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드러나는 것
"【카우르스 힐드】"
엄청난 양의 번개 화살이 발사되었다.
몬스터에게 있어 저승사자의 낫과도 같은 뇌탄의 일제 사격이,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미궁의 한쪽 구석에서 폭발했다.
해골 양, 늑대 머리 인간, 도마뱀 인간, 그리고 용종 몬스터까지.
예외 없이 대량의 재로 변해, 폭발을 반복한다.
"이, 일격에.... 저렇게 많던 무리를...."
"게다가, 모든 개체의 '마석'을 정확히 관통하다니. 광역 공격 마법이면서, 저런 정밀 사격이라니... 지금의 나로선 흉내도 못 내"
'일소'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광경을 앞에 두고, 벨은 얼굴을 굳혔고, 그 옆에 있는 류 또한 감탄과 감탄 사이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시선 끝에 있는 엘프는 금빛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뒤돌아보았다.
"1급에 이른 주제에, 뭘 그리 겁먹고 있느냐. 모든 사정거리에서 십분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두거라."
"아니, 그런 거 할 수 있는 건 스승 정도라고...."
류와 같은 금발의 백요정(화이트 엘프) - 헤딘 셀런드는 순간 이동했다.
정확히는 순간 이동으로 착각할 만큼 빠른 움직임으로 벨의 눈앞까지 다가온 그는, 성목의 가지처럼 가늘고 유연한 한쪽 다리를 휘둘렀다.
"끄악!?"
"말대답하지 마라, 멍청한 놈아."
"죄,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요의 마법 지팡이(힐드 슬레이브)】! 용종(페루다)도 쓰러뜨릴 정도의 위력으로 벨을 차지 마! 나라도 이 정도까진 안 해!"
"이 정도로 타협하다니, 웃기지 마라, 계집. 응석이나 받아주며 썩게 만드는 너희들 대신에, 내가 조교와 조정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감사받을 줄 알아야지, 욕먹을 짓은 하지 않았다."
자세를 전혀 무너뜨리지 않고,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창과 같은 발차기를 날리는 헤딘.
배에 꽂히는 구두 밑창에, 과거의 개조(레슨)에 따른 조건 반사로 음속으로 사과 & 감사를 하는 벨.
마지막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배를 감싸 쥐고 항의하는 벨을 끌어안고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는 류.
어이없다는 듯 헤딘은 【질풍】을 비난하고, 무서운 말을 내뱉는 전 요정 왕이자 현역 폭군에게, 눈을 크게 뜬 채 눈꼬리에 눈물을 글썽이는 벨은 덜덜 떨었다.
백탁색으로 물든 벽면, 황량한 묘지를 연상시키는 차가운 지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그저 통로일 뿐인데도 방처럼 넓었다.
현재 위치의 이름은 '심층'.
과거 류와 함께 목숨을 걸고 나아갔던 37계층. 죽음의 늪을 계속해서 헤맸던 '진정한 사선(트루 데드라인)'에 벨은 오랜만에 방문했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 37계층에서, 이렇게 평화로운... 아니, 평화롭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긴장이 풀린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복잡하다고 해야 할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네...)
지금도 이따금 '심층'의 악몽을 꾸고 벌떡 일어날 정도로, 37계층은 벨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고통스러운 기억임은 틀림없었고, 솔직히 이번에도 37계층에 도달했을 때는 어느 정도 공포와 긴장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류와 헤딘의 설전이 오가고, 어두운 미궁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가 흐르고,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끊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랑 류 씨의 레벨이 오른 것도 있겠지만...."
벨과 류가 【랭크 업】한 것이 이유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장비나 아이템을 비롯한 컨디션이 훨씬 개선된 것도 그럴 것이다.
처 처음이 아니고, '미지'를 '기지'로 바꾼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동행자'의 존재가 너무나도 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얌전히 죽는 게 좋을 거다. 이제 충분히, 벨 일행을 괴롭혔잖아?"
현재 위치인 통로에서 떨어진 곳, 어둠이 지배하는 안쪽.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흑자색의 섬광이, 벨의 시야에서 몇 번 깜빡였다.
몬스터들의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달밤의 숲과 같은 고요함이 찾아온 후,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외투를 펄럭이는 흑요정(다크 엘프)였다.
"헤그니 씨...."
"통로 앞쪽, 처리해 뒀어. 목적지까지 외길이었고, 이제 위험할 건 없을 거야."
척후로 앞서가 주었던 - 척후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에 있던 적을 전멸시켜 버린 듯한 - 1급 모험가에게, 벨은 "아, 감사합니다!" 하고 허둥지둥 인사를 했다.
한 손으로 쥔 옷깃을 얼굴을 가리듯이 끌어올린 헤그니는, 부끄러움을 감추듯이,
"아, 아니야, 감사 인사는 됐어. 의뢰이기도 하고... 지금은 같은 파티니까."
라고 말했다.
'파티' 부분을 약간 강조하며, 조금 기뻐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는 벨의 옆에서, 류는 아직도 현재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레이야 파밀리아】의 1급 모험가와 함께 37계층에 진입.... 아니, '호위'를 받다니,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벨 일행의 상황이었다.
