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돌아온 모몬가와 글라스를 기다린 것은 귀여운 외모의 메이드 씨가 아니라 웃는 얼굴로 점잖게 화를 내고 있는 세바스였다. 두 사람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내는 세바스에게 야단을 맞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세바스를 포함한 세 명이 다 같이 방에서 1미터 가량의 큰 크기를 자랑하는 원경[圓鏡]을 바라보는 풍경이 방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에 성공한 모몬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오-!”
“축하드립니다 모몬가 님! 저는 역시나 모몬가 님이라고 밖에 드릴 말씀이 없군요!”
“응 굉장해.”
‘드디어 마을을 구하는 부분이군. 자 그럼 어떻게 행동하면 될까.’
모몬가와 세바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글라스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모몬가와 같이 나가서 마을을 구하는 데에 힘을 보탤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안에 있는 감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의 자신은 ‘인조인간[人造人間]’ 종족이자 게임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근접 전문 딜러직업인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클래스를 지닌 몸이 되고 말았다.
만약 사람이 죽는 것을 본다면 어떨까? 죽이게 된다면? 역시나 죄책감이 없을까.
그러한 불안감을 품은 글라스의 앞에 예상한 대로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본 글라스는....
‘우, 우웨에에에에에엑-!!!!’
글라스는 마음속으로 구역질을 내뱉었다.
그러했다. ‘인조인간’ 이라는 클래스는 게임 상으로는 인외종족이지만, 세부사항 적으로는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텍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카르마 자체는 선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러한 끔찍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종족이외에 ‘프랑켄슈타인’의 전직 퀘스트의 이름이 ‘인간이 되는 과정’인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 글라스는 추측했다.
자신은 사람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사람’으로서 얻게 된 이 끔찍한 감정은 결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으.....으으아악..!!사, 사람이....으웩.....!어....어서 도와줘야...!!! 우웩...모....몸이 안움직여...!! 살려줘....!누가 좀....!!!’
사람이 죽는다. 죽어간다. 갈라진다. 흩뿌린다. 이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아무리 소리를 내지르려 해도 기계 몸뚱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패닉이 가라앉지 않는 한 아마 자신은 이 몸을 다룰 수가 없으리라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게 글라스에게 괴로운 영겁[永劫]의 시간과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우으윽......몸에 반응이 없으니 조금은 났지만......아니, 기계의 몸이라서 그런가....이렇게 빠르게 나아지다니....솔직히 진짜 몸이었다면 지금쯤 기절 했을 거야...차라리 그게 낫겠지만....’
다만 이종족으로 변한 효과가 크게 작용하는지 그 끔찍한 감정의 파도가 비교적 빠르게 잦아드는 것을 글라스는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죽어 넘어가는 것을 봐도 조금 불쾌한 기분 이외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사람을 죽여도 아까와 같은 기분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리라.
글라스는 슬픈 진실을 깨달았다.
‘그래.....결국은 나도…….’
“글라스 씨, 괜찮아요?”
글라스가 내면에서 끔찍한 감정으로 고통 받는 오랜 시간 동안 모몬가는 세바스에게 나자릭의 방어등급을 올리고 완전무장한 알베도를 호출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였다. 한참동안 말이 없이 거울만을 바라보던 글라스를 보고 모몬가는 혹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지 걱정했고, 현재에 이르러 글라스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응. 이제는 괜찮아.”
“역시.....저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지만, 글라스 씨는 달랐던 모양이네요.”
“끔찍했어. 하지만 이제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역시나 저는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거겠죠....”
체념하듯 내뱉는 모몬가의 말을 글라스는 이어나갔다.
“그래도 구할 수 있어.”
“....예?”
“구할 수 있어. 터치 미 씨처럼.”
글라스는 실제로 터치 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거짓말을 하는 느낌에 모몬가에게 미안해졌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나자릭의 앞날을 위해 힘쓸 자신을 위해서도 모몬가는 원작과 같이 잔혹해져서는 안됐다.
물론 악한 일을 일삼는 쓰레기들은 제외하고.
기분이 좋아진 듯 모몬가는 이내 글라스에게 말했다.
“......그렇죠, 그럼 가볼까요?”
“그래, 가서 ‘구하고’ 오자.”
거대한 힘을 지닌 두 존재는 이윽고 ‘전이문’을 통해 거울 속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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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로 이동한 글라스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도, 공포도 끔찍함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을 죽이려던 병사를 보고 더욱 커져가는 단 하나의 감정을 느꼈다.
분노.
