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법한 재질의 모자가 달린 웃옷과 파란색 바지를 입은 여자를 봤을때 파수대 수장인 록스는 불길한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족히 사나흘쯤 감지 않은듯 떡지고 흐트러진 금발과 인간 기준에서도 평범에서 살짝 딸리는 얼굴은 아무리 훌륭한 품성을 지닌 엘프라 한들 뭔가 꺼림칙하게 만들것이다.
일단 파수대의 임무는 마쳐야 하는지라. 록스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여자의 앞에 도달했다.
"인간이여,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록스에게 마구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지나가는 중이오"
확실히 왕국에서 내려진 통행권 이었다. 기한은 일주일 이었고, 정확히 오늘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끝나는 것이었다. 이 여자를 내쫒을수 없다는 것에 록스는 내심 아쉬워했다.
"언제까지 묵을 생각입니까?"
"하루"
"통행기한은 오늘로 끝납니다."
"여기서 냈으면 됐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소."
사실이었다. 통행권은 말 지나갈 권한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숲의 마을에서 며칠을 묵던 록스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여자를 내쫒고 싶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지나가도 되겠소?"
록스는 길을 비켜주며 말했다.
"문제 일으키지 마세요."
여자는 록스에게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손을 짧게 흔든뒤 숲길을 걸어 갔다.
검은 피부를 지닌 엘프소년은 숲의 어둠속에서 불을 피워 쬐고 있었다. 다른 어른들은 불을 피우는 행위가 저 숲 바깥의 인간들이나 하는 미개한 행위라 하며, 소년을 꾸짖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소년은 불을 피우는 것을 아주 사랑했다. 인간들에게 얻은 성냥으로 작은 불을 피우고 숲의 잔해를 먹이삼아 커가는 광경, 그 과정에서 나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연기의 탄내는 소년에게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어째서 어른들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소년의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소년은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금발의 못생긴 인간 여자가 서 있었다.
"위험한 장난 치는걸 좋아하는구나?"
인간들은 불을 피우는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소년은 불을 끌 필요가 없다는것에 안심하며 작은 모닥불 앞에 걸터 앉았다.
"어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겁쟁이 들이니까."
"무슨 뜻인가요?"
"엘프는 나무가 불타는 것을 즐길수없는 겁쟁이 들이지,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해"
"뭘 좀 아시네요."
소년은 못생긴 인간 여자에게 자신의 기행에 대한 공감을 듣게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닥불은 조금씩 꺼져가고 있었고, 소년은 더이상 불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에 우울함을 느꼈다.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것 까지 지켜보고 가겠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갑자기 일어선 여자가 품 속에서 투명한 병을 꺼내는것에 기겁했다.
여자는 병을 열더니 주저없이 병 속의 액체를 불씨 위에 들이부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소년은 여자를 때려눕혀서라도 그만두게 하려 했지만 액체는 이미 불 위에 떨어진 뒤였다.
소년이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불씨위에 떨어진 액체에 불이 꺼지기는 커녕 좀 더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갑작스레 살아난 불꽃에 눈이 고정되어 버렸다. 소년은 여자에게 물었다.
"그거... 그건 뭔가요? 어떻게..."
여자는 소년의 손에 투명한 병을 쥐어주었다. 소년은 이런 추녀가 자신에게 손을 대는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들에게 너의 예술을 보여주는건 어떻겠니?"
여자는 소년의 귀에 속삭였다.
"숲을 모조리 태워버려라"
소년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서 생각했다. 이 숲 전체가 타오르는 것을 본다면 어른들은 거대한 예술작품을 보며, 소년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소년에게 병을 쥐어주고는 숲의 덤불을 헤치며 사라지려 했다.
소년은 여자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금전과 같이 이유따위는없었다. 소년은 병의 뚜껑을 열어 거꾸로 뒤집었다. 병 속의 액체는 끝도없이 흘러나왔다. 액체는 고정되기라도 한듯 전혀 줄지 않았다.
소년은 품 속에서 여행가에게 얻은 성냥을 꺼냈고 액체가 떨어진곳에 던졌다.
