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천년쯤은 가뿐히 지난 옛시대의 것이었을 것이다.
무지는 죄가 아니나 무지가 죄를 낳는다. 분명히 그런 구절이었다. 현대인도 잊고 사는
당연하지만 아무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애시당초 죽을때까지도 이해하지도, 깨닫지
도 못한 이들도 어딘가엔 있을 그 상식을, 세계를 관통하는 극단적이지만 명료한 진리
를 수백년도 아니고 천년단위의 옛 늙은이는 통탄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짧지만 세상의 부조리 그 자체를 말하는 그 문장을 나는 좋아했다. 나처럼 같은 구절을
읽었거나 혹은 그 전부터 생각했거나 혹은 듣고나서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
했다고 착각하는 이들 모두 이 문장이 가진 힘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알아도 안되
는게 인간이고 몰라서 안되는 것도 인간인 것이다.
내 이름은 로에 샤드로. 위의 문장에 영감을 받고 살아왔지만 여전히 멍청한 남자다.
덧붙이면 이 일기장의 주인이다. 삶의 기록은 푸념, 일상, 비밀등을 안보여주는 척 하면
서 결국 남들이 언젠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하는 행위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
는 내가 죽을때까지 이 일기에 나로부터 시작되는 세계 전부를 적고 그것을 전력을 다해
감출 것이며 마침내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원한다.
나는 오래된 물건들을 감정하는 일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내 일기는 일기답게 나에 관한
많은 자화자찬, 고뇌, 그리고 자기비판 섞인 일상을 적겠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밝혀낸 낡
고 오래된 것들에 대한 업적들이 내용의 중심을 차지하게 될것이다. 여기까지만 읽었다
면 당신은 내가 자기만족에 심취한 인물이라는 것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최대한 천재적인 모습으로 나를 묘사할 것이다. 내 일기니까 내 맘이다.
음...갑자기 머쓱해진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만 줄이고 1년전에 있었던 의뢰건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아마 비가 오는 날이었을 것이다.
1.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전날 먹은 술 덕에 이래저래 정신이 오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들
렌이라는 곳이 축제의 도시라고 하는 것처럼 뭔가 아무것도 아닌걸로 거하게 축제를 열었는
데 사람 바글바글하는 곳을 혐오하는 내가 왜 거기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뭔 바람이 불
었는지 술을 마셨고, 그리고 어쩐지 텐션이 하늘을 찌를 것같은 일평생 처음본 아저씨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릅 부르다가 내 주머니에 동전 한푼 없다는 사실에 술이 확 깨서 도
망치듯 집으로 돌아왔었다. 취기에 흥에 겨운 그들이 혼쾌히 술값을 내줬기 때문에 망정이
지 안 그랬으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부여잡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력 1023년. 아틀렌, 또는 야
들렌이라고 불리는 대륙 서남쪽 도시 위의 하늘은 먹구름 속에 때아닌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
다. 방은 내가 널부러져 있다시피한 테이블 위에 잇는 양초와 문쪽에 놔둔 램프로 겨우겨우
어둠 속에 일렁이는 옅은 빛으로 좁고 지저분한 방을 비추고 있었다.
방은 내 수입만큼 좁았고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었다. 전부 내가 벌려놓은 것이라 뭐라 할말
은 없지만 대충 책, 술병, 옷, 쓰레기 등등... 아. 종이더미들을 빼먹었네. 내가 막 적어놓은 것
들이랑. 편지들이랑. 그리고 청구서들이다.
번개가 쳤고 내 머리도 잠깐 짜증과 통증이 왔다. 술을 좋아하지만 혼자 마시고, 어울리는 것도
안 좋아하고 항상 처박혀있는 내가 뭔 배짱으로 이상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종이더
미들 중에 하나를 집어들고 다시 테이블에 늘어진다. 생각해보니 지인에게 편지가 왔었다.
샤넷 페코.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내용이야 안봐도 뻔하다. 그녀는 내
단골 의뢰주 중 한명이다. 그리고 항상 [이틀 후에 갈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라는 간단명료한
글을 찾아오기 이틀전에 보내온다. 편지가 온 날짜를 확인한다. 이런 미친. 오늘이 아닌가.
허겁지겁 일어나 대충 옷을 주워입고 정신 좀 차리라고 물 한잔을 마시곤 초들을 더 갖다놔 어둑
어둑한 방을 밝힌다. 술병같은거만 대충 치워놓고 창문을 본다. 낮인지 밤인지 하늘을 봐선 알수
가 없어서 한숨이나 쉬려는데 귀신같이 창밖으로 마차가 한대 멈추는게 보인다. 검은 우산이 둘.
틀림없는 그녀다.
검은 우산 중 하나가 살짝 들려진다. 그 아래로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은발의 묶은 머리, 반쯤 감킨 의욕제로의 붉은 눈동자. 눈이 마주쳤다. 나는 헤헤헤 실없이 미소지
어보이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앉아도 되지?]
[응. 애당초 앉을 곳도 거기밖에 없지만.]
내 방에서 유일하게 깨긋한 의자에 그녀를 권한다. 힐끔 그녀 너머를 쳐다보니 녀석은 늘 그렇듯 문
바로 앞에서 빈정거리듯 벽에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다. 그늘이 져도 뭔가 불길하기 작이 없는 날카
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녀석은 샤넷 페코의 연인...이라기 보다는 보디가드 정도되는 듯 싶다.
