 지금 수행하려고 하는 비즈니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거기서 뭐해요?”
경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놀랍게도 타카하시가 자신을 향해 걸어 오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 뒤풀이 인사로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봐요, 그 선생님 소리 뺄 수 없어요? 당신한테 들으니까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니 깐”
“그래도, 코미케에 참여한 이상 업계의 룰은 지켜야지요”
타카하시가 경민의 말을 듣자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는다.
“호호호…… 사실 팬이라면 그렇게 불러 주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당신은 원래 마도카의 팬이라기 보다는 비즈니스 때문에 날 찾아 온 거잖아요? 게다가, 업계에서도 그렇게 불러 주는 건 직접 작품에 참여 했을 때의 이야기죠. 나는 아직 당신이 이야기한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참여해 주실 걸로 믿고 있거든요”
경민의 당돌한 대답에 타카하시가 다시 한번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니 경민도 속으로 안도의 생각이 들었다. 어제보다는 훨씬 좋게 보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타카하시가 웃음을 멈추고 경민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 캐릭터 코스츔의 머리 부분에 있는 더듬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캐릭터는 머리카락으로 뻗친 긴 더듬이가 특징이었는데 하루 종일 일하다 보니 몇 가닥이 제대로 서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런, 이 캐릭터는 더듬이가 포인트에요 이게 죽어 있으면 의미 없는 건데”
타카하시는 까치발을 하고 경민의 머리 결에서 솟아 나와 있는 더듬이들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타카하시가 키가 작았던 탓에 경민의 가슴께에 그녀의 얼굴이 거의 밀착 되었고 경민은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향수 냄새인가 했는데, 화학적인 특정 향내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습하고 냄새 나는 코미케에서 활동하고도 이런 체취를 지니고 있다는 건 향수를 쓰지 않고도 소녀 시절에 발산하는 풋풋함을 아직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제 좀 그럴 듯 하네”
그녀는 더듬이의 모양을 확인하려고 경민의 가슴께 에서 떨어져서 가지런히 정돈 된 모양을 이리저리 쳐다 보았다. 경민은 갑자기 그녀가 지금의 모습에서 뭔가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카하시씨!”
“네?”
갑작스럽게 경민이 진지한 얼굴로 불렀기 때문에 타카하시가 놀라서 반문했다.
“그 안경을 좀 벗어 봐 주세요”
“네? 안경을요?”
타카하시가 안경테를 잡고 망설였다.
“경민씨, 이 안경은 내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계속 써온 안경이에요. 평상시에 남에게 벗어서 보여주는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한번만 벗어 봐 주세요. 부탁입니다”
타카하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안경을 벗었다. 놀랄 만큼 귀엽고 순수해 보이는 얼굴이 나타났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순수하다 못해 청순함으로 가득 차 보였다. 누가 봤다면 요란한 코스플레이어와 순진 무구한 아가씨가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이 바다노을과 절묘하게 매치 된 앵글로 생각했겠지만, 사실 이 둘은 어제 처음 만났을 뿐이다. 그것도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만났지만 지금의 장면은 비즈니스와는 거리가 먼 것 이었다.
타카하시가 이윽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다시 쓰려고 하는 순간, 경민이 그녀의 안경 든 손을 낚아챘다.
“왜, 왜 그래요?”
“안경을 아직 쓰지 말아요. 안경을 통하지 않고 당신의 눈을 보고 싶어요”
“아니 대체…...”
타카하시가 약간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경민에게 뭔가 말하려는 순간, 경민의 말이 이어졌다.
“이 안경 도수가 거의 없지요? 쓰지 않아도 될 안경을 왜 쓰고 있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의 눈을 보니까 왠지 알 것 같군요”
경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타카하시가 경민의 손을 뿌리치고 안경을 썼다.
“어제 날 막 봤을 뿐인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거에요? 그것보다 당신은 그 게임 제작에 내가 참여하도록 하는 게 목적 아닌가요? 이렇게 일과 상관 없는 이야기만 하다가 여기 온 목적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나요?”
“비즈니스라고 생각해서 중요하게 여겨 왔지만 오늘 코미케나 타카하시씨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지요. 물론, 일은 같이 하고 싶지만요. 그것보다도 당신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경민의 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서 타카하시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후 업계에서는 쭈욱 안경을 쓰고 활동해 왔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이 업계에서는 작품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 전에 사건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안경을 쓰고 업계에 진출하기까지 인과 부분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남자가 어떻게…… 더구나 외국인이면서’
타카하시는 그것이 궁금했다.