헤딘 씨 일행과 파티를 짜고, 신분을 숨기고 『심층』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어떤 사정』으로 37계층으로 향하게 된 벨 일행은 헤스티아도 함께 섞여 어떻게 심층역을 목표로 할지 상담하고 있었는데──어디선가 소문을 들었는지 『어떤 거리 아가씨』가 나타나 "제게 협력하게 해주시지 않겠어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헤딘 씨 일행과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모험가 의뢰(퀘스트)』니까. 제대로 할게."
"네놈들에게 상처 하나 없이 목적지까지 보내는 것이 시르님의 바람이기도 하다. 얌전히 호위받도록 해."
회그니 씨가 류 씨에게 대답하고, 헤딘 씨가 안경(眼鏡)의 위치를 고쳐 쓴다.
그들의 말대로 형식상은 개인 간의 『모험가 의뢰(퀘스트)』 취급이다.
내용은 『지상과 37계층 왕복 및 호위』.
벨과 류 씨가 【랭크 업】을 했다고는 해도, 벨 일행만으로 37계층으로 향하는 것은 너무 이르고 위험했기 때문에, 헤딘 씨 일행의 협력은 솔직히 말해서 천군만마였다.
본래는 릴리 씨 일행도 37계층까지 따라올 예정이었지만,
"바보 토끼(ぐさぎ)와 【질풍】 이외에는 따라오지 마라. 호위하는 데 힘이 더 든다. 정말 효율이 나쁘군."
이라고 효율 중시의 백색 요정(화이트 엘프)에게 들은 바에 따라 동행을 거부당했다.
"으으..." 하고 신음했던 릴리 씨 일행이었지만, 던전 심부의 무서움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벨 일행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서 얌전히 물러섰다.
지금은 『중층』에서 벨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호화로운 모험가 의뢰(퀘스트), 태어나서 처음일지도……)
덧붙여서, 형식상 『모험가 의뢰(퀘스트)』이기 때문에, 보수는 당연히 지불한다.
헤딘 씨가 요구한 것은 류 씨의 고향 『류밀리아의 숲』에 전해지는 『수호자(守り人)의 성서』이고, 회그니 씨는 벨 일행과 보드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1급 모험가에게 주는 보수로 합당한지 벨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부끄러워하는 당사자인 1급 모험가 회그니 씨가 용기를 내서 말했으니 어쩔 수 없다.
여담이지만, 고향에 관련된 물건을 요구받은 류 씨는 벨이 본 적 없는 정도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의외라서,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자, 얼굴이 빨개진 요정씨에게 뺨을 꼬집히며 혼났다. 흑(다크)도 백(화이트)도 요정은 다루기 힘들다.
"저기, 회그니 씨, 알프릭 씨 일행은요? 같이 정찰하러 간 거 아니었나……?"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주위에 흩어져서 경계하고 있어. 몬스터가 아니라, 동업자를. 이제 갈 곳, 들키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이번 『모험가 의뢰(퀘스트)』에는 회그니 씨 일행 외에도 갈리버 사형제가 참가하고 있다.
과연 맹자(오탈)와 전차(알렌)는 없지만, 무법자(몰드) 일행만 있어도 기가 질릴 정도의 무서운 얼굴들이었다.
Lv.5 이상의 모험가, 8명이나 되는 파티.
1급 모험가도 방심할 수 없는 심층역이라고는 해도, 명백한 반칙 편성(오버파워)이었다.
아무리 37계층이라도, 이러면 평화로운 분위기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벨은 마음속으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회그니 씨 일행을 탓하는 건 아닌데요…… 이렇게 간단하게 37계층을 진행해버리면, 그때의 고생은 대체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만신창이 상태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편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Lv.4가 두 명뿐인 건 확실히 무모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랭크 업】을 한 지금도,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어떤 멧돼지(猪)는 Lv.4 시점에, 이 계층에 혼자서 어택을 시도한적이 있지만 말이지."
"오탈 씨……"
벨, 회그니 씨, 류 씨, 헤딘 씨, 그리고 다시 벨 순으로 목소리를 울리면서, 미궁 안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밝기라고는 거의 없는 벽면의 인광(燐光)에 비춰지면서,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정찰(스카우트)(구축)을 회그니 씨가 해낸 덕분에, 통로에는 재의 산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한 번, 미궁 벽을 부수고 『스컬 쉽』 같은 몬스터가 나타났지만, 헤딘 씨 일행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호위 모험가 의뢰(퀘스트)라고는 해도, 문제가 발생할 리 없는 전장에 개입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벨과 류 씨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흑백(黑白)의 기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교전했다.
지금의 벨은 Lv.5, 류 씨는 Lv.6.
당시에는 그렇게 고전했던 『스컬 쉽』이나 『루 가루』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그릇』은 강화되어 있었다. 그 초극한 상태의 죽음을 각오한 여정이,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러고 보니…… 회그니 씨, 아까부터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데, 괜찮으세요?"
"37계층은 어둡기 때문에, 나를 보는 눈동자(瞳)에 겁먹(怯)지 않아도 돼서 말이지. 그래서 위험하진 않지만 37계층은 좋아한단다. 후후후……"
"말하지 마라, 일족의 망신(恥晒)아."
전투를 마무리하고,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벨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제3원벽과 제4원벽에 끼어 있는 『병사의 방(間)』.
