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당자님이 무료분 공개는 괜찮다고 하셔서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u///u ...sz
0.
강대하며 위대한 자들이 있었다.
해와 달을 만들고 별의 위치를 조정했으며 인간을 창조한 전능한 이들이 있었다.
온기를 긁어먹는 피조물들은 전능한 그들을 경외를 담아 '신'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태양처럼 빛났던 그들은 조악한 인간들의 전달수단인 입과 입을 넘나들며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었다.
그들은 몇 인간과 동침하고 선택받은 이들을 낳았다.
무력한 인간들은 선택받은 거만한 자들만이 누리던 강대한 힘을 마법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오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근원에 의문을 가지고 더욱더 파고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현자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별은 져가며 오만한 자들의 손끝에서 불꽃은 식어갔다.
하매 인간들은 소수의 선택 받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마법을 버리고,
노력하고 탐구한 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과학을 선택했다.
2014년 현대,
마법은 사라졌다.
- 자주색 안경을 쓴 소년이 말했다. 마법은 더는 필요 없다고.
뭐 마법이 왜 사라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대라면 수십 가지도 댈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말하자면, 첫째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적이었고 둘째로는 효율이 낮았으며 셋째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1. 마법은 제한적이었다.
마력 보유량은 사람이 타고난다. 더해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마력을 물이라 하고, 사람을 컵에 비유하면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컵의 용량은 태어날 때부터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
마법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지만, 그만큼의 물을 퍼다 쓰게 되고 그것은 수일에 걸쳐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그나마 물을 담을만한 용량의 컵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극소수였다.
몇천년 전에는 신화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들이 존재했던 것도 같지만, 평범한 사람들과의 혼인의 반복 이후 중세시대에 이르자 마법사다운 마법사는 극히 적어질 정도로 강한 마력 보유자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처음부터 마법은 쇠퇴할지언정 발전할 수 없는 힘이었다.
- 푸른 장미는 울며 말했다. 인간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2. 마법은 비효율적이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화염을 일으키는 마법을 캐스팅하는 데에는 세 시간이 걸린다.
캐스팅 시간을 0으로 줄이기 위해 미리 영창을 완료하고 그 목소리를 담아 바로 마법을 발현시키는 도구에 인챈트한다.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적이 대표적인 예다.
다만 발화의 부적 한장 만드는 데에 세 시간이 걸리고, 시전한 마법사는 세 시간이나 영창해야하며, 그나마도 사용자가 마력이 없으면 캐스팅이 되어도 마법을 사용할수 없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마법에 비해 부싯돌이나 성냥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으며 누구나 간편하게 불을 붙일 수 있다. 라이터가 발명된 뒤론 몇 초도 걸리지 않게되었고말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인류 최고의 스테디셀러에서 나온 모두가 아는 일화를 예를 들자. 마법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물 위를 땀 뻘뻘 흘리며 한참 걸어가느니 사람들은 편하게 배를 타고 가겠지. 적어도 현대 사회에선 말이다.
- 불꽃 같은 마법사는 꿈을 꾸었다. 다시금 마법을 부흥시킬 거라고. 탐구하는 자들은 다시금 세상에게 경외받을 거라고.
3. 마법사들은 정치에서 패했다.
왕이 선택한 것은 종교와 과학기술.
인류의 기술발전 대부분은 전쟁에서 시작된다.
전화는 전시에 빠르게 지령을 전달하기 위해 개발되었고, 인터넷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위치추적은 적군의 위치를 찾기 위해 발명된 기술이며 위성은 폭탄을 정확한 장소에 투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죽하면 세계 제 2차대전이 10년정도 더 끌었으면 인류는 맨몸으로 상공을 비행하는 기술이 나왔을 거라는 말도 있겠는가.
마법은 전쟁에 도움이 안되었다.
오히려 마법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종교와 대립해가기만 하던 마법은 결국 마녀사냥을 불러일으켰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오만했던 그들을 태우기 시작한 지 몇년 후, 대부분의 마법사는 죽었다. 그들과 함께 마법 생물들은 사냥당하고,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었고, 혹은 그들을 받아주는 땅으로 도피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전설로. 마법은 사라져 갔다.
- 그리고 악마들은 즐기며 웃었고,
- 경종을 울려야 할 종지기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 잊혀진 강한 이들은 무시했고,
- 썩은 물을 마시는 자들은 그들을 이용해 어찌 제 창고의 재화를 늘릴까 고민했으며
- 마지막 남은 현자들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 문드러진 아집에 잠겼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런 현대에서 대마법사의 손자로 태어나되 마법을 모르고 자란 소년과, 어린 맨드레이크의 이야기다.
1.
어둑어둑한 밤이 된 하교길에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그 나이대의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보였고, 딱히 날나리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뺑글이 안경 낄 법한 범생이들로도 보이지않았다.
평범함, 그 짧은 단어로 정의될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다.
"우린 왜 하필 남고냐! 여자친구랑도 떨어져서 이게 무슨 궁상이야!"
"뻥 치지마라. 환상의 생물을 키우고있다고? 네가?"
"내일부터 방학이니까 만들 예정이거든?"
"웃기시네. 야자, 야자 몸을 던지자 쌤들 몰래 몸을 던지자! 성적아 터져라! 죄다 죄다……"
"재수없는 노래 부르지말고 입 다물어 좀."
킬킬대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녀석에게 다들 꿀밤 세례를 날렸다. 시덥잖은 옆 여고 치마길이 얘기로 떠들었다. 화제는 야동을 거쳐 몇년 후의 수능에 대해서로 흘러가고 아이들의 분위기도 시시각각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듯 했다.
어느덧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한 두명씩 집으로 향하며 헤어졌고, 버스 정류장에선 단 한명만 남은 채 모두 흩어졌다.
평범한 무리에 무난하게 끼어 있던 한 소년은 마지막까지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막차가 지나가고 건너편 상가의 불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질 때까지 버스정류장에 앉은 채로 손에 들린 책만 내려다 보았다.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아이였다.
고등학교 1학년에 176cm, 크진 않지만 작지도 않은 키.
몽골로이드 특유의 단꺼풀에 그다지 크지 않은 처진 검은색 눈. 그렇게 날 서지도 않았지만 못나지도 않은 코.
같은 반 애들에 비해 눈에 띄는 점이라면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고 또 유난히 타지 않아서 흰 피부 정도였다.
요약하자면, 어딘지 모르게 기운없어 보이는 고만고만한 그 나이대의 학생 같았다.
소년은 가만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가 책을 꺼내고 안경을 썼다.
안경엔 요즘 시대엔 보기 힘든 안경줄이 달랑이고 있었다.
안경줄은 어두운 곳에서도 자주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났고 끝엔 달과 별 모양의 새끼 손톱 반 만한 모형이 달려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않았지만 안경줄을 보고있노라면 어쩐지 맑은 종소리가 울려퍼질것 같았다.
"DNA는 육체의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부모의 DNA는 염색체로 뭉쳐져 세포분열 시 정자와 난자의 핵으로 들어가 자식에게로 전해진다."
막차도 떠난 버스 정류장에서, 소년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가끔 지나가는 자가용 소리와 가로등에 타들어가는 나방의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를 제외하면 거리는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결국 부모와 자식이 가진 DNA의 종류는 같은 것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고요함 속에서 몇 페이지를 계속 읽어내려가던 소년은 힘없이 안경을 벗고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안경줄만 바라봤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
할아버지도 보고 싶다- 라고 중얼거리며 할아버지가 쓰셨던 안경을 바라보는 소년의 이름은 박 외솔.
지금은 고삐리가 된, 어느 시골에 작은 집을 가졌던 할아버지의 손자였다.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쩐지 툇마루에서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볕을 쪼이시던 할아버지가 정말 하늘나라로 가셨다.
2~3일에 한번씩 청소를 하러오던 아주머니는 너무 평온하게 주무듯 가셔서 정말 볕쪼임을 하며 주무시는 줄 알았다고 했다.
편히 가셔서 다행이다, 싶었던 것도 잠시.