[뭔가 마실꺼라도?]
[아니. 오늘은 빨리 숙소로 가서 쉴꺼야. 물건만 놓고 갈꺼야. 내일 다시 올려고.]
흠. 아무래도 지금은 저녁쯤 되나보다.
[놓고 간다고?]
[바로 알 수 있으면 다시 가져가고.]
[맘대로 해.]
나는 물 한잔을 따라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머리의 지끈거림이 사라지지 않아 매우 고달펐다.
[이거야.]
성격답게 그녀가 짧고 간결하게 준비된 물건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외팔의 젊은 마녀. 샤넷 페코.
사실 샤넷 페코는 스승의 이름이고 본명은 리아네 세니그리트...라는 것 같다.
그녀는 내가 관심갖고 있는 옛 물건들 중에 고대서적,마도서,마도판 등 마법 관련 물품들을 수집하
는 인물이다. 그녀의 관심사와 먼 전리품들은 모두 적정한 감정가를 위해 나와 같은 사람들을 거쳐
현금화된다. 젊고 가녀린 몸이지만 마법사로써의 실력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으로 마법같은
것을 단 한개도 부리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직접 세계의 희귀한 곳, 위험천만한 곳을 직접
가서 거기서 얻은 물건들을 직접 손에 넣는다. 내가 인맥이 적긴 하지만 길드같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홀몸으로 이렇게 매번 희귀물품들을 가져올 정도의 실력자는 이녀석뿐이다.
[대충 봐서 알 것 같으면 좋겠지만 그럴리는 없을 거고... 일단 내일 다시 올떄까지 알아볼 수
있는건 조사해줘.]
[흠.]
그녀가 내민 것은 새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깨끗하고 두꺼운 책이었다. 800 페이지는 거뜬히
넘어보이는 두깨에 꽤 튼튼하게 만들어진 짙은 푸른빛의 커버, 장식이 꽤 화려해서 태두리가 꽃장식
처럼 화려하고 무늬도 치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커버에 제목이 안 써져있는데?]
내가 물었다.
[그림이 다야.]
[꽃이랑 관련된 책인가?]
[펼쳐봐.]
첫장을 넘기자 알 수 없는 고대어가 적혀있다. 이 세상에서 해석할 수 없다고 전해지는 먼 과거의 언어.
신의 언어. 세일리시아 어, 또는 마르몬드 어. 이해는 못해도 이게 적혀있다는 것만으로 물품의 가치가
상승하는 기분이 든다.
신나서 다음장, 그리고 또 다음장, 다음장의 다음장.
기대와는 달리 안의 페이지는 조금 옛스러운 명칭이 있지만 현대어와 각종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요리 레시피?]
고기 맛있게 굽는 법, 채소 다듬는 법, 소스 보관법, 스프 끓이는 법.
책의 내용은 놀랍게도 평범함 그 자체였다. 나는 더 위대한 뭔가를 기대했다가 급 우울해졌다.
[요리책이잖아 이건...]
[요리책 맞을꺼야.]
그녀는 가볍게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눈은 날카롭지만 언제나 나만큼 의욕제로의 기운을
품고 반쯤 감켜있는 것 같다. 그 눈만큼 힘이 빠진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책상태도 거의 새책이나 다름없고. 그냥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요즘 요리책 아냐?]
[그게 특이한 점이야.]
그녀가 예상외로 눈을 밝히며 말했다. [특이한 점?] 하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잇는다.
[내가 이걸 발견한건 카이엘 아래의 오래된 유적지야. 너무 오래되서 지하 미궁도 거의 원시밀림 수준
이었던 곳이었거든.]
[호오?]
애당초 난 소도시 카이엘에 가본적도 없고 그 근처에 유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거기는 전부 낡고 부패했어. 하지만 이 책만 보다시피 요즘꺼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게다가 조약하긴 하지만 마법으로 보호도 되어 있었고.]
그건 특이하다. 나중에 누가 거기다가 책을 숨겨놨을 리도 만무하고 그렇다쳐도 이상하다.
[보다시피 그냥 요리 레시피들이 적힌 요리서적이야. 중요한건 연대정도? 어차피 난 요리에 관심없으
니 보지도 않았지만. 뭔가 특이할것 같아서.]
평범한 요리서적. 하지만 오래된 물품은 연대만 알면 그 가치는 상승한다. 상태도 좋고 책 자체도 이쁘
게 디자인되어 있다. 엄청난 물건은 아니라도 고서 수집가나 혹은 잊혀진 요리비법이 적혀있을 수도 있
다.
[오케이. 일단 들여다 보고 내일 보고하지. 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서 모르겠으면 책 전문가를 불러볼께.]
[그래. 다만 비싸보이지 않으면 내일 그냥 가져갈께. 쓸데없는데 돈쓰기 싫거든.]
[부자면서.]
[금화는 해픈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법이야.]
[...구두쇠.]
[응? 뭔가 말했어?]
그녀가 웃으며 일어선다.
[아니야. 잘가. 내일 보자고.]
나는 같이 웃어주며 그렇게 말하고 [계단 조심해 좁고 경사졌으니까 위험하거든.] 하고 덧붙여주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간 후 처음부터 말없이 벽에 기대고 서있던 남자가 따라 나갔다. 나는 한숨을 한번
시원하게 뿜어주고, 그리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빗소리 속에 의뢰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