사람 몸만 한 커다란 암석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통로 입구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의 넓은 방(룸)이었다.
"벨…… 여기가 맞죠?"
"네. 펠즈 씨에게서 받은 지도(맵)에도, 여기라고 쓰여 있어요."
넓은 방(룸) 안을 둘러보며 기억을 더듬는 류 씨에게, 양피지 지도(맵)를 펼치는 벨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안쪽까지 나아가자, 석영(クオーツ)을 방불케 하는 순백의 광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류 씨가 손에 든 《알브스 유스티티아》를 번쩍이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그것은 산산이 조각났다.
광석이 있던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였다.
"저기, 스승님(마스터), 회그니 씨…… 빨리 돌아올게요."
"네놈에게 걱정받을 만큼 나약해지지 않았다. 가거라."
"괜찮으니까, 천천히 갔다 와."
뒤돌아보자, 헤딘 씨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하고, 회그니 씨가 오른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벨은 미소를 지으며, 류 씨와 함께 『입구』를 내려갔다.
미궁을 구성하는 광석은 금세 복구되어, 완전한 어둠이 찾아온다. 미리 준비해 둔 마석등을 꺼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는 것이 고작인 계단 형태의 동굴을 한 단, 또 한 단 내려간다.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듯이, 한 단 한 단씩 밟아 나아간다. 바로 옆에 있는 류 씨의 손이 닿아, 그녀의 뺨이 붉어진 것이 느껴졌지만, 벨은 모르는 척했다. 자신도 뺨에 열이 오르면서,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계단이 백 개를 넘어, 아래로 내려가자, 『입구』를 막고 있던 것과 똑같은 순백의 광석이 가로막는다. 이번에는 벨이 《헤스티아 나이프》로 파괴했다. 무너진 광석을 밟고 지나가자, 시야에 펼쳐지는 것은 맑고 깨끗한 샘과, 안쪽으로 이어지는 푸른 『맑은 시냇물』이었다.
“……돌아오셨군요.”
“……네.”
겨우 내뱉을 수 있었던 말은 그런 말이었다.
옆에 있는 류 또한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 속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푸르게 빛나는 환상의 길은 두 사람을 맞이한다.
극한 상태인 채로 궁지에 몰렸던 벨과 류가, 결사행 끝에 도착했던 『푸른 길』.
자신들을 구원했던 일시적인 낙원에, 벨 일행은 감개와도 다른 생각이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굳이 말하자면 단둘이서 나눴던 벌거벗은 마음과, 그리고 따스함일까. 역시 얼굴을 붉히며 서로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게 된 벨과 류는, 곧 걸음을 재개했다.
지하 수맥처럼 이어지는 수로를 따라간다.
이전과는 달리, 하류에서 상류로.
높은 천장 탓에 마치 하늘이 막힌 밤의 계곡을 나아가는 듯하다.
벽과 바닥의 경계에는 백합을 연상케 하는 하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기억 속의 청류를 반쯤 나아갔을 무렵.
“──벨!”
줄곧 듣고 싶었던, 기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부드러운 충격이 벨의 가슴에 뛰어든다.
“비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벨!”
달려온 용의 딸, 비네를 벨 또한 상냥하게 껴안았다.
검은 로브를 두른 비네는 온몸으로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벨은 갑옷을 두르고 있는데도 꼭 껴안고, 개의치 않고 볼에 얼굴을 비벼댄다. 용녀──몬스터의 그런 모습에 류 또한 저도 모르게 놀라는 가운데, 벨은 소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등을 어루만졌다.
“오랜만이야, 비네……나도 보고 싶었어.”
“으응……내가 훨씬, 훨~~씬, 보고 싶었어!”
“후훗, 그랬구나.”
“응! 그거야!”
파묻고 있던 목덜미에서 얼굴을 든 비네의 뺨은 흥분과 행복으로 붉어져 있고, 그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비네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꽃과 같은 미소로 줄곧 고대하던 이 재회를 기뻐했다.
벨 또한 가슴속에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활짝 웃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힘껏 껴안았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맺은, 함께 지상에서 살며 웃으며 지낸다는 『약속』은 아직 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을 벨과 비네는 미소와 함께 나누었다.
“비네, 조금 커진 것 같아?”
“정말!? 기뻐! 나도, 벨처럼 커질 수 있을까?”
“커질 수 있어, 분명.”
“야호! 나 있지, 벨만큼 커지면, 릴리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 하루히메가 가르쳐 준, 은혜 갚기!”
“릴리가 슬퍼할 테니까, 조금 살살 해 줘……”
비네를 껴안은 채로, 흔들흔들 흔들리는 가는 파란 피부의 발을 땅에 내린다.
굽혔을 때 문득 깨닫고 말하자, 비네는 기쁨에 찬 표정을 짓지만, 쓸쓸한 눈을 하는 미래의 릴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 버린 벨은 쓴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런 흐뭇한 광경에, 류도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류 씨, 죄송해요. 이 아이가 전에 말했던 비네예요. 비네, 이분은 류 씨야. 인사할 수 있겠어?”
“아…………비네, 야.”
류의 시선을 눈치챈 벨이 재촉하자, 그때까지 재잘거리던 비네는 남의 집 고양이처럼 얌전해져서는 벨의 등 뒤로 숨었다.