할아버지는 시골에 있는 집을 오롯이 외솔의 명의로 물려준다고 유서를 쓰셨다. 자신의 딸 되는 어머니도 아닌 손자 외솔에게.
외솔의 부모는 외솔이 초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친척들과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았던지라, 외솔은 외할아버지에게 딸만 넷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되었다.
애도의 시간을 가질 새도 없이 별 연락도 없이 살던 친척들이 우르르 몰려와 시골의 그 집을 팔라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할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보이던 어머니는 차라리 잘 되었다며 누구에게든 좋으니 그 집을 팔아 버리라며 외솔을 닥달했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무기 하나없이 하이에나 떼를 목도하면 이런 기분일까. 외솔은 하교한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지는 수많은 종이와 알수없는 글, 글, 글들을 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외솔아, 네가 가지고 있어봤자 쓸모도 없잖니! 어디 도심의 빌딩이나 재개발 예정인 땅도 아니고 그냥 농촌에 있는 작은 건물인데! 큰이모가 가격 제대로 쳐 줄테니까 여기에 사인만 해, 응? 착하지 외솔아?"
"언니는 왜 애 놀라게 강요를 하고 그래! 외솔아? 많이 놀랐어? 작은이모 기억하지? 어렸을 때 우리집 정하랑 너 잘 놀았잖아. 정하형 기억나지? 작은이모가 잘 관리해줄테니까……!"
"관리는 무슨! 언니야말로 사기치지마! 어디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거짓말로 구슬려! 막내 이모가 가격은 섭섭치 않게 쳐줄게! 학생 신분에 몇억이면 대단히 큰 돈 아니니?!"
"언니한테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정신이 확 들게 혀를 반으로 갈라줄까?!"
안그래도 몸이 약했던 외솔은 양의 탈을 쓰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떼 같은 친척들의 등쌀에 기어이 쓰러졌고, 그 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외솔의 부모님이 진짜 애를 잡아먹을거냐며 역정을 내시고 나서야 친척들의 난동은 조금 가라앉았다.
외솔이 아직 미성년자라 아버지가 재산 관리를 하면서 팔아버리실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굳이 '외솔' 스스로가 팔기를 원했고, 외솔은 추억이 담긴 시골집을 팔 생각따윈 없었다.
그는 그 낡았지만 따스했던 할아버지의 골방을 친척들 손에 쥐어주기 싫었고,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이젠 아주 외솔의 집에 죽치고 눌러앉아선 외솔에게 그 집을 팔라고 앵알앵알거리고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그 날 이후, 외솔은 친척들을 피해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가는 아이가 되었다. 집의 문지방을 밟는 순간 어미새에게 밥 달라고 입을 쩍 벌린 뻐꾸기새끼들마냥 귀 따갑게 회유와 협박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들어야하는 시간이 끔찍했다.
피곤하기 그지없다. 그는 부모님보다 더 가까웠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쪼고 또 쪼는 친척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도 없는걸까? 외솔은 콧등을 꾹꾹 눌러 안마하며 열심히 심화를 가라앉혔다.
외솔은 어린시절 이상하리만치 몸이 약했다. 지금도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은 영위할 수 있는데 반해, 어린시절의 외솔은 볕아래서 조금 오래 걷는것조차 힘들어했었다.
그런 외솔을 키워주신건 외할아버지셨다.
외솔의 부모는 어린소년에게 조금이라도 더 건강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자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그를 키우게 했다고, 외솔은 그리 알고 있었다.
일단 과거의 일을 설명하자면, 몸이 약했던 외솔은 6살이라는 볼에 젖내가 채 덜 가신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비밀방에 들어오는 걸 좋아했다.
말이 비밀방이지, 안방 왼켠에 붙어 있는 문을 열면 나오는 다락에 붙어 있는 골방이였다.
손자에게는 더없이 인자했던 할아버지는 손자가 그 방을 찾아 들어갈 때마다 뛸뜻이 기뻐하며 자신의 품에 손자를 안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써내려가시곤 했었다.
그 다락에선 언제나 코가 싸해지는 풀냄새가 났는데, 약방 냄새 같기도 하고 초원에 코를 박으면 느껴지는 잡초와 흙냄새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소년에게 보여준 그 골방은 매우 비좁아 벽의 한 면 전체엔 알 수 없는 꼬부랑 글씨로 분류되어 있는 말린 풀들이 가득했고 다른 면에는 할아버지가 손수 쓰신 책(이라기보단 종이묶음에 가까운)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리고 7시 전까지는 다락에 나 있는 작은 창으로 앉은뱅이 책상에 앉으면 딱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바깥에서 쏟아지곤 했었다.
그 책들은 페이지마다 사랑의 묘약이라던가 행운의 약이라던가 하는 것들의 제조방법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4월 첫주의 일요일 날 아침에 받은 이슬, 말린 다람쥐 간 따위의 재료들이 필요해서 아무리 할아버지를 따르던 손자라도 만들어볼까 하는 엄두도 못 냈었다.
사정 모르는 어른들이 보면 어린 손주에게만 그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하신 것으로 보아 손주에게 치신 짖궂은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할아버지의 골방은 손주가 아빠 손에 끌려 도시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의 비밀아지트였었다.
"추억을 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잖아……. 딱히 돈이 궁하지도 않고 저쪽에 그 집이 그렇게 필요할 일도 없을텐데."
그런 것 치곤 다들 상당히 다급해보였지만. 그 아래 금광이라도 묻혀있나? 외솔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달빛도 보이지 않는 좋은 고요한 이지만, 점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고 이렇게 늦게 가면 집에 있던 친척들도 포기하고 잠들었을것 같아 외솔도 슬슬 책에서 눈을 떼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참이였다.
눈앞에 웬 날씬하고 흰 다리가 보였다.
이 날씨에 맨다리?
고개를 들자 바로 눈 앞에 웬 맨다리에 매미날개같은 원피스 하나만 입은, 풍성한 머리칼을 가진 파란 눈의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반짝이는 남색 머리카락이 밤거리에서 흔들리는 것이 마치 은하수를 보는 듯 했다.
그녀는 정확히 외솔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 무릎에 손을 얹고 있었다.
파란 눈이 예뻤냐고?
아니 진짜 말 그대로, 여자아이의 큰 눈은 흰자위가 있어야 할 부분까지 새파랬다. 빈 유리구슬 안에 햇살아래 파랗게 부서지는 바다가 찰랑이는 것 같은 신비한 눈동자였다.
물론 신비한 건 일단 접어두자.
"으아아아아아악-!!!"
외솔의 기겁한 비명이 가로등 불빛 뿐인 밤거리를 울렸다.
외솔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가자 소녀는 깜짝 놀란 듯 뒤로 한 발짝 물러났지만 거기서 더 떨어지지는 않았다.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매미날개같은 원피스 하나만 입은 소녀의 푸른 머리칼은 소녀의 등 뒤를 다 덮을 정도로 길고 구불구불했으며 가로등 불빛뿐인 밤거리인데도 반짝거리며 빛나고있었다.
"너, 너, 너 뭐야! 귀신이야?!"
"손각시* 아닌데……."
*(처녀귀신)
소녀는 시무룩하게 손을 거두곤 검지만 꼼지락거렸다.
소녀의 눈은 여전히 흰자 한 부분 없이 새파랬고 유리구슬 안에 담긴 호수처럼 일렁거렸다. 인간은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눈이였다.
외솔은 어버버, 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다행히 가방이 땅에 먼저 떨어져서 다치지는 않았다.
외솔은 주춤거리며 눈 앞의 소녀를 다시 바라봤다. 소녀의 신기한 눈 때문에 놀라서 잘 못 봤지만 소녀는 창백한 피부에 길고 얇은데다 하얀 팔다리, 아몬드 형의 눈과 예쁘고 긴 속눈썹을 가진 어린 소녀였다. 여덟 살이나 먹었을까 할 정도로.
"골방의 대마법사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신을 찾아가라 했어요. 당신을 찾으면 안전하다고, 당신이 지켜줄 거라고 했어요. 우리 계약했는데……. 했는데에……."