아까와 같이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소년은 여자의 뒤를 따라가며 액체를 바닥에 끼얹고 불붙은 성냥을 던졌다.
불은 활활 타올랐다.
숲을 모조리 먹어 치우려는 것처럼.
잿더미가 되버린 숲에서 살아남은 엘프들을 맞이한것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왕국은 이미 망해버린지 한달은 넘었던 것이다.
록스는 자신이 통과시킨 마지막 통행자를 기억해내고는 불타버린 숲 위에서 울부짖었다.
허리춤에 소나무를 손잡이에 댄 두자루의 아름다운 총을 지닌 여자는 가죽으로 된 망토를 두르고서 황야를 걷고있었다. 다소 날카로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왕국의 가장 고귀한 신분이었으나, 어느날 한 마법사에 의해 그의 조국은 멸망해버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쳐 자살해 버렸고 동생은 행방불명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마법사를 쫒고 있었다.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 뿐만 아니라 마법사의 뒤에 있는 강대한 무언가를 처치하기 위해 황야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가 황야를 걸어가던중 처음으로 발견한것은 황야의 옛 폐허에 쓰러져있는 엘프 남자였다. 황야에 엘프라는 것들이 있었던가? 엘프들은 모두 숲에서 산다. 엘프가 모래먼지 가득한 황야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쓰러진 엘프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꽤나 심한 열이었다. 아마도 나무없는 황야의 추위에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는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 폐허의 잔해 사이에 모닥불을 피운 그녀는 엘프를 옆에 눕혀놓았다. 최근에 한번 불타버린듯한 자국이 가득한 폐허였다. 벽이 온통 검게 타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을 한번 더 태운것처럼.....
엘프가 눈을 떴다. 그가 일어나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디로 가는거죠?"
"최후의 총잡이 지부"
그녀는 마지막 남은 성스러운 총잡이의 지부가 있는 도시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고귀한 신분으로서, 흩어진 성스러운 총잡이들을 끌어모으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무기고를 이용한다면 도움이 될 뿐더러 왕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것이다. 엘프남자는 그녀에게 꽤 두둑한 돈자루를 보여주며 말했다.
"혹시 남은 가죽망토가 있으면 팔아줘요. 그리고 따라가게 해주세요"
"망토는 그렇다 치겠다. 그런데 나는 왜 따라오려는거지?"
그녀는 남자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남자는 눈은 복수심에 가득 차있었다.
"당신이 그쪽으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이니까요."
"엘프들은 숲속에서 살지 않던가? 굳이 황무지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남자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을 말하려 하는듯 했다. 한참동안 그녀 앞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는 입을 열었다.
"엘프가 숲을 불태웠어요. 그녀석을 찾으려는 겁니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숲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종족이 숲을 태운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한마디 하려 했지만 남자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외부에서 버려진 검은 엘프를 키워줬어요. 애비애미 없는 천애고아라 불쌍해 거줘주었더니 이런식으로 뒤통수를 치더군요."
"그 녀석을 데려가 재판을 받게 하려는건가?"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젓더니 말했다.
"그놈 모가지를 분질러 버릴거에요."
여인은 등에 지워두었던 짐짝을 한참 뒤지더니 두꺼운 털가죽으로 된 망토를 엘프에게 건네었다. 털가죽을 건네 받은 엘프는 그것을 몸에 두르고는 여인에게 돈주머니를 건네려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여인은 남자에게 충고했다.
"다음부터는 아무한테나 돈을 건네려 하지마, 바로 목이 날아갈수도 있으니. 망토를 두르고 자는게 좋을거다. 밤의 황야는 숲과 달리 추울테니 말이야. 내일 여섯시간쯤 걸어야 할거다. 그러니 지금 자두는게 좋을거야."
엘프는 털가죽 망토를 몸에 두르더니 여인에게 의문을 표했다.
"의심하지 않는건가요? 보통 황야에 누가 쓰러져 있으면 짐을 털어가는게 정상 아니에요?"
"엘프와 왕국은 옛날부터 동맹 관계였지,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아. 비록 멸망해 버렸지만 너는 남은 왕국의 일원에게는 여전히 동맹이다. 특히 왕국의 가장 고귀한 신분이라면 더더욱 그럴테지"
"..... 공주님?"