한 번 『심층』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는 해도, 벨 일행 이외의 지상의 주민과 접촉하는 것은 아직 서툴고, 무섭기도 한 것이다.
슬쩍 얼굴을 내미는 용의 딸에게, 류는 하늘색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류 리온이라고 합니다. 당신들과는 한 번 만나 뵙고, 『감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상냥한 목소리에, 비네가 멍하니 있는데,
“비네, 어른처럼 기다리라고 했잖아.”
“괜찮지 않습니까. 비네도 저희도, 줄곧 기다리다가 애가 탔습니다.”
“그래, 그로스! 너도 제대로 안절부절못했잖아!”
“그로스 씨, 레이 씨, 리드 씨!”
비네가 온 길에서, 석룡, 가인조와 리저드맨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건강해 보이는군.”
비네 때도 그랬던 것처럼, 재회를 기뻐한다.
헤딘 일행의 힘도 빌려서, 이 37계층에 온 이유.
그것은 그들 『이단아(제노스)』와 합류하여 전해야 할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리드 씨, 레이 씨, 그로스 씨, 그리고 비네……이 37계층에서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심층』의 결사행 끝에, 파괴자를 쓰러뜨린 벨과 류를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리드 일행 이단아(제노스)다. 그들이 없었다면 릴리 일행의 구조는 늦었을 것이고, 벨과 류는 지상에 귀환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을 것이다.
지상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벨, 그리고 특히 류는 이단아(제노스)들에게 꼭 감사를 전하고 싶어 했다.
“저도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저희는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때,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만……당신과 이렇게 말을 나누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류 씨.”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류가 인사를 한다.
당시에는 리드 일행과는 별도로 행동하여 인조 미궁(크노소스) 공략에 남아 있던 레이는, 그녀의 그 모습을 따라 하듯, 오른쪽 날개로 자신의 가슴을 덮었다.
류의 꾸밈없는 감사에, 아까까지 멍하니 있던 비네도 팟 하고 표정을 풀고, “무사해서 다행이야!”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이단아(제노스)의 여성진이 솔직하게 예를 받는 한편, 어딘가 어색한 건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리드와 그로스다.
“꼬맹이들 때문에, 잊어버릴 뻔했는데……”
“아아……너는 우리를, 그, 괜찮은 거냐? 우리, 몬스터인데……”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큽니다.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매우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이야기는 벨에게 들었고, 이상하게도 몬스터 특유의 혐오감을 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구해 준 은인에게 감사는커녕 침 뱉는 짓 따위, 그야말로 괴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는 짓이지요.”
“……헤헷, 그런가.”
자신들이 인간에게도 동족(몬스터)에게도 박해받는 신세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그로스와 리드의 질문에, 류는 가슴속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거짓 없는 자세가 가슴에 와닿았던 것일까. 그로스와 리드도 어깨의 힘을 빼고──처음 보는 류에게는 이빨을 드러낸것처럼 보였지만──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호의 증표다! 이제부터 벨처럼, 류라고 부를게!”
“류……”
그 제안은 예상 밖이었던 것일까, 괴물에게 별명을 얻은 류가 어안이 벙벙해진다.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 버린 그녀에게 비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벨이 쓴웃음을 짓는 가운데, 리드는 간지러운 듯 코 언저리를 벅벅, 한쪽 팔로 닦았다.
“벨프가 약속해 준 대로 됐구만!”
37계층에서 벨과 류를 구출하고, 지상으로 보내는 길에서의 일이다.
『……저기, 벨프. 저 요정 씨랑, 벨……괜찮을까?』
『……아아. 반드시 치료해서, 절대로 벨을 너희와 다시 만나게 해 줄게. 그때는, 저 엘프도 호위 대신 같이』
비네와 벨프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드의 눈앞에서.
지켜진 약속에 리드가 이번에야말로 기뻐한다. 벨의 호위는 류만이 아니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헤딘 일행도 있다는 주석은 붙지만.
한동안 재회와 감사를 축하하며 시간을 보낸 벨 일행은, 청류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좀처럼 올 수가 없어서, 죄송했습니다. 사실은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벨은 완전히 인기인이 됐다면서?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우리랑 만나는 걸 모험가에게 들키는 게 더 큰일이라고. 게다가 요즘 정신없이 바빠서, 엄청 바빴다고 펠즈에게 들었어.”
"아하하하......"
"새삼스럽지만, 제가 이곳에 와도 정말 괜찮았던 건가요? 이곳이 당신들의 새로운 '마을'이 된다고 들었는데......"
"본래라면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이 영역은 꼬맹이와 네놈이 발견한 것이니라. 우리 물건인 양 영역에 들어오지 마라, 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도 우습겠지."
길을 따라 벨과 리드가, 류와 그로스가 각각 대화를 나눈다.
비네는 시종일관 고양이처럼 벨의 한쪽 팔에 안겨 몸을 부비고, 레이는 그 모습을 좀처럼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이윽고 이 '창공의 길' 중에서도 벨과 류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에 다다른다.
"왔느냐, 벨 크라넬. 그리고 류 리온."
그곳은 맑은 물이 솟아나는 시점.