"뭐? 아니 야 잠깐만!"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는 외솔의 반응을 지켜보던 소녀는 곧 숨을 참으며 몸을 떨더니 이내 푸른 구슬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코끝이 빨개져서 후둑후둑 우는 여자애를 보며 외솔은 당황하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잠깐만, 울지 말고 말해봐.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일단 경찰서로……."
"당신은 내가 어렸을 때, 우리의 열매를 먹는 대신 우릴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골방의 대마법사도 그의 핏줄이 우릴 도울 거라 했어요. 그 말만 믿고 적토로 왔는데 어찌 절 알지도 못하신다는 거예요!"
소녀는 어깨를 파르르 떨며 울음소리를 참았지만, 결국 입술을 비집고 히끅히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톰하고 예쁜 입술을 깨물던 소녀는 결국 와앙-!하고 섧은 울음을 터트렸다.
"아, 아니 일단 진정하고……. 일단 뚝! 아니 그만 울어……. 아 진짜……."
외솔은 그녀를 안아서 등을 토닥거렸다. 소녀에게선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나서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남중 나와서 남고 들어가는 바람에 연애 한 번 못해 본 외솔은 품 속의 소녀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이게 여자 냄새라는 거구나,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너 이름은 뭐야? 어디서 왔어?"
"……훌쩍."
"진정하고, 그만 울어. 뚝! 너 이름 뭐냐니까?"
"흡…… 란웨이(藍薇)……."
"란웨이(藍薇)? 너 중국인이야?"
소녀가 그 말을 듣자 간신히 눈물을 그쳤던 눈이 다시 그렁그렁해지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하수가 고여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눈이었지만, 그 모습을 감상하고 있기엔 소녀가 너무 슬프게 울고 있었다. 정말 다 잊어버린 거냐며 우는 소녀의 어깨엔 서러움이 먹구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아니 야 잠깐만!"
"당신이, 끅! 지어준 이름이잖아요!"
"미안……. 근데 우리 만난 적 있었어? 보호해줘야 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골방의 대마법사는 또 뭐고? 혹시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야?"
란웨이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금 물방울이 터지듯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그가 죽었으니 이제 당신이 대마법사잖아요! 나를 지켜줘야하잖아요!"
외솔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눈앞에 서 있는 훌쩍거리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 금이 가며 부스러기가 떨어져내렸다.
2.
어린 외솔은 몸이 약했었다.
그냥 몸이 약한 정도가 아니라 몇시간 걸으면 탈진해 쓰러질만큼 굉장히 약해서, 보약을 입에 달다시피 하고 살았었다. 외솔의 부모는 근처의 병원이란 병원은 전부 가 보았고, 한의사들도 찾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선천적으로 면역체계가 매우 약합니다."
"열살을 넘기지 못할거에요."
외솔은 점점 더 쇠약해져갔다. 이미 둘째아들을 잃은 박씨부부는 결국 외솔을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보냈다. 어린 외솔은 시골 공기가 맑아서 몸에 좋을거라는 부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시골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할아버지 댁에 온 첫날 밤, 열두살의 외솔은 열이 오른 몸으로 방문틈 사이로 내 남은 아이마저 죽일참이냐며 화를 내는 아버지와 서럽게 울부짖는 어머니와 착잡한 표정의 할아버지가 다투는걸 보았다.
"우리 도솔이 죽은거도 다 아버지 탓이에요! 외솔이마저 죽으면! 아버지의 세계를 부숴버릴거에요! 아버지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 내가 다 부숴버릴거라고! 당신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야!!"
흐으아아아……! 엄마는 귀신처럼 머리를 헤치고 엎드려 울었다. 아버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어찌하실거냐면서 할아버지를 추궁했다. 외솔은 그렇게 이상한 엄마는 처음 보았다. 울었다가, 화냈다가.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다가 제발 외솔이 좀 살려달라고 울면서 할아버지의 옷소매를 잡고 빌고있었다.
어린 외솔은 보다못해 문을 열고 울면서 기어나와 내가 다 잘못했다며 엄마를 끌어안았다.
내가 약해서 미안해 엄마.
튼튼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내일부턴 반찬투정 안할게요. 엄마 울지마아…….
엄마는 외솔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처럼 울었다. 눈물줄기가 갈래갈래 고운 얼굴을 긋고 외솔에게로 떨어졌다.
그 다음날 부모님은 도시로 가버렸고 할아버지는 묵묵히 아침부터 외솔을 업고는 마을 뒷산을 올랐었다.
"할아버지, 엄마는 왜 할아버지를 싫어해?"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어린 외솔은 힘없이 물었다. 외솔은 '왜 엄마는 마법을 싫어해?'라는 물음을 꼴깍 삼켰다. 그의 어머니는 마법의 '마'자라도 꺼내면 외솔의 종아리를 호되게 때리곤 했었다.
'외솔아. 눈 감고 귀 닫고 입 막는거야. 너는 마법을 모르는거야. 알았어?!'
어머니의 고함은 꽤나 효과적이여서, 외솔은 정말 마법을 모르는 평범한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외솔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그저 쓰게 웃으시며 외솔의 엉덩이를 두어번 퐁퐁 두드렸다. 할아버지의 안경에 걸린 보라색 안경줄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달랑거렸다.
어린 외솔의 질문엔 답하지 않고, 외솔에게만은 인자하셨던 할아버지는 어딘가 바싹 말라서 날려갈 듯한 어조로 입을 여셨다.
"우리 외솔이는……. 아직 해야할 일이 많지."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야하고
많이 웃고 즐기고
많이 사랑하고, 한참 그러다 가야지.
"우리 착한 손주. 안심하려무나. 이 할애비가 너만은 못 데려가게 하마."
그리고 할아버지는 어딘지 아픈 어조로 너 만은 안됀다, 너 만은 안돼. 를 연신 중얼거리셨다. 한참 산을 오르고 오르자 어쩐지 짙은 신록의 향이 물씬 풍겨오는 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들이 사그라들고, 나뭇잎과 가지를 흔드는 기분좋은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자신과 할아버지를 반기는 느낌이였다.
한참 숲길을 걸어나가자 저 멀리서 작은 초가집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민속촌도 아니고 이 시대에 산속 초가집이라니, 어쩐지 몇백년전의 시간을 뚝 떼어 이곳에만 놓은 느낌이였다. 주위는 볕이 잘 들지 않았는데, 초가집만 유독 볕이 잘 드는 터에 있어서 그런지 은은하게 빛나는 느낌도 들었다.
초가집 울타리 안에서 푸른 머리칼을 가진 한복 차림의 어린 여자아이가 공기 놀이를 하다가,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는 발견하곤 도도도 달려나와 답삭 안겼다. 4살이나 되었을까, 걸음걸이도 아장아장 위태로워 보였다.
"골방 현자님!"
"우리 꼬마, 잘 지냈누?"
짤뚱한 팔로 외솔의 할아버지를 끌어안은 채로 행복하게 웃으며 보드라운 볼을 비비적거리던 소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응! 나도 엄마도 아빠도 잘 지냈어요! 뒤에 업힌 애는 누구? 다른 맨드레이크?"
"인사해라, 이 할애비 손주다."
"골방 현자 손자면, 이 애가 차기 대마법사가 되는 거예요?"
"글쎄……. 그건……."
재잘재잘 할아버지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면 소녀는 이내 땅을 밟은 외솔의 주위를 빙빙 맴돌며 그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외솔과 한참을 눈을 마주친 채로 있다가, 소녀는 이를 다 드러내며 씩 웃었다.
"잘 부탁해!"
그 때를 회상하며 외솔은 스스로의 머리가 멍청하다 생각했다. 그 때의 눈동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지?
검은색 크레파스로 직직 그은 것처럼 기억나지 않던 여자아이의 눈동자는 지금 제 뒤에서 달달 떨고있는 소녀의 것이였으리라.
그 무렵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 두 부부가 나무들 사이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골방 현자 어르신? 무슨 일이신가요?"