‘프랑켄슈타인’ 클래스를 달성하는 것으로써 얻게 되는 패시브 스킬중 하나인 [악생즉사-惡生卽死]의 특징은 악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강해질수록 공격력이 강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임 상으로는 그저 버프와 같은 스킬로써 특정 종족 및 속성과 마이너스 카르마를 지닌 적에게 강해지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글라스가 약자를 즐겁게 죽이던 병사에게 분노를 느끼자 몸의 스테이터스가 확연하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눈앞의 병사는 인간이고, 속성 따위 가지고 있을 리도 없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과 상대의 카르마가 연동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이 카르마가 낮아봤자 얼마나 낮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괴로움으로 내면에서 구토를 해도 움직이지 않았던 기계 몸은 자신의 분노에 맞춰 온갖 희소 광물로 이루어진 근육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글라스 씨....참지 않아도 괜찮아요.”
“...모몬가.”
“저는 아이들의 상처를 돌볼게요. 제 힘은 나중에 시험해 봐도 되니까, 마음껏 날뛰어주세요.”
그 말을 듣고 글라스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눈앞의 병사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갑자기 허공에서 출현한 여성을 닮은 기계괴물과 가면을 쓴 괴한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두 존재의 괴이한 생김새에 놀라 공격조차 못하고 있던 그 병사는 이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반신이 그대로 날아가며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다.
글라스는 두렵거나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감정은 차가운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을 웃으며 죽이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이 녀석들 때문이다.
이 녀석들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그저 눈앞의 살인마들을 조각내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 이내 글라스는 뒤에서 공포에 물든 채 바라보는 또 다른 병사를 빨간 유리를 닮은 무감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히...히이...”
퍼억
공포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 병사 또한 머리가 날아간 채로 침묵했다.
“...약하네요. 우리가 아무리 레벨100이라지만... 글라스 씨 그냥 평범한 공격이 아니었나요?”
“그래. 약해.”
그런데도 더 약한 사람을 죽이면서 웃고 있었다.
즐거운 듯이.
나는 이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나 슬프고도 화가 나는데-!!!!
“모몬가. 부탁할게.”
“예. 걱정 마세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글라스는 모몬가를 스쳐지나가며 울고 있는 두 아이를 보았다. 치료를 받았음에도 모몬가와 글라스의 인간이 아닌 듯한 외모 때문인가. 둘은 덜덜 떨면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병사들의 손에 의해 죽었다.
그 사실만이 글라스의 뇌리에 박혀 분노를 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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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병사들을 오로지 손으로 터뜨려 죽인다.
처음에는 의문으로 물들었던 표정들은 이제 공포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베고, 찌르고, 쥐고, 후려치고, 으깨고, 휘두르고, 터뜨리고.
같은 것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폭풍이 살육을 행하던 병사들을 그대로 ‘갈아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글라스는 분노의 포효나 절규 등을 전혀 내지르지 않았다.
오로지 무표정으로.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일이라는 듯이 조용히, 무참히 병사들을 도륙[屠戮]해 나갔다.
한참동안 그것을 반복하던 글라스는 이내 눈을 들어 남은 병사들을 확인했다.
저 멀리에 아직 여러 명의 보병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분쇄기[粉碎機]앞의 고깃덩이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글라스가 몸을 날리려는 순간, 원경에서 보았던 기사들의 대장인 한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론데스 디 그람프 였던가.
수없이 많은 병사들을 단칼에 죽이던 괴물이 자신을 바라보자 아직 남아있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공포에 떨고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을 글라스는 끝없는 분노의 저편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간신히 꺼내올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분명 저 녀석이 통신을 위한 뿔피리를 가지고 있었지.
생각이 끝나고 분노로 빛나는 창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야를 갈랐다.
그저 찰나의 시간. 글라스는 론데스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기괴하게 생긴 손이 휘둘러지자, 론데스를 제외한 기사 전원의 목이 소리도 없이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론데스는 그저 눈을 깜박인 것의 대가로 주위의 동료들의 죽음을 얻었다.
“으....으아아아아아-!!!!”
절규한다. 신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던 자신이 이런 괴물에게 죽는다니 말도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죽을 수는....
“불러.”
“허.....억....! 뭐....!”
글라스는 큰 키로 론데스를 압박하며 눈을 가까이에 댄 채 말했다.
“네 남은 동료. 불러. 뿔피리를 사용해.”
그리고 뿔피리를 사용하라며 론데스를 재촉했다.
“뿌....뿔피리는 저쪽에....!”
“아.”