벨과 류가 거의 태어난 모습으로 서로 껴안았던, 단상처럼 솟아오른 바위 근처 기슭에 검은 옷을 펄럭이는 마법사는 서 있었다.
"펠즈 씨!"
"이런 '심층'까지 일부러 발걸음 해 주셔서 죄송했어요. 하지만 꼭 여기로 와 주셨으면 해서요."
본 적 없는 지팡이를 오른손에 든 펠즈에게 벨이 다가간다.
반면에, 하필이면 온갖 의미로 추억이 깊은 이곳에 모이게 된 류는 혼자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벨과 몸을 밀착시켰던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는지, 어떤 장소를 힐끗힐끗 엿보며 귀까지 빨개져 있다.
"왜 그래? 얼굴, 사과 같아? 어디 아픈 거야?" "아, 아니, 별로 그런 건......!" 등의 비네와 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벨은 애써 의식 밖으로 쫓아냈다. 자신도 덩달아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막으면서, 캐묻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다른 화제를 꺼낸다.
"저, 저기, 여기에는 여러분 뿐인가요? 여기는 '심층'이고, 라우라 씨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오는 데는 확실히 전력이 필요하지만, 너무 많아도 곤란하다."
"발각되기 쉬워지니까요. 이 계층의 동족들은 모두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가능한 한 전투는 피하고 싶었어요."
그로스와 레이의 대답에, 과연, 하고 벨은 생각했다.
리드와 그로스, 레이는 이단아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고참이며, 그 실력은 모험가에 비교해도 레벨 5 상위에 필적한다. '심층'에 가는 거라면 충분하고, 분명 따라가고 싶다고 떼를 썼을 비네 한 명을 지키는 거라면, 이 정도 인원이 딱 좋을 것이다. 규격 외의 마도구를 구사하는 펠즈는 애초에 지켜지는 쪽이 아니라 인도하는 쪽이다.
이 '창공의 길'을 집합 장소로 지정함에 있어서, 대규모가 아니라 소수 정예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 거겠지.
"정확히는, 여기에 있는 건 저와 비네, 리드, 그로스, 레이. 그리고──"
펠즈가 거기까지 말을 꺼냈을 때였다.
마법사의 검은 옷이 안쪽에서부터 부스럭거리더니, 벨이 깜짝 놀라기도 전에, 애완용 족제비처럼 가늘고 긴 그림자가 아직 어딘가 불안정한 류에게로 날아갔다.
'큐큐!!'
"꺄악! 누구냐!?"
수수께끼의 그림자가 요정의 단정한 얼굴에 달라붙으려는 순간, 초고속으로 반응한 류의 소도(납도 상태)가 번쩍인다. 【질풍】의 이름은 폼이 아닌 그 움직임에, 칼집에 튕겨 벽에 격돌한 그림자는 '끄어어!? '하고 뭉개진 목소리를 냈다.
"......? 이 몬스터는...... 설마, 그때 그 '카벙클'?"
철퍼덕 바닥에 떨어진 애완용 족제비──라기보다는 '카벙클'에게로, "카일!?" 하고 비네가 걱정스럽게 달려간다. 그러자,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털을 가진 물체는 벌떡 일어나더니, 비네를 무시하고 류의 부츠에 다가가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구애를 시작할 듯이 부비는 '카벙클'에, 류는 본 기억이 있는 듯 미묘한 형태로 눈썹을 찌푸렸다. 벨 또한 그제야 생각났다.
듣자 하니, 마수 카벙클 이단아랑 친구가 되었다고 비네의 편지에 적혀 있었지, 하고.
"오, 역시 아는 사이였냐? 벨이랑 류가 온다는 걸 알았는지, 이 신입(카일)이 '나도 가고 싶어!' 하고 울어대서 말이야."
"아는 사이......라기보다는, 전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데......"
"도와줘서 고맙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어."
"도와준 거 없는데......"
리드와 그로스의 설명에도 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카일은 카일대로 부비적거리며 요정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어딘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니,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상기시키고 당황하는 류의 어깨에 뛰어올라 그 뺨을 혀로 핥으려 한다. 아니, 뽀뽀하려 한다. 하지만, 작게 한숨을 내쉰 결벽증 요정은 언젠가처럼 마수의 목덜미를 잡고 저지했다. '큐큐!?' 하고 카일은 울었지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안 행복하게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어휴, 하고 어깨를 움츠리는 리드 일행과 함께, 뭔가 이상한 이단아구나, 하고 벨은 헛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 저기, 펠즈 씨. 여쭤봐도 될까요?"
주위를 맑은 물소리가 감싸는 가운데, 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냐, 벨 크라넬?"
"어째서 약속 장소를, 이 계층으로 정한 건가요?"
벨 일행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이단아'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애초에 지정 장소를 이 '심층'으로 정한 건 펠즈 일행이었다.
'화로의 관'에 펠즈로부터 이번 일정이 적힌 편지가 도착했을 때, 정말 놀랐었다.
"여기가 리드 씨들의 거점...... '이단아'의 '숨겨진 마을'이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저희가 만나는 걸 다른 모험가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장소를 잘 골라야 한다는 건 알겠지만......"