"인사하게. 내 손주일세. 일전에 말한 계약을 기억하는가?"
남자는 두려운 얼굴로 묻는 여자를 감싸며 들어오라고 초가집의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외솔은 나가 있으라 했고, 졸지에 소녀와 외솔은 둘이서 장승마냥 오도카니 서있어야 했다.
자신들이 듣지 못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장히도 심심했는지 외솔은 소녀를 힐끗힐끗 훔쳐봤고 소녀는 그런 외솔을 빤히 보다가 마당 밖의 바위를 가리켰다. 두 꼬맹이들은 총총 걸어나와 바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외솔은 뻘쭘하게 앉아서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답답했는지 다리를 동당거리고 있던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외솔이지? 당신 이 산에서 유명해요. 골방 현자는 후계자로 손자인 널 삼고싶어한댔는데, 골방 현자의 자식이 반대한다면서요?"
"으, 응……?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어. 네 이름은 뭐야?"
"나 이름 아직 없어요. 골방 현자가 지어줬으면 좋겠는데 안 지어주셔."
"너 부모님도 있잖아?"
"바보! 이름을 짓는 건 신이 인간에게 내린 특권이잖아요."
뾰루퉁하니 볼이 부풀어오른 소녀를 보면서 외솔은 시골에 오기 직전까지 극성이던 엄마가 붙여 준 중국어 과외선생님이 가르쳐준 단어가 생각났다.
"그럼 내가 지어줄게! 딱 좋은 거 있어."
"진짜?"
눈이 동그래진 소녀를 보며 외솔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란웨이(藍薇/남미)."
푸른 장미를 란창웨이(남장미藍薔薇)라고 제대로 가르쳐준 중국어 가정교사가 알면 통탄을 금하지 못할 노릇이였지만, 외솔은 중간 글자가 빠진 이름을 푸른 장미라고 철썩 같이 믿고 소녀에게 란웨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 신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과 가장 닮은 흙인형들에게 이름을 지을수 있는 권능을 주었다. 그리고 이름이 지어진 생물들은……
소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솔을 바라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외솔을 와락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부챗살처럼 촘촘하고 예쁘게 자란 속눈썹과 반짝거리는 눈을 가진 소녀의 웃음을 보며 소년은 얼굴을 붉혔었다. 솜사탕이나 강아지를 끌어안은 것처럼 행복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만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이내 어른들의 이야기가 끝났는지 할아버지가 툇마루를 딛고 나왔다. 외솔을 마뜩잖은 눈으로 바라보면 짧은 파란 머리칼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 마법사. 나는 솔직히 당신이 미덥지 않습니다."
"네?"
"둘째는 어차피 피워 낼 자신도 없었으니 저희가 손해보는 장사는 아닙니다만……. 골방 현자께서 저희를 보호하고 있다지만,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으니까요."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외솔이 진지하게 되묻자 남자는 전혀 모르고 왔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세계적으로 그들과 같은 마법 생물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강력한 마법 생물들은 깊은 곳으로 도망치거나 하늘로 올라버렸고, 저같은 미약한 이들은 대부분 인간으로 탈피하여 남지 않았다.
동양의 동자삼, 서양의 맨드레이크.
마녀사냥 당시에 같이 괴물로 몰려 말살당해 수가 얼마 남지 않은 맨드레이크.
맨드레이크나 동자삼같은 마법 생물들은 성장이 끝나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수분을 해서 2세대를 낳느냐, 혹은 식물의 껍질을 벗고 인간이 되느냐.
중세시대엔 나약한 인간으로 굳이 변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던 마법 생물들이였지만, 현대엔 인간이 되지못해 발악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법과 사회와 치안이 있었고, 그들또한 인간과도 같은 안전한 일상을 원하고 부러워했다.
그들을 잡아죽여 한병의 약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마법사들도, 눈에 띄면 이슈가 되고 연구소로 끌려가야 할 걱정도 없는 인간들의 일상을.
그도 제 처만 아니었으면 진즉 인간으로 피어났을 것이고, 하다못해 제 딸만이라도 어떻게든 인간으로 피워내려고 골방 현자에게 먼저 말을 꺼냈었다.
"골방 현자께서 제 아내가 품은 씨앗, 즉 저희 둘째를 당신에게 먹임으로서 당신의 몸을 침습하고있는 업을 강제로 없앨 겁니다. 대신 당신의 직계 혈족은 절대적으로 저희를…… 아니."
남자는 말을 잠시 끊더니 외솔의 옆에 서있던 란웨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말을 이었다.
"제 딸을 보호해주는 계약을 맺는 겁니다. 제 딸이 신록의 품을 벗어나 적토의 인간으로 피어날 때까지."
그것이 열두 살 소년의 인생이 메이게 된, 신록의 기억이였다.
***
외솔은 일단 소녀에게 교복 겉옷을 덮어주었다.
아까야 당황해서 넘어갔지만 소녀는 예쁜데다 어렸고 매미날개처럼 얇기만 한 원피스는 허벅지께만 겨우 가리고 있었다.
외솔은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걸어 돌아갔다. 버스정류장까지 간 건 그냥 친구들과 함께 걷고 싶어서였을 뿐, 소년의 집은 외려 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소년은 반지하 가구가 둘 있는 2층 주택에 살았다.
"저기, 지금 들어가면 우리 집에 친척들이 많아서 소동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일단 교복으로 눈은 가리고 들어가자. 응?"
"친척들?"
외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있어. 짐승떼들."
3.
전철에 앉아 퇴근하는 당신의 곁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마법사일수도 있다. 당신의 어께를 스쳐지나간 평범한 주부가 마법사일수도 있다.
애초에 그들은 모두의 곁에 있었으므로.
영물들도, 마법사들도 인간사회에 스며들었다.
가장 강력한 보호막은 다른것이 아닌 사회와 법이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을 아는가?
중국의 산아제한은?
중국은 폭팔하듯 늘어나는 인구를 제어하기 위해 한가정당 아이는 한명씩만 낳아야한다는 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피임을 하지못한 가정에선 두번째 아이를 호적에 올리지도 벌금을 내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 결과, 두번째 아이들은 검은아이들로 불리우며 '세상에 없는, 집계되지 않는'아이들이 되어버렸다.
극단적인 예로, 그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해도 피살자가 '존재하지 않는'사람이기에 벌어지는 문제가 현재 중국에서도 논란거리가 되고있다.
사회의 보호?
존재하지도 않는 신화취급받는 영물들이 그런것을 받을수 있을리 만무했다. 지금 외솔과 함께 걷고있는 란웨이의 흰자 한점 없이 은하수처럼 빛나는 눈을 보면 누구든 아름답다 이전에 공포감을 느낄것이다.
자신들과 다른것에 대한 공포감과 이질감.
아무리 아름답고 대단해도 그것은 인간이 아닌 자의 것.
그들은 꼬리 달린 구미호를 보아도, 여러쌍의 팔을 달린 지네를 보아도 똑같이 느낄것이다. 영물들은 스스로를 감추고 최대한 인간에 가깝게 보이도록 스스로 변했다.
인간이 될수없다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고, 인간이 될수있는 영물들은 인간으로 탈피했으며, 이도저도 할수없는 이들은 깊은곳으로 파고들어가 숨어버렸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영물들의 대부분은 인간의 몸에 '매우' 좋았다.
유니콘의 뿔은 수명을 연장시키고, 제비꽃 맨드레이크는 아무런 핸디캡 없이 먹는 순간 처녀막을 회복시킨다.
구미호의 여우구슬은 지니기만 하는것으로도 사람의 두뇌 회전력을 향상시키며, 지네의 내단은 마력을 회복시키는 마력로의 기능이 있다.
특히 맨드레이크는 지옥의 약초로 불리우며, 각 종류의마다 효과가 전부 달라 중세엔 이에 관한 마법사들의 연구도 활발했었다.
무대 뒷편을 아는 이들은 거액에 영물들의 사체를 거래했고, 영물을 위한 법이 없는 상황에서 마법사들은 마구잡이로 그들을 사냥했다.
