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브랜든씨가 그 무거운 입을 연것은 식사가 거의 끝나고 그가 챙겨온 보드카 반병과 내가 가져온
브랜디 반병을 비운 후였다. 그토록 과묵하고 자기일에 순수하게 충실한 사람을 지금까지 나는 본적
이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보처럼 무시하는 모양이지만 내게 그의 그런점은 존경스러운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이정도론 아무것도 아니오. 술에는 나름 자신이 있거든. 내일 새벽 바로 출발할 수 있을테니 걱정마
시게.]
조촐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식사를 마치고 술로 몸을 따뜻하게 뎁혔다. 그도 나도 낮보다는 훨씬 누그
러져 있었다. 행복이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찾아온다. 큰 불행에 민감할뿐 소소한 것이 주는 기쁨의 연
속이 인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아마도 그도 그것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루트라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나는 내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아무것도 없는 몇일 걸릴 경
로를 부탁하고 또 그에 해당되는 돈을 내지 않았기 떄문이었다.
[미안할거 없소. 야들렌에서 루테르나까지 가는 길이 원래 다니라고 만들어진 것이고 이렇게 좋은 물
건도 받았잖소?]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렇게 말하곤 붉어진 얼굴로 만연의 미소를 지었다.
[하배니아산 시가는 귀한 물건이지. 거의 수십년만에 만져보는 것 같구만. 이게 좋다는건 알지만 막상
살려면 손이 떨려서 말이오.]
그는 예상외로 내가 낸 경비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하배니아산 시가는 고급 사치품이다. 돈을
주면 못살것도 아니지만 막상 사기엔 터무니없을 정도의 가격이다. 나야 원래 늘 거지지만 정신이 나가
가지고 인생 전반을 술과 담배 소비에 버린 인간이라 그렇지 일반인 기준에서 이런것들을 자주 만나기는
힘들긴 할 것이다. 시가의 가격은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지도 않고, 보관만 잘한다면 수명은 무한. 묵힐
수록 가치는 계속 상승하게 되는 물건이다. 내 나름대로 아깝기도 했고, 그리고 조금 모자란지 아닌가 의
심하기도 했지만 이정도면 이쪽도 마음이 편해진다.
[소문을 들은적이 있소. 물건을 감정하는 일을 하신다고?]
[예. 뭐...사실 거의 백수지만요.]
감정사라고 스스로 지칭했지만 실은 그냥 옛날 물건들을 좋아하는 수집가일 따름이다.
내 전문분야는 마법이 깃든 물건같은 것이고 세상에 검과 마법이 활개를 친다고 해도 그런 희귀한 물건들
이 나한테 잘 찾아오지는 않는다. 이번처럼 전혀 예상밖의 물건을 받게되면 나는 최소한 내가 이해한 범위
의 허접한 조언을 해주고 푼돈을 받거나, 아니면 거래를 잘해서 구매하여 소장하거나, 아니면 되파는 일을
할뿐이다.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꼬는 재주가 있기 떄문에 수집욕과 만취에 대한 갈망이 이윤창출을 심히 방해하여
늘 빈곤하다. 육체노동은 질색하고, 그렇다고 머리가 비상한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계속 연명하고 있다.
샤넷 페코라는 마법사를 만난 것은 정말 내겐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정말로 나의 이 괴상한 삶을 지탱
시켜주는 몇 안되는 단골 중 하나다.
[...이 파이프는 괜찮아 보이오?]
그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안경집같은 작은 케이스를 꺼내더니 그걸 열며 말했다. 작은 케이스 안에는 일직
선의 길죽한 흡연용 파이프가 있었다.
[젊었을때 지인에게 선물러 받았던거고 그후 지금까지 쭉 써온거라 낡았지만... 그래도 망가진 곳은 없다오.]
[흠. 어디 볼까요.]
파이프를 쓰진 않지만 멋진 취미라고 생각한다.
나는 파이프를 받아들고 유심히 형태,질감,각인된 작가 등을 찾아보았다.