'백궁'이라고도 불리는 37계층은 광활한 데다 식량이 전혀 없고, 살아있는 시체나 전사 계열의 몬스터들도 강하고, 흉폭하다. 리드 일행도 좀처럼 가까이 가지 않고, 애초에 거점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정확히는 '마을'이 될 만한 지점이 없고, 드래곤이나 인어처럼 마을의 '문지기'를 배치할 수 없다는 것이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 '창공의 길'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투기장' 지하에 위치하면서 몬스터가 생겨나지 않는 37계층 유일의 낙원은, '이단아'들에게 '하층'과 '심층'을 잇는 귀중한 중계 지점이 될 것이다.
이 장소의 정보를 벨 일행에게서 제공받은 펠즈와 리드 일행은, 정말 거점화할 수 있을지, 벌써 몇 번이나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헤스티아 파밀리아】는 단기간에 너무 큰 명성을 얻었다. 동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상,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는 편이 좋지. 그건 이해할 수 있어. '심층'까지 오면, 모험가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것도."
벨의 의문에, 류도 맞장구친다.
── '우리 때문에 벨, 쓸데없이 유명인이 돼서, 던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나 봐.'
이는 리드 또한 이단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현재, 신들에게도 파벌에도 너무 주목받고 있는 【헤스티아 파밀리아】는, 단순한 탐색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뭔가 보물에 대한 정보가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던전 안에서 냄새를 맡고 쫓아다니는 형편이다. 거기서 이단아와 접촉하는 모습을 목격당하기라도 한다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던전의 하부 계층을 약속 장소로 지정하는 것은, 확실히 타당한 방책이다.
2급 모험가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애초에 따라올 수 없는 계층이라면, 목격될 위험성이 훨씬 줄어든다.
"하지만, 그래도...... 37계층이라는 숫자는 너무 깊어요."
모험가들에게 들키지 않고 밀담을 나누는 거라면, 너무 신중하고, 난관이 크다.
류는, 분명하게 그렇게 말했다.
실질적인 문제로, 아직 '심층'을 탐색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벨의 일까지 고려하면, 여기에 오기까지 헤딘 일행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충분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이단아와 만나는 것뿐이라면, 기껏해야 '하층' 정도면 충분했을 터이다.
어째서 굳이 37계층으로 불렀는지, 이유를 듣고 싶다.
시선으로 묻는 벨과 류에게, 펠즈는 한 번, 침묵을 지켰다.
"...... '결론'부터 말하지. 지금, 우리 바로 위에 있는 '투기장'의 존재 이유가, 밝혀졌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듣고, 벨과 류는 경악했다.
'투기장'.
몬스터를 무한히 만들어내는 살육의 공간.
그 아이즈조차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위험 지역이며, 침입자가 들어선 순간 외에는, 매일 몬스터끼리 죽고 죽이는 던전의 구조물. 벨과 류는 어쩔 수 없이 '투기장'에 들어섰고, 역시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었다.
'...... 던전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공간을......'
무한의 잔. 무한의 투쟁.
시작과 끝이 같은 지점에 있는, 괴물의 윤회.
분명 벨 자신, '투기장'의 이상성을 눈앞에서 보고, 그런 식으로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 '투기장'의 존재 이유가, 밝혀졌다──?
갑작스러운 말에 벨과 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리드 일행은 이미 알고 있는 건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그들을 뒤로 하고, 펠즈는 말했다.
" '투기장'이란, '이단아'를 탄생시키기 위한 '장치'다."
처음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 네?"
"정확히는 던전의 실험장...... 시행착오의 증거라고 해야 할까."
"자, 잠깐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펠즈 씨!?"
이해가 따라가지 못하고, 벨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 류조차 얼굴색을 바꾸고,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 애쓰는 게 역력하다.
"차례대로 설명하지. '투기장'이 처음 확인된 건 약 30년 전. 아마도, 그 30년 전, 혹은 그 이전에 역사상 최초의 '최초의 이단아'가 태어났다."
"네......!?"
"당시, 던전은 당황했을 것이다. 대략 16년 전, 나나 우라노스가 처음으로 리드 일행과 접촉했을 때처럼. 괴물이면서도 인류와 같은 이지를 갖춘, 특대의 이레귤러한 존재에."
정보의 쓰나미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믿기 힘든 단어들이 뒤섞여, 아무리 차근차근 정리하려 해도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먼저 『사실』만을 열거한 펠즈는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투기장』을 목도하고, 그 살육의 공간을 직접 피부로 느꼈을 때, 너도 생각하지 않았나, 벨 크라넬? 어째서 밤낮으로 몬스터끼리 죽고 죽이는 건지, 어째서 삶과 죽음이 영원히 반복되는 건지."
"!!"
"그건 그 영역이야말로, 『윤회전생의 축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이자 위대한 미궁은 시험하고 있었던 거다, 새로운 『이단아(제노스)』가 탄생할지 아닐지를. 그리고 탄생한다면, 대체 어떤 원인이 존재하고, 어떤 영향을 던전에 미칠지, 가늠하고 있었던 거지."
벨의 경악에, 류의 것도 더해진다.
──무한의 잔. 무한의 투쟁.
──시작과 끝이 동일점에 있는, 괴물의 윤회.
그 극한 상태 속에서 품었던 의문과 비유를, 펠즈가 마치 신처럼 떠올린다.