14세기나 되었을법한 중세엔 그들을 저지하고 마법사 사회의 균형을 맞추는 인퀴지터(이단심문관)라는 존재들이 있었고, 마녀사냥도 일어났었지만 지금 시대에 와선 이미 퇴색한지 오래였다.
영물들은, 란웨이는
필사적으로 무대 뒷편에서 도망치고있었으리라.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조금은 안심이에요."
그 중, 인간이 될수있는 쪽에 속하는 란웨이가 속삭이며 외솔에게 찰싹 붙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그녀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외솔은 영물과 마법이 판치는 베일 뒤의 이야기를 알고만 있었다.
네온사인도, 가로등의 빛도 닿지 않는 무대 뒷편의 이야기.
외솔의 부모는 외솔의 손을 잡고 무대 뒷편에서 걸어나와, 저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한다 다그쳤다. 그러하매 외솔의 마법에 대한 지식은 어느 기점으로 끊겨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공부 빼고 뭐든 다 좋아할 그 나이대의 고등학생으로서 외솔은 마법에 지대한 흥미를 가지고있었다. 다만 집안에서 모든것을 원천봉쇄했고, 마법의 'ㅁ'자라도 입에 올리는 순간 외솔의 부모는 더없이 분노했기에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외솔이는 아무것도 몰라도 돼. 눈 감고, 입 닫고, 귀 막는거야.'
어머니는 언제나 세뇌하듯 일러주곤 하셨었다. 외솔은 그저 어렴풋이 할아버지와 무슨 트러블이 있었겠거니 짐작할 뿐. 언제나 반강제적으로 무대의 앞면만을 바라봐야했다.
정갈하게 잘려진 두부같은 도시를, 무미건조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뭐라 말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무채색의 도시를.
"저기, 일단 친척들에게 들키면 소동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우리 부모님이 널 보면 당연히 화부터 내겠지만……."
외솔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약속은 지킬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널 지켜주는거지?"
"어차피 계약을 위반하면 당신은 죽는걸."
"잠깐 뭐?"
"정 지켜주기 힘들면 제가 안전하게 살만한곳을 찾아주기만해도 괜찮아요."
외솔은 묘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꾹꾹 내리눌렀다. 무대의 뒷면, 마법사들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이 몇년 만이던가. 벅차오르는 가슴에선 뻐근한 매운맛이 났다.
녹슨 철문의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거실엔 아직도 불이 환했지만, 친척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어째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외솔의 아버지가 안경을 고쳐쓰며 외솔을 맞으려다가 뒤따라 총총 들어온 란웨이를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어? 친척어르신들 다 가셨나봐요?"
"그래. 하도 시끄럽게 구는데다, 너도 시골집 팔 생각이 없어보여서 다 돌려보냈다. 근데 뭐냐, 그 뒤의 여자애는."
"외할아버지가 나 어릴 때, 몸 고쳐주면서……"
"할아버지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지 내가!"
떨어지는 아버지의 불호령과 야차 저리가라할 살벌한 표정에 외솔의 어께가 움츠러들었다. 외솔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소심하게 파리날개짓 같은 반항을 했다.
"……돌봐주기로 계약한 애래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젠 제가 돌봐야한다는데……."
"그냥 입원을 시켰어야 했어요, 엮여도 왜 하필 그쪽 종자들이랑 엮여서."
달각거리며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차갑게 말을 끊었다.
외솔에게는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엄마의 진갈색 생머리와 앞치마 밖에 보이지 않았고 외솔의 뒤에서 란웨이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읽었는지 안절부절 못하다가 외솔의 옷소매만 꾸욱 힘주어 잡았다.
"그래서, 또 뭐니. 뭘 해야하는 거야? 계약파기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데, 무슨 닭 심장이라도 잡아바쳐야 하는 거니?"
"기껏 망할 반쪽짜리 정신병자들이 꺼졌나 했더니만……. 에잉."
혀를 쯧쯧 차는 아빠와 돌아보지도 않는 엄마에게 외솔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지켜주는 거요, 안전하게 지켜주는 게 계약이였어요. 파기 방법은 할아버지가 아시는데 돌아가셨고……."
"뭐?!"
"거 보랬죠! 애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지 무슨 할아버지한테 애를 보내서 또 그쪽 일에 엮여요! 내가 못 살아 진짜!"
외솔의 아빠는 외마디 괴성을 질렀고 엄마는 까랑까랑하게 소리를 지르더니 거칠게 앞치마를 풀고 고무장갑을 싱크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곧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외솔의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들고 있던 신문지를 내려놓고 외솔을 안경 너머로 빤히 바라보았다.
"네 엄마가 저런 반응할 걸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그런 걸 덜컥 주워와? 사람이 고양이야? 아니, 저건 또 뭐야?"
"……동자삼 같은데요."
"애비도 동자삼은 실컷 봐서 그게 어찌 생겼는지는 알아. 안 그래보이니까 그렇지. 그나저나 망할 영감, 비법이라고 절대 치료법은 안 알려주더니 동자삼들 손을 빌린 거였어?"
이를 부득 가는 외솔의 아버지를 보며 점점 겁을 먹고 외솔의 뒤로 숨어 고개만 빠끔히 내밀던 란웨이가 작게 웅얼거렸다.
"동자삼은 아니고 맨드레이크에요……."
"후……. 네발 달린 건 집에 못 들여놓는다고 했더니 이젠 이족보행 마법 생물을 주워 온다 이거냐?"
"아빠,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저도 좀 봐줘요! 진짜 얘네 아니었으면 전 열 살도 못 넘기고 죽었을 지도 모르잖아요……."
거실에서 한참 옥신각신할 때, 손님방의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외솔과 란웨이를 훔쳐보는 사람이 있었다.
불호령을 들으면서도 란웨이를 필사적으로 뒤로 숨기는 외솔을 빗겨보던 이는 작게 탄식했다.
"저 한심한 꼬락서니가 대마법사라니……."
***
"저라고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인간의 몸은 저희보다 훨씬 무르고, 저희만큼 강력한 비명을 지를 수도 없으니까요."
외솔의 방은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 몇개와 야구배트 외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의 방이였다. 작은 방엔 한명이 들어가 가면 꽉 찰 듯한 작은 침대와 책상 외엔 별 가구도 없었다.
외솔이 깔아준 이불 위에서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란웨이가 말했다.
외솔은 란웨이에게 침대를 양보했지만, 란웨이는 익숙하지 않다면서 바닥에서 자려했고 결국 외솔도 바닥에 앉아 란웨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기억 속에선 걸음걸이도 위태위태하던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란웨이는 조금 뿐이긴 했지만 확실히 자라 있었다.
"당신만 만나면 안전해질 줄 알았는데……. 정말 당신의 부모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않았군요. 골방의 대마법사께서 그의 공방을 당신에게 계승시켰다고 해서, 전 당신이 이미 대마법사의 반열에 올라 있을 줄 알았다구요."
란웨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은하수 같은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자, 외솔은 당황하며 란웨이를 토닥거렸다.
"할아버지가 시골집을 나에게 넘겼고, 마법적인 이유 때문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 허락 없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거기에 가면 엄마랑 아빠가 엄청 화를 내시니까 갈 수가 없어서……."
외솔의 변명을 듣던 란웨이는 그저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뺐다. 온몸으로 매우 피곤하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는 티를 내는 란웨이를 외솔은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다만 다른 마법사가 노린다니, 외솔은 그 부분에 대해선 안심하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눌러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사회에서 마법을 쓰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니 거의 아는 이도 없었다.
불편한 마법은 수백 년도 전에 과학에 의해 자연도태 되었으니까.
역사의 뒤안길로, 전설로.
마법은 사라져갔다고 이미 앞서 전한 바 있다.
……극소수의 몇 마법사를 빼면.
외솔 본인은 잘 모르지만, 그는 대마법사의 손자였고 마법을 피해 현실로 녹아들고자 발악하는 마법사의 아들이었다.
"그 피가 아깝게 말이지."