론데스는 더 이상 저항할 생각조차 없이 뿔피리의 행방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글라스의 기억과는 달리 뿔피리는 전혀 다른 기사가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의 소지품에서 뿔피리를 찾아낸 글라스는 그것을 론데스의 앞에 던졌다.
“불러.”
“허...억.....히....히히.....!”
론데스는 하늘에서 내려준 보물같이 그 뿔피리를 잡고 힘차게 불었다. ‘뿌-우우우우-!’하는 소리와 함께 뿔피리의 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말을 탄 병사들이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동요하며 퇴각해갔다. 글라스는 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헤헤...헤헤헤헤.....! 남은 녀석들이 도, 도착하면....너는 죽은 목숨이다!!”
“...”
“그, 그러니까 나를 살려두는 게 좋을 걸? 그러면 인질로 삼아 목숨만은..‘퍼억’
고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론데스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즉사[卽死]했다.
개운하지 않다. 단지 글라스의 머리 안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기계 몸인 탓에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녀였으나,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분노를 안고 있는 끔찍한 감각이 온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병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던 그녀가 내면과는 다른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가져와.”
그녀는 자신의 몸을 태우는 분노를 갈무리 하지 못한 채 뒤를 돌아 마을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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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몬가.....아니, 이제는 아인즈라고 해야겠지. 아인즈는 글라스가 병사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동요한 마을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분명 정신을 안정시키는 아이템의 사용이 불가피했으리라고 글라스는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잔혹하게, 많이 죽였다.
거기다가 원작과 똑같은 전개라고는 해도 자신의 화풀이를 위해 남은 병사를 그냥 돌려보내고 말았다.
글라스는 그것에 책임감을 느껴 자신이 알고 있는 ‘슬레인 법국[Slane Theocracy]’에 대한 정보를 아인즈에게 적당히 서술했다. 물론 죽기 전에 물어봤다는 식으로 둘러댄 것은 당연하다.
“좋아요 글라스 씨, 지금은 진정 되신 건가요?”
“그래. 괜찮아 졌어. 그것들을 보면 또 화날 거 같지만.”
“글라스 님....분노는 몸에 좋지 않사옵니다. 그러한 하찮은 것들에게 베푸시는 폭력의 한 조각조차 과분하오니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옆에서 알베도가 글라스를 생각하는 모양새로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꺼냈다.
물론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춰 입은 상태로.
“푸흡.”
“글라스 님...?”
“아냐. 알베도. 고마워.”
자신의 기분을 풀어준 알베도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글라스는 아인즈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인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은 정보를 좀 더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살려 보낸 녀석들이 무리를 끌고 돌아 와주면 일이 더 쉬워지겠지만....아, 글라스 씨. 이번엔 죽이면 안 됩니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한 글라스는 이내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을 치르는 광경에 눈을 돌렸다.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건 어떨까?’
글라스는 생각해 보았다. 분명 나자릭에는 부활을 위한 아이템이 산을 쌓을 정도로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고, 분명 거리낌 없이 그들을 위해 사용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금 가슴 속을 뒤져보자, 그들을 위한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끔찍한 무료함 속에서 글라스는 이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마을의 촌장이 급하게 문을 열며 아인즈에게 말했다.
“아, 아인즈 님! 이 마을에 말을 탄 전사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남은 주민 분들을 촌장님의 집으로 모아주십시오. 촌장님은 저와 함께 광장으로 가시지요.”
“그.....저 분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촌장님은 두려움을 품은 눈으로 글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인즈는 짐짓 화난 음성으로 촌장을 향해 말했다.
“촌장님. 두려우신 건 알겠지만, 저의 동료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아주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아!! 죄송합니다! 우리 마을을 구해주신 은인이신데 이런 추태를...!!”
“아니. 미안한건 이쪽.”
글라스는 촌장의 사과에 무신경한 말투로 대답하며 일어섰다.
“내가 지킬게. 무섭겠지만.”
그렇게 아인즈와 글라스는 촌장과 함께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촌장이 말했던 대로 각각 다른 무장을 하고 있는 기병들이 대열을 맞춰 들어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말을 앞으로 몰아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촌장을 지나쳐 알베도에서 오래 머물렀다가 이윽고 아인즈, 그리고 글라스에 이르렀다. 그는 글라스를 알베도보다도 오랜 시간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리 에스티제 왕국의 왕국전사장 가제프 스트로노프다. 이 인근을 어지럽히고 다니는 제국의 기사들을 토벌하기 위해 전하의 명을 받들어 뭇 마을을 순찰하는 중이다.”
주위의 웅성거림을 듣지 않고 글라스는 계속 가제프 스트로노프를 바라보았다.