"인류, 혹은 지상에 대한 『강렬한 동경』. 그것이야말로 『이단아(제노스)』들의 것이며, 그들이 이지를 갖추는 조건이라고, 이제야 우리는 확신을 얻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던전은 알 도리가 없었고, 그런 『투기장』을 만들었던 거겠지."
벨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이단아(제노스)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리드도, 그로스도, 레이도.
비네도, 류에게서 건네받은 카를을 가슴에 안고, 그 부드러운 털에 입가를 묻고 있다. 새롭게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마수(카방클) 또한, 신묘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정적을 유지하며, 그 동그랗고 투명한 눈동자로 벨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창공의 길』. 여기는 『투기장』에서 확인된 『이단아(제노스)』를 놓아주기 위한 보호소다."
"!"
"그 살육 공간에서 『이지를 가진 몬스터』가 태어났다고 해도, 순식간에 잔혹하게 살해되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 그러므로 던전은 특정 개체를 도망치게 하고, 지키기 위해, 『투기장』 지하에 이런 지대를 준비해 둔 거다. ...정확히는, 『경과 관찰』을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안전 계층과 같은 공통점을 가진 『창공의 길』은, 37계층 유일의 낙원.
만약 그것이, 『이단아(제노스)』를 숨겨주기 위한 『마을』과 동의라면.
제대로 된 배경이 주어지자, 『투기장』이나 이 『창공의 길』에 품고 있던 의문이 풀리고, 모든 것이 의미를 띠어 간다.
제자리에 서 있던 벨은, 설마 정말? 하고 펠즈가 말하는 설을 믿고 있었다.
"어쨌든, 『이단아(제노스)』의 발생은 30년 전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자, 시조인 『최초의 이단아(제노스)』를, 우리는 『원초의 이단아(퍼스트 제노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최초의 이단아(제노스)』를, 당신들은 확인했습니까?"
"아니, 예상하기로는 30년도 더 전에 탄생한 존재다. 아마 죽었을 거다. 시체 같은 걸 발견한 건 아니지만."
한편, 정보를 곱씹어 듣고, 정밀하게 검토를 마친 류는, 냉정한 제삼자의 얼굴을 한 채로, 질문을 던졌다.
"그건, 『가설』이 아닙니까?"
"..."
"지금 말씀하신 건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설득력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까지 들어온 『투기장』의 존재 이유 중에서, 가장 납득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당신의 논리에는, 증거가 없는 것 같군요."
벨이 흠칫 뒤돌아보는 사이, 류는 확신에 이르기 위한 재료가 부족하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펠즈는, 침묵했다.
어둠이 고여,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후드 속에서, 마치 귀찮은 것을 떠맡겨진 노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류도 벨도 의아하게 느끼기 시작할 무렵, 검은 옷의 마술사는 한숨을 쉬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아. 네 말대로 증거가 없다면, 이건 그저 가설에 불과했겠지. 하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순서가 거꾸로였어."
"거꾸로...?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거』가 먼저 발견되었고, 우리는 답에 도달해 버렸다. 그런 거다, 류 리온."
따라오너라.
그렇게 말하고, 펠즈는 벨 일행에게 등을 돌렸다.
벨과 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곧바로 검은 옷의 뒤를 쫓는다. 리드 일행도 말없이 따라왔다.
"...?"
벨과 류가 위화감을 느낀 건, 바로 직후였다.
펠즈가 수로를 향해, 직각으로 꺾어진 것이다.
벨과 류가 『투기장』에서 여기로 떨어졌을 때, 맑은 물이 흐르는 『창공의 길』은 외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벨 일행은 몸을 쉰 후에도 헤매지 않고, 『병사의 방』 미궁부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즈는 『옆길』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통로를──벽면에 생긴 커다란 『갈라진 틈』 같은 길을──꺾어진 것이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루트에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검은 옷의 뒤를 따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은 이미 말했지. 그리고 이게, 너를 이 계층에 부른 『본론』이다, 벨 크라넬."
그것을 목도했다.
"────────"
길쭉한 갈라진 틈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작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맑은 물의 색을 반영하듯 푸르스름한 바닥과 벽면은,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다.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보라색 얼음덩어리에 갇힌 『괴물』이었다.
"...몬스터? ...아니, 설마, 이건...!"
"『이단아』다."
눈을 부릅뜨는 벨의 옆에 서서, 펠즈가 단언한다.
류마저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잃는 가운데, 검은 옷의 마술사는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3주일 정도 전, 『투기장』에서 여기로 떨어졌지. 나와 리드 일행은, 그때 마침 『창공의 길』을 조사하고 있었거든. 굉음과 함께 벽에 갈라진 틈이 생기고, 이 공간이 생겨났지."
펠즈의 시선 끝에는, 길쭉한 공동이 존재했다.
현재는 바위의 조성이 완전히 막고 있다. 벨 일행이 지금 있는 원형의 공간과 합쳐서,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삼각 플라스크 같은 형상이었다.
설명을 들으면서, 멍하니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벨과 류는, 다시 시선을 정면의 얼음덩어리로 돌렸다.
"여기에 달려온 우리는 『그』, 혹은 『그녀』를 발견하고... 습격당했다."
"!"