란웨이에게 쩔쩔매는 외솔을 문 밖에서 보던 소년은 이를 부득 갈고는 문을 열었다. 손님방에서부터 그를 훔쳐보던 시선의 주인이였다.
외솔은 갑자기 열리는 문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정하 형?"
여자라면 딱 보기 좋게 말랐다 싶었겠지만 남자치곤 지나치게 선이 가는 몸. 머리칼은 빨간색으로 염색해서 볼께를 간질이는 길이로 기르고, 주황색의 편해 보이는 반바지에 회색 반팔 후드를 입은 열일곱 살 소년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문가에 서 있었다.
곱상하니 고양이가 생각나는 인상의 미소년이었지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이를 갈고 있으니 상대방에겐 제법 위협적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김정하, 열일곱 살로 외솔의 외가쪽 사촌이였다.
"저쪽에서 남겼다는 대마법사급 공방이나 사가려고 했는데…… 푸른장미의 맨드레이크라니. 가만히 있어도 호박이 넝쿨 째로 굴러 들어오는 우리 대마법사님, 우리 몰래 행운의 물약이라도 몰래 조제해서 먹고 있는 거 아냐?"
꽤 사이가 좋았다 여겼던 친척형의 빈정거림 가득한 목소리에 외솔은 심상찮음을 느끼며 애매하게 웃었다.
"정하 형, 그러니까 얘는……."
"목소리 죽여. 이모랑 이모부 깨면 시끄러워지니까."
따악, 정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방문에서 방 안 끝까지가 몇 개로 중첩되며 늘어나는 느낌과 함께 현기증이 밀려왔다. 장판이 두드득거리며 끊어져나가고 외솔의 방을 제외한 시공이 닫혀들고있었다.
"차원 분리, 준비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지. 이런 데서 쓰게될 줄은 몰랐지만 역시 법이고 나발이고 힘으로 뺏는 게 장땡일 거 같네. 미안 사촌, 개인적인 악의는 없어."
정하가 안쪽 입꼬리만 삐죽 올리며 삐뚜름히 웃었다.
4.
드드득거리며 장판이 뜯기는 소리가 나며 외솔의 방은 끝없는 계단처럼 공간이 복제되며 밀려났다. 방 외엔 끝이 없어보이는 검은 공간 뿐이였고, 그 아래로 콘크리트 가루가 푸스스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시공이 마치 거울 두 개를 마주보고 세웠을 때처럼 층층이 공간이 겹쳐진 채로 늘어나 있었다.
정하가 서 있는 곳에 방 하나, 그 아래에 수십 개의 방이 조금씩 아래로 밀려나며 늘어져 있었고, 정하와 외솔은 열네 개의 늘어진 방 끝과 끝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이모랑 이모부가 다른 친척들은 죄다 떨궈 보냈지만, 난 미자라서 어찌어찌 손님방에 남아 있었거든. 역시, 법이고 나발이고 힘으로 뺏어야지. 마법사가 민법에 매어서 쩔쩔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마법사라는 걸 핑계로 멋대로 굴지 마! 마법사의 본연은 탐구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외솔의 고함에 정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정하는 몇십 개가 복사되어 이어진 외솔의 방을 휙 둘러보더니 이내 외솔의 야구배트를 집어들었다.
가볍게 제 손에 툭툭 쳐보더니 마음에 드는 듯 씩 웃고는 주머니에서 부적을 하나 꺼내 은색 야구배트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발화."
화락,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가 든 은색 야구배트에 불이 붙었다.
차원격리와 발화의 마법을 쓰자 정하의 머리색이 푸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색이 점점 옅어지며 분홍색으로 변했다. 그 모습에 설마 친척 형이 자신을 어쩌겠냐는 안이한 생각을 하던 외솔의 몸이 굳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푸른장미 맨드레이크와 유산으로 받은 공방!"
정하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고, 불이 붙은 야구배트를 들고 외솔과 란웨이에게로 돌진했다.
"우와아앗!"
정하가 불 붙은 야구배트를 들고 달려오자 외솔은 놀라 란웨이를 안고 옆으로 구르듯 피했다. 외솔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배트가 휘둘러졌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금이 가고 후둑후둑 시멘트 부스러기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미친……. 이거 진짜야?"
"얼빠진 소리 하지마, 그 맨드레이크와 공방의 계승권만 넘겨주면…… 뭐, 밥숟갈은 뜨게해주지."
얼이 빠져서 버벅거리는 외솔을 노려보던 정하는 벽에 살짝 박힌 야구배트를 비틀어 빼냈다. 살기등등한 정하의 표정에 외솔은 당혹감을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란웨이가 놀라서 몸이 굳은 외솔의 오른손을 잡은 채로 소리쳤다.
"뭐해요! 이 시공에 마력을 주입해!"
"와악!"
맨드레이크인 란웨이가 소리치자 외솔과 정하는 순간 바로 귀 옆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정도의 충격을 받고 얼굴을 구겼다.
란웨이가 외솔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꾸욱 그러쥐자 외솔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어?"
외솔은 자신의 손에서 방출되는 강렬한 빛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푸른빛의 마력이 외솔의 방 벽을 타고 올라가 그대로 방을 절반으로 쪼갰다.
투둑거리는 소리와 정하와 외솔 사이의 방벽에 금이 가더니 방이 반으로 쪼개져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악!"
"야 너 씨……!"
반토막 난 방과 통째로 추락하는 외솔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놓친 정하는 얼척이 없다는 표정으로 추락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욕을 뱉으며 뒤따라 방에서 뛰어내렸다.
한편, 란웨이가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 외솔의 볼을 세게 꼬집고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그를 정신차리게 했다.
"뭐 하는 거예요! 반격 안 해요?"
"악! 아아악! 와아아악!"
"그만! 우리 안 죽어요! 여긴 분리된 차원이라 바닥이 없으니까!"
란웨이가 귓가에 대고 단호하게 말하자 뇌가 쥐어짜이는 느낌과 함께 외솔은 간신히 진정했다.
"반격이라니……. 난 마법 쓸 줄 모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마법은 저 마법사가 이미 시전했으니 당신은 마력만 주입하면 돼요."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 못하겠어."
외솔이 울먹거리며 되묻자 란웨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잠깐 마른 세수를 하더니 짧게 설명했다.
"마력은 그냥 당신 몸에 쌓여있는 고에너지체에요. 그걸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마법, 즉 그 에너지체로 불을 붙히던지 전기를 생산해내던지 하는 수식이 마법이고요."
떨어지면서도 차분히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울먹거리기만 하는 외솔을 보며 란웨이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즉, 저 마법사가 이공간을 수식으로 만들었으니까. 당신도 마력을 사용해서 이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거예요. 남이 다 지어놓은 이 밥에 숟가락 얹으면 되는 거라구요."
"미안! 역시 못 알아듣겠어!"
"하아……."
외솔이 손을 모아쥐고 사과하자 란웨이의 쿨한 표정이 조각나고 결국 그녀 스스로 얼굴을 감싼 채 장탄식을 했다.
반토막 난 방은 여전히 추락하고 있었고, 고개를 들자 정하가 중간중간 떨어지는 시멘트 덩어리들을 딛고 빠르게 아래로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란웨이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침착하게 외솔을 돌아봤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또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긴해요."
"뭔데? 내가 뭘 하면 돼?"
"그건……."
란웨이가 외솔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고, 외솔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
한편, 허공에서 중간중간 방에서 떨어져나간 잔해물을 도움닫기 삼아 빠르게 뛰어 내려가던 정하가 아래에서 외솔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란웨이를 보곤 살짝 눈을 찌푸렸다.
'저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곤란해.'
정하는 그 스스로도 차원분리의 맹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공간 안에서 마법사는 전능해지지만,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도 같이 갇힌 마법사도 상상력과 마력만 있으면 다 같이 전능해져 버리기 때문에 마법사간의 전투에선 별 의미가 없는 마법이 차원분리였다.
외솔 그 스스로만 모르지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들 가족은 꽤 유명했다.