"이젠 왕국의 부활을 꿈꾸는 반란군일 뿐이다. 넘쳐나는 쓰레기들중 하나지. 자격이 있다는건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출발할거다. 힘든 여정이 되겠지,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충분히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망토를 뒤집어쓰고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남자는 털가죽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이 흘렀다.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옛 숲의 향기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래된것처럼, 불타버린 잿더미의 냄새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소름끼치는 연기를 풍기는 모닥불에 가까이 붙어 잠들었다.
도시의 영주는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때문이었는데, 처음에는 엘프의 숲 이 시작이었다. 숲이 불타고, 도시주변의 마을들이 무차별적인 방화에 의해 잿더미가 되가고 있었다.
마을의 피난민들은 멸망한 왕국의 수도대신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고, 도시는 피난민들을 감당할만한 여력이 없었다.불과 두달전에 왕국은 멸망해버렸고 도시에 들어오는 왕국의 지원은 사라졌다.
왕국에서 온 성스러운 총잡이들이 도시에서 치안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도시는 진작에 아수라장이 됐을것이다.
치마가 유독 짧은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영주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도시 근방의 마을이 미친 방화광에 의해 재가 되버렸고, 겨우도망친 피난민들이 도시에 머물기를 간청하는 편지였다.
영주는 머리를 감싸며 저속한 말을 뱉었다.
"좆같군"
메이드는 영주의 저속한 발언에 주의를 주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도시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피난민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 노동자로 쓸 수 없는 피난민이었고, 그들에게 책정되는 예산은 기하급수적 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똑.똑.
영주에게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꽤나 정갈한 집사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와 접시위에 담긴 무언가를 가지고서 영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께서 찾아뵙고 싶어 합니다."
"꺼지라고 해"
메이드는 질책의 손짓을 하려다 거두었다.
"이걸 보여드리라 하셨습니다."
집사는 접시위에 있는 소나무가 덧대어진 아름다운 리볼버 권총을 내보였다.
영주는 순간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집사에게 말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 자네는 나가 어서!"
집사는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예의를 차려나갔고 메이드 또한 예의를 차려 나가려 했으나 영주가 소리쳤다.
"여보... 당신은 거기 있으시오. 지금은 메이드 놀이를 할때가 아닌것같소"
메이드 겸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영주의 옆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여자를 따라간 소년은 원 없이 불을 질러대고 다녔다.처음에는 나뭇가지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마을 하나를 태우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민가를 땔감삼아 태우고, 목장의 동물들을 산채로 불살랐다. 역사적인종교 건축물, 마을의 도서관, 양초가게 등등 불태워버릴수 있는 모든것은 소년의 성냥을 피해갈수 없었다.
여자는 엘프소년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어주었다. 거대한 불과 타오르며 나는 짜릿한 연기는 엘프소년의 방화를 더욱 부추겼다.
소년은 자신을 이끌어준 여자에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했다. 그녀의 외모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소년이 생각하기에 여자는 충분히 아름다워질수 있으나 일부러 추녀처럼 꾸미고 다니는것 같았다.
소년은 여자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못생기신 건가요?"
여성에게 묻기는 꽤나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하얀옷을 입은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년에게 대답했다.
"대다수는 착각을 하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유혹하기가 쉬워진다고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 누군가를 유혹하려면 살짝 딸려 보여야 해, 살아가는 녀석들의 특징이야. 자기보다 못해 보인다면 그것이 제안하는 거래의 댓가를 감당하거나 아예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그녀는 살짝 뜸을 들이더니 마저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이런건 내가 원했던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댓가를 감당하기에는 이미 늦었지"
소년은 추녀의 말을 듣고서 생각했다. 그럼 나도 저분의 유혹에 빠진건가?
한참을 생각하며 걷는 소년의 눈에 띄인것은 거대한 성벽이었다.
여인은 소년에게 말했다.
"마지막 총잡이 지부에 도착했어, 네가 할 일이 뭔지는 알겠지?"
소년은 투명한 병과 성냥갑을 들며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