“경민씨, 당신은 왜 그 게임을 만들려는 거지요?”
화제를 돌릴 겸, 처음으로 경민에 대한 궁금함이 더해져 만들려고 하는 게임으로 주제가 옮겨 갔다.
“한국은 컨슈머 시장이 죽어 가고 있어요. 그걸 살리고 싶은 겁니다”
“그 게임을 만들면 한국의 컨슈머 시장이라는 것이 바뀌나요?”
“이 게임으로 매출이 획기적으로 많이 나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시장이란 건 언제나 선행하는 어떤 모티브에 의해 후속 트렌드가 따라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 키 포인트를 만드려는거죠”
“마치, 자사의 이익 같은 건 관심도 없다는 투로군요”
“네 맞아요”
“뭐라고요?”
경민의 말하는 투가 비즈니스 하는 사람답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핀잔 투로 말해본 것인데 너무나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 왔기 때문에 타카하시는 잠시 넋을 잃었다.
“아니, 경민씨 그럼 당신은 회사의 이익에 상관 없이 대체 무얼 위해 일하는 거에요? 남들처럼 회사의 이익에 기여하고 승진하고 월급을 올리고 이런게 아니라면 당신은 왜 그런 대기업에 다녀요?”
“물론,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지금 소속 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제가 항상 생각하는 게 회사의 이익은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 어려운 사람이군요. 당신은……”
타카하시는 잠시 경민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제 봤을 때는 선입견이어서 그랬는지 게임이나 크리에이티브하고는 담 쌓은 회사원이 와서 조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시해 버렸는데, 사실 내 주고 간 시나리오나 아트 컨셉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슈팅게임에 자신이 장기로 내세우는 미소녀 캐릭터를 메인으로 등장 시킨다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경민씨, 이 게임에 내가 참여하게 되면 회사의 이익은 둘째 치고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요. 한국에서의 판매량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반향이 되어서 일본에 역수출 하는 수준까지 해줬으면 해요”
“그 정도는 해야 타카하시 선생님의 이름에 먹칠이 안가지요”
경민은 그렇게 대답하고 재치 있는 표정으로 타카하시에게 경례를 붙였다. 경민이 타카하시에게 한 경례 동작은 그가 코스츔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니메에서 사용하는 결정포즈의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에 타카하시는 미소를 지으며 똑 같은 포즈의 경례로 화답해 보였다.
석양을 등지고 요란한 코스플레이어와 청순해 보이는 안경녀가 서로 거수 경례를 하고 있는 이 장면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무리 작업을 마친 스탭들이 쳐다 보고 있었고, 그 안에는 야노도 있었다.
‘정말 대단한 친구로군’
이제까지 몇 번인가 미수의 소개로 한국 업자들에게 줄을 대줬지만 대부분 문화적 차이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인해 비즈니스로 성사 되진 못했는데, 그렇게 경륜도 많아 보이지 않는 한국의 청년이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일본의 메이저 업체도 컨택을 어려워하는 동인계의 여왕 타카하시 마도카를 제작에 참여 시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었다.
‘재미 있는 게 하나 나올려나……’
오다이바에 운집한 수 많은 젊은이 들의 열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태평양의 바다 노을이 한층 더 붉어지고 있었다.
계속 연재를 부탁합니다.
이번화에는 응응씬이 없어서 충격;;;
멋진 이야기로 끝나네요. ^^
기업판 미연시!! ㅋ 재밌네요~
얼핏보면 '코믹파티'처럼 동인계 종사자들의 모습에 접근하면서도 조금은 이질적인 주인공의 설정이 돋보이는군요. 갑작스런 베드씬으로 접근한 1화에 비해 보다 장면의 본질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향수 냄새인가 했는데, 화학적인 특정 향내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습하고 냄새 나는 코미케에서 활동하고도 이런 체취를 지니고 있다는 건 향수를 쓰지 않고도 소녀 시절에 발산하는 풋풋함을 아직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ㅋㅋㅋㅋ 덕후덕후덕후
연재 속도가 장난 아니네요. -.-;;
ㅎㅎㅎㅎ 난감
뭔가..글이 너무 많아서 스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