외솔의 어머니이자, 대마법사의 장녀는 강한 마법사 핏줄간의 혼인으로 마력량 하나는 현존 최고라고 할수있을정도의 손자를 낳았고, 그것은 한동안 집안의 경사였다.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노인은 그의 장녀에게 기쁘게 자신의 공방을 물려주려했다.
허나 그녀는 자신들은 마법과 일절 관계없는 생을 살겠다며 집안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그러자 대마법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장손에게 반쯤 어거지로 공방을 승계했다는 이야기는 마법사들 측에선 희대의 스캔들이었고 차녀인 자신의 엄마는 한동안 창피함에 고개를 들고다니지 못했다는 빌어먹을 이야기 때문에 말이다.
어째서 직계가 아닌 방계에게 물려줄 생각은 하지않았는지, 혹 방계쪽 혈통에 하자가 있는것은 아닌지. 꾸역꾸역 밀려오는 호기심과 악의어린 시선에 정하는 속에서 일어나는 천불을 간신히 눌러참아왔다.
'아깝게 그게 무슨 낭비야!'
마법과 관계없는 인생을 살 거라면, 당연히 마법을 배우고 마학도로 살아가며 가능성도 있는 정하 자신에게 그걸 넘기는 게 맞지 않겠는가! 제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도 못 알아보는 자에게 공방은 사치일 뿐이다.
단지 공방의 계승권 문제였으면 정하도 마법을 써가며 협박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더해 저 멍청이는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지 멸족한 지 오래라는 영생의 속성을 가진 푸른 장미 맨드레이크까지 달고 나타났다.
외솔이 의도하지 않았을 지언정 남이 먹고 싶어서 안달난 케이크를 가져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같은 상황이 된 거다.
"그렇다면 무력 행사로라도 가져가겠어!"
정하는 이를 악물고 야구배트를 휘둘렀다. 반토막 난 채로 추락하던 방에 발을 딛은 순간, 란웨이가 외솔의 곁에서 일어나 달려오더니 정하를 끌어안은 채로 방 밖으로 뛰어내렸다.
"넌 또 뭐야!"
함께 추락하는 경악한 정하를 보며 외솔을 만난 뒤 란웨이는 처음으로, 아주 약간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분리된 차원을 울렸다.
***
란웨이는 맨드레이크다.
지옥에 뿌리박고 자라는 사람의 모습을 한 뿌리를 가진 식물. 그 식물이 사람 사는곳에서 자란다면 그것을 뽑는 순간 지옥과 연결된 구멍에서 악귀란 악귀는 다 기어나오고, 그 뿌리가 땅으로 나오는 순간 지르는 비명에 뇌가 터져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만큼 맨드레이크의 비명은 위력적이다.
란웨이는 정하를 끌어안고 추락하며,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정하는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 유리창 깨지는 소리, 귓가에서 바로 무언가가 폭팔하는 소리와도 같은 것이 뇌에 직격하는 느낌을 받았다. 귀를 막지도 못하고 그대로 눈을 까뒤집은 정하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정하가 왈칵 피를 토하고 목이 꺾이자 드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여러 개로 쪼개져 계단처럼 늘어져 있던 방이 하나로 겹쳐치기 시작했다.
외솔도 란웨이도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자니 저 멀리서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오고있었다.
"코끼리?"
부우-하는 소리를 내며 저쪽에서부터 늘어져 있던 공간을 코로 빨아들이는 거대한 분홍색 코끼리를 보며, 외솔은 정신을 잃었다.
'뭔데? 내가 뭘 하면 돼?'
'그건 날 당신의 패밀리어로 삼는 거얘요.'
'패밀리어?'
'마법사나 마녀의 패밀리어라면 보통 까마귀나 고양이지만, 고등의 마법 생물이 패밀리어가 되는 경우도 없진 않아요. 이 차원은 당신이 현자의 공방과 나를 포기하던지, 저쪽이 이 차원에서 죽던지 둘 중 하나가 아니면 깨지지 않을 텐데 당신은 저 마법사를 못 이기잖아요? 내가 대신 해줄 수 있어요.'
'그럼 굳이 패밀리어라는 걸 맺지 않아도 괜찮잖아? 너…… 엄청 불쾌해 보이는데.'
'……맨드레이크는 상당한 고등 생명체에요. 누군가의 종이 된라고 한다면 기분 좋을 리가 없죠. 하지만 패밀리어가 되어야 내가 무슨 짓을 하던 당신이 다치지 않을 테니까요. 맨드레이크의 비명은 알죠? 그런 걸 지르면 당신이 아무리 귀를 막아도 어디 한 군데는 피가 터질 거예요. 저 마법사에게만 타격을 주려면 어쩔 수 없어요.'
란웨이는 외솔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나를 받아들인다는 마음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외솔이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흐억, 식겁하며 일어났다가 외솔의 몸 위에 쓰러져 있던 정하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 있던 란웨이에게로 떨어진 건지 꺄악하는 갸날픈 비명이 들렸다.
경첩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고 방 안에 환한 형광등 빛이 들어찼다.
"너희 뭐 하니?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정하 너는 손님방에 이불 깔아줬는데 왜 여기에 있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외솔의 엄마가 추궁하듯 물었고, 바닥에 널부러진 란웨이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며 코피를 흘리는 정하와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선 헐떡거리는 외솔이 서로를 황망하게 쳐다보다가 동시에 변명했다.
"베, 베게싸움이요."
5.
"정하 코피 흘리잖니! 요즘 애들은 뭐 이리 격하게 놀아?"
"아, 베게로 코를 정통으로 맞아서 그래요. 정말 괜찮아요, 이모."
"세상에 이게 다 뭐람!"
외솔의 엄마는 황급히 티슈로 정하의 얼굴을 닦고 코를 막았다. 그녀는 한참 수선을 떨다가 눈을 가늘게 뜨곤 정하를 째려보았다.
"마법을 쓴건 아니겠지."
"그럴리가요! 진짜 베게싸움하고 논거에요 큰이모!"
"하긴 너희 둘이 어렸을때부터 친했긴 했지 그래……."
외솔의 엄마는 한참 이어진 정하의 발뺌에 의심을 풀고 셋 다 당장 자라고 으름장을 놓은 뒤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외솔은 침대 위에서 굼실거리며 정하를 쳐다보았다. 정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머리를 부여잡고 작게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와, 씨. 어떻게 분리된 차원에서 받은 충격이 현차원까지 넘어와?"
"맨드레이크니까요. 맨드레이크의 비명은 지옥의 비명, 그 자리에서 미치지 않은건 내가 봐줬기 때문이에요."
새침하게 말하고 눈을 감는 란웨이에게 외솔이 놀라서 되물었다.
"지금 건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정하형 온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뿜어내는 거도 본 거 같은데……."
"원래 분리된 차원에서 입는 육체적 충격은 현실까지 영향을 주지 않아요. 기분나쁜 꿈을 꾼 정도일뿐."
"야, 박외솔! 너 그럼 설마 내가 진짜 널 팰거라고 생각했던거야?"
얼굴을 찌푸리고 티슈를 휴지통에 버리며 이게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있냐며 정하가 짜증을 냈다.
외솔은 다짜고짜 빠따 휘두르는 숟가락 살인마라고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정하는 '그 뒤로 현자의 공방을 당신에게 넘길 때까지 무한으로 죽는 악몽을 꾸게하려고 했었잖아요, 치졸하긴.' 이라며 란웨이가 중얼거는 걸 듣고 이를 부득 갈았다.
"저게 쓸데없이 참견만 안 했어도……."
"어차피 그 차원을 만든 마법사를 죽이지 않는 이상 그 곳에서 나갈 수 없잖아요. 내가 당신을 한번 죽인건 정당방위에요!"
"이 풀떼기가 뭐가 어쩌고 어……! 아 머리 깨지겠네 진짜! 골 장난 아니게 울려!"
"정하형, 진정하고 앉아 봐."
머리를 부여잡고 이를 부득부득 가는 정하를 달래며 외솔은 입을 열었다. 외솔과 정하는 아예 면식없는 낯선 사이는 아니다.