영웅, 가제프 스트로노프
나는 이 자를 살려야 할까?
더 이상 사람이 죽어도,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예정대로 아인즈가 죽이게 두어도 괜찮지 않나? 아니면 산양의 먹이가 되는 건 어떨까?
아니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쫘ㅡ아아아악ㅡ!!
“?!”
“그....글라스 씨!”
어마어마한 파열음과 함께 글라스가 자신의 뺨을 양 손으로 때렸다.
‘아니야.....내가 아인즈에게 뭐라고 했었지?’
‘그래도 지킬 수 있어. 터치 미 씨처럼.’
그래, 그러면 괜찮은 거잖아.
화낼 수 있으니 됐잖아.
“그래 됐어. 그거면 돼.”
다시금 마음을 바로잡자. 일반 사람이 아닌 나자릭의 지도자중 한 명으로써 모두를 위해서라도, 나는 바로서지 않으면 안 돼.
설령 그것이 만들어진 가짜 자리일지라도.
“저기.....괜찮으시오?”
글라스가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때린 뺨은 기계 몸으로 되어 있어 튼튼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가제프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글라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응. 난 괜찮아.”
“방금 설명 드렸듯, 리 에스티제 왕국 전사장인 가제프 스트로노프라 하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쭈어도 괜찮겠소?”
글라스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하다가 이내 가명을 대기로 결정했다.
“글라....도스. 난 글라도스야. 앙 감자띠.”
“글라도스....반갑소. 그대와 그대의 친구가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었다 들었소만.”
“그냥 화나서 다 죽인 것뿐인데.”
그 말을 들은 가제프는 조금 주춤하다가, 이내 글라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 마을을 구해주셔서 고맙소.”
“내 친구에게도 인사해줘. 마을 사람들을 도운 건 저쪽이니까. 어이 고운.”
뒤에있는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 쓴 아인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글라스는 가제프에게 아인즈를 소개시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국전사장 님 저는 아인즈 울 고운이라 합니다.”
“동료분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그렇게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있던 중 한 기병이 숨을 헐떡이며 광장으로 급하게 들어왔다.
“전사장 님! 마을 주위에서 수상한 인원을 다수 확인했습니다! 마을을 포위하는 형태로 접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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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로군. 천사를 소환한 것으로 보아 슬레인 법국의 육색성전이 확실해 보이오.”
가제프는 포위하는 자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글라도스 공, 고운 공, 그대들의 힘을 빌려주실 수 있겠소?”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군요. 저의 친우는 현재 조금 싸우기 힘든 상황이라서요.”
“그럼 고운 공은 어떠십니까?”
“.....거절하죠.”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저희만으로 상대해 보겠습니다. 대신에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을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글라스의 대답에 가제프는 부하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제프는 아인즈의 말을 듣고 설득을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글라스의 눈을 한번 더 보고는 그 생각을 떨쳐냈다. 자신이 마주했던 저 건조한 사막 같은 눈을 가진 여성의 심기를 건드리면 아마도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들의 부하들과 함께 말에 올라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럼 글라도스 공, 고운 공. 마을 사람들을 구해 주신 것을 깊이 감사드리오. 이후 꼭 리 에스티제 왕궁에 들러주시오. 내 반드시 보답을 해드리리다!”
“전사장 님,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전사장 님의 몸을 지켜줄 것입니다.”
“....고맙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은혜는 잊지 않으리이다.”
“마을 사람들은 걱정 마십시오. 이 아인즈 울 고운의 이름에 걸고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대화를 끝낸 가제프는 말을 몰아 휘하 병사들과 함께 마을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양광성전과 전투에 돌입하게 되는 가제프를 글라스는 인조인간의 높은 시력으로 아무리 멀어져도 가제프의 모습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글라스 씨. 괜찮으세요?”
“뭐가.”
“.....전부 찢어 죽이시고 많이 아파하셨잖아요.”
분명 글라스는 적지 않은 시간 전에 병사들을 거침없이 죽이며 ‘좀 더 가져와’라며 끝없이 분노를 불태웠으나, 이제는 달랐다.
저들은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것이지만, 그 근원은 끝없이 괴로운 분노가 아니라 선한 이를 지키기 위한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
가제프 스트로노프.
그 남자의 최후를 생각하는 것으로 자신은 다시금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가제프를 농락하며 죽이려 드는, 자신을 분노케 만드는 저 악인[惡人]들을 나자릭에 끌고 갈 몇 명을 제외하고 전부 죽이리라고 글라스는 가볍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