세월을 견딘 브랜든씨의 파이프는 어두운 색의 목재 파이프였다. 흠집도 없고 담배를 태우는 구멍 부분 태두리에
자연스러운 그을림 자국이 조금 있을뿐 상태는 최상. 고급스러운 질감과 잘 길들여진 파이프 특유의 진하고 아름
다운 주름이 인상적이었다.
[에뤼브 파이프네요.]
[파이프는 에뤼브가 제일이지.]
[맞습니다. 비싼거 선물받으셨네요. 하하.]
흡연용 파이프를 만드는 소재는 여러 나무, 해포석, 점토, 장미목과 같은 특수한 나무의 뿌리, 나무화석, 동, 심지
어 옥수수대로도 만들어진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지만 가장 적합한 소재는 장미목 뿌리 덩어리로 그 중에서도 극히
한정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에뤼브 나무의 뿌리는 제일 값진 것에 속한다.
[작가의 이름은... 드렌!]
[왜 그렇게 놀라시오? 유명한 사람인가보지?]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제가 아는 드렌이라면 이 파이프는 엄청나게 비싼 값을 받을겁니다!]
파이프 담배는 현재 종이담배가 만연하는 시대에 한물간 인상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터운 매니아층을 확
보하고 있다. 단순히 골동품, 담배를 태우는 기구를 넘어 예술품으로써 거액의 돈을 주고도 구매할 큰 부자들이 수
두룩하게 분포해 있다고 들었다. 드렌은 현재에도 활동하는 [메스구트 파이프 클럽]이라는 길드의 창시자고 파이
프를 만드는 장인이다.
현대 시대. 검사와 마법사, 상인들만이 길드라는 집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문화혁명의 시대라고 스스로 평가하는 발전과 평화의 시대. 에스테리아 대륙에서 길드의 개념은 점차 같은 전
문직종들의 연대집단,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단체, 탐정 조직 등 천차만별, 다양함의 극치를 달리는 단어가 되고 있
다. 심지어 이 땅엔 [프라데이아의 포크]라는 채식주의자 집단마저 존재한다. 세상 다양한 사람이 점점 개성의 존중
을 외쳐가고 있는 것이다.
[그정도로 비싼 물건이었소?]
[여기 적혀잇는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체로도 분명히 매니아들 사이에선 엄청난 값을 부를겁니다.
그리고 숫자가 만약 한정생산으로 매겨진 것이라면 그 값은 더할꺼에요. 제가 장담하는데 상상하는 것보다 더 받을
겁니다.]
[허허...]
나도 허허다. 작은 도시의 조용하고 소박한 마부가 이런 고가품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세상은 넓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고맙소. 정말 고맙구만.]
그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나도 뭔가 뿌듯해졌다. 어찌되었든 고향사람이 잘 되면 좋은게 좋은 것이다.
[하지만 팔진 않을거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이프거든.]
[그런 물건은 묵힐수록 돈이 될겁니다. 하하.]
[돈은 관계없소. 이건 이미 내 일부거든.]
[조금 아깝네요.]
[하지만 가치있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긴 하군.]
그는 흡족한 얼굴로 한참동안 자기가 매일 보았을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바라보더니 케이스에 소중하게 넣었다.
기뻐하는 그의 얼굴은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것이라기보단 마치 가족이 칭찬받은 듯한 형태의 것이었다.
돈이 다가 아니다.
이해하는 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그 소박함을 나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밤은 더 칠흑같은 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달빛과 별빛이 가루처럼 뿌려진 밤하늘 아래서 우리는 한잔씩을 더 하고 잠을 청했다.
작은 벌레 소리와 기분 좋은 바람.
오랜만에 기분좋게 잠을 잤고, 그렇게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마차는 달렸다.
브랜든씨는 자기가 말했던 것처럼 늘 그래왓듯 부지런하고 정직했다. 나는 가장 빠르고 편하게 루테르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