외솔의 어머니가 집안과 척을 지고 나오긴 했지만 어렸을 때 사촌들끼리 장난치고 놀았던 기억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하는 몸 약한 외솔을 등에 업고 같이 눈썰매를 타러가자며 장난스럽게 웃어주던 몇 안 되는 친척형이였다.
"왜 할아버지의 시골집, 그러니까 형네 가족들이 말하는 공방이 왜 가지고 싶은 건데?"
외솔은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들어줄 수도 있어, 라는 말을 삼켰다.
대마법사의 지위는 공방으로 계승된다.
자신의 공방을 가진 자만이 대마법사라 당당하게 칭할 수 있다.
공방이란 게 딱히 별 것도 아닌 게, 강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가 일정 장소에서 오랜시간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하며 지내다보면 그 장소가 마력의 스팟 같은 장소로 변한다.
그 스팟은 마법사가 허락한 자만이 거할 수 있고, 허락하지 않은 자가 들어오면 공방의 주인이 심어놓은 트랩에 걸려 죽게 된다.
그것이 공방.
다만 그것도 지난 날의 이야기일뿐이고, 과거에 비해 마력이 현저히 약해진 현대의 마법사들은 보통 평생을 한 자리에서 연구에만 몰두해도 공방 하나 만들기가 어렵다.
그리하매 현대에 공방을 지닌 마법사들은 보통 선조의 공방을 물려받은 것이다.
만일 대마법사라는 타이틀을 위해 공방을 내놓으라는 거면 그럴 수 없지만, 타인의 공방을 원하는 것이 반드시 대마법사라는 이름 때문은 아니다.
"너같이 처음부터 다 가진 진골이 뭘 알아!"
정하와 같이, 그것과 다른 이유로 선조나 타인의 공방을 원하는 경우도 있다. 정하는 얼굴을 확 구기며 버럭 화를 냈다.
"나도 할아버지가 연구한 모든 마법과, 필사한 유실된 기록들을 보고 싶단 말야! 너보단 내가 필요로 하는데! 가지고 쓸 거도 아니면 나같은 마학도에게 넘기는 게 맞잖아!"
공방에 쌓여있는, 지식을 원하는 경우.
억울함과 아쉬움과 서러움이 녹아 있는 정하의 말을 들으며 외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하지. 엄마 몰래 한번 시골 내려가자. 내가 들어오게 해주면 문제없이 그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거지? 할아버지의 골방."
"골방이 뭐야 골방이! 명색의 대현자의 공방인데!"
단어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침대를 팡팡 내리치며 화를 내는 정하를 보며 란웨이가 작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골방이 어때서……. 우리 가족은 다 골방 현자라고 불렀는데."
"저 풀떼기가 진짜!"
"폭력 반대! 그러니까 그 공방에 들어가는 걸 내가 허락하면 할아버지가 써놓으신 책들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거잖아? 그럼 내가 그건 가능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대신 나 좀 도와줘 정하형!"
외솔이 주먹을 치켜들며 이걸 확! 위협하는 정하를 말리며 제안했다. 외솔이 양손을 마주 모으고 올려다보자 정하는 토끼눈을 하고 되물었다.
"무슨 조건인데?"
"부모님 몰래 마법 좀 가르쳐주라. 그리고 계약이 끝날 때까지 날 좀 도와줘."
외솔은 보자마자 배트를 휘두르며 달려든 정하에게 단단히 화가 난 건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앵돌아진 란웨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부터 쟤를 지켜야 하거든. 쟤가 인간이 되면 돼."
그 제안에 정하가 눈을 깜빡이다 이내 표정이 조금 풀려선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진짜 그 조건으로? 네 손해 아냐? 그리고……."
이내 정하는 잠시 말을 흐리더니 한숨을 폭 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빨간 머리카락이 정하의 볼께에서 살랑거렸다.
"이모님이 내가 너한테 마법을 가르쳐줬다는 사실을 알면, 날 머리가슴배로 삼등분하실 텐데."
탐나는 감이긴 한데 친척 어르신이라는 무서운 벌레가 있는 땡감이 따로없다며 정하는 손사래를 쳤다.
"그 정도는 감수해줘. 형은 나 죽이려고도 했잖아?"
"실제로 죽는 거도 아니잖아. 쩨쩨하게 굴기는."
"넘긴다고 할 때까지 죽는 꿈 꾸는 건 그럼 재미 있는거고?"
외솔이 쏘아붙이자 정하도 할 말이 없는 건지 바닥만 내려다봤다. 정하는 한참 손을 꼼지락거리고 턱을 괴고 끙끙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정하의 승낙에 외솔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하는 그 자리에서 손끝으로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듯 허공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어지는 현상에 외솔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마치 손 끝에서 잉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허공에 녹빛의 빛나는 글이 쓰여지기 시작한것이다.
허공에 쓰여진 글은 외솔과 란웨이 간의 계약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돕는 것을 댓가로 정하가 원할때마다 공방을 개방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글은 대체 무엇으로 썼는지 모르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법적인 계약이야. 에녹어로 쓰는 게 가장 확실하지만 지금은 에녹어 사전도 없으니까……. 계약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어긴쪽의 마력로魔力爐에 금이 가는 술식이야. 몸에서 마력이 줄줄 새나가면 마법시전이 거의 불가능해지지."
이거로 나중에 딴말하면 너 일반인 되는 거다라며 지금 마력걸고 도장 찍자는 정하와 외솔이 투닥거릴 동안 란웨이는 그들을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제가 두르고 있던 외솔의 교복을 벗어내렸다.
계약 문제로 티격태격하던 두 남자애는 숨을 헙 들이쉬며 달빛을 받는 란웨이를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란웨이의 미성숙한 몸은 사람보다는 비스크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달걀 껍질을 까놓은 듯한 매끈하고 하얀 피부였다.
그녀의 가슴 정 중앙에서 깨진 보석 같은 것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혈관과 이어진 채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유리조각, 아니 부서진 별 조각처럼 반짝거리는 꽃잎들이 가슴에서 솟아서 한 송이의 장미 형태가 되어 요요히 달빛을 받았다.
"저래서 맨드레이크였구나……."
처음엔 눈을 제외하면 아무리 봐도 사람인데 왜 저들을 맨드레이크라 부르며 식물로 분류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외솔은 그제야 어째서 맨드레이크가 식물로 분류되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사람이라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인공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석영화 같았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아름다운 색의 종유석이나 석영을 보는 느낌이였다.
란웨이의 가슴에서 솟아난, 알 수 없는 광물질로 이루어진 푸른 장미는 은은한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온 몸으로 피워낸 꽃은 아름다웠다.
신비로우면서도 사랑스럽게 빛나던, 혈관 줄기를 가진 푸른 장미는 어느 순간부터 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조각, 한 조각씩 란웨이의 가슴 속으로 다시 파고 들어갔다.
한 조각, 한 조각이 파고들 때마다 란웨이가 고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내 장미의 조각이 전부 가슴 속으로 사라지자 한참을 달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던 란웨이가 눈을 팟 떠선 외솔과 정하를 빤히 바라봤다.
두 남자애가 빤히 바라보는게 달빛을 받는 이유를 몰라서라 생각한 란웨이는 교복을 주섬주섬 두르곤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신기한 건 알겠지만 저에겐 중요한 거예요. 달빛을 받지 못하면 저흰 메말라버리니까……."
"어…… 어어……."
"그만 잘게요. 오랜만에 비명을 질러서 피곤해요."
정하와 외솔이 벙쪄있는 사이 란웨이가 먼저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속으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같은 란웨이의 머리칼이 이불 위로 흩어져 있었고,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에 가까운 희고 예쁜 몸을 가진 맨드레이크가 달빛 아래 잠든 모습은 마치 달빛으로 이루어진 요람에서 잠든 아기를 연상시켰다.
새근거리며 잠에 든 란웨이를 보며 정하는 신기하네 한 마디 외엔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아직 어린 마법사는 침을 꼴깍 삼키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정하는 비명후유증인 두통으로, 외솔은 하룻밤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두근거림과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