"엄청 빨랐어. 너무 빨라서, 막을 수가 없었지. 그 탓에, 레이의 날개 한쪽이 날아갔다."
펠즈의 말에 어깨를 떨며,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리드의 발언에 귀를 의심한다.
벨이 허둥지둥 뒤에 있는 레이를 돌아보자, 그녀는 "괜찮아요. 펠즈 씨가 치료해 줘서, 지금은 복원하고 있습니다."라고, 흉터는 확인할 수 없는 금빛 날개 한쪽을 펼쳐 보인다.
"나와 도마뱀 인간(리드)이 몇 번이고 베고 베이며, 노래하는 새(레이)의 괴음파(노래)로 움직임을 봉쇄한 후... 마술사(펠즈)의 마도구로, 이렇게 빙결시킨 거다."
그로스가 설명을 이어받는 동안, 레이는 안심시키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도할 수는 없었다.
충격이 더 컸다.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 계속 드러내고 마는 벨의 옆에서, 류는 마지막 부정 재료를 찾듯, 무겁게 입을 연다.
"...『이단아(제노스)』가 아닐 가능성은?"
"얼리기 전에, 말을 했다. 동포임이 분명하다."
"...뭐라고, 했습니까?"
입을 다무는 류를 뒤로 하고, 벨이 숨을 들이키며, 묻는다.
대답한 것은, 눈을 내리깐 레이였다.
"단지, 한마디... 『죽인다』, 라고."
침묵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이미 미궁의 조성은 재생이 끝난 것인지, 이 공간에 리드 일행의 격투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푸르스름한 빛을 반사하며, 얼음덩어리가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벨은, 자신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마주 보고 있는 얼음덩어리──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괴물』은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꼬리가 달려 있고, 양손에는 흉측한 발톱 같은 부위도 확인할 수 있다.
몸통은 언뜻 보기에, 도마뱀처럼 가늘고 길게 느껴지지만, 둥글게 말고 있는 자세 때문인지 인간형인지, 아니면 이형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머리에는, 짐승의 두개골이라고 해야 할 뼈로 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스컬 쉽』?"
"아니, 아마 『펠루다』의 아종이겠지."
세세하게 관찰하는 류의 중얼거림을, 실제로 교전했던 펠즈가 부정하고, 몬스터 중에서도 최강의 잠재 능력을 지닌 『용종』이라고 단정한다.
그 대화가 귓가를 흔들고,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머릿속에서 지끈지끈 욱신거리는 기시감에 이끌리듯, 벨은 그 이름을 입술에 담았다.
"…………저거노트?"
순간.
마치 소년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뼈 가면 속에서 감겨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
『꺅!?』
진홍색 눈동자가 드러나고, 순식간에 소리를 내며, 얼음덩어리에 금이 갔다.
안쪽에서 『괴물』이 날뛰며, 봉인을 깨려 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린 벨, 그리고 류를 눈빛으로 꿰뚫으며, 붉은 살의를 해방하려 하고 있다.
겁먹은 비네의 팔 안에서 카를이 비명을 지르고, 더 많은 균열이 얼음덩어리 전신에 가로질러 달리는 순간, 검은 옷이 펄럭였다.
"펠즈!"
"알고 있다!"
리드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펠즈는 오른팔을 뻗었다.
소지하고 있던 지팡이──얼음 속성의 『마검』으로 개조를 가한 『현자』 제작의 봉인구가, 강렬한 얼음 파도를 토해냈다.
금이 쩍쩍 가 있던 얼음덩어리가 순식간에 균열을 메우고, 다시 얼어붙어 간다.
더 많은 얼음 막을 뒤집어쓰게 된 『괴물』은 눈빛을 몇 번이고 빛낸 후, 보라색 얼음 파도에 굴복하듯,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처음에 『마법』으로 얼려붙게 한 후, 수면 효과도 덧붙인 눈보라를 이렇게 정기적으로 뿌려서, 재워 두고 있는 상황이다."
급격하게 온도가 내려가 추위 속에서도 식은땀을 흘리는 벨은, 시간을 들여 전투 태세를 푼 후, 핵심을 짚었다.
“이건…… 저희가 싸웠던 ‘저거노트’인 건가요?”
“나는 그리 예감하고, 너희를 불렀다. 이게 일부러 37계층까지 발걸음해 달라고 부탁한 이유다.”
리드 일행, 그리고 비네도 꿈에서 본다는 ‘전생’의 기억.
그걸 이 ‘괴물’ 또한 가지고 있으며, 그 ‘액재’의 환생이 아닌가 하고, 펠즈는 그리 에둘러 말했다.
“지금까지 ‘투기장(콜로세움)’에서 ‘이단아(제노스)’가 태어난 전례는, 아마 없었을 터다. ‘투기장(콜로세움)’ 내에서 윤회전생…… 영혼의 순환이 그저 되풀이되고 있다면, 동족(몬스터)끼리 서로 죽이는 것만으로, 동경(노이즈)이 스며들 여지가 없지. 던전의 실험장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
“하지만, 그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이단아(제노스)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째서지? …… 몬스터의 영혼에 강렬한 굶주림(노이즈)이 새겨질 정도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펠즈는, 이 37계층은 던전 중에서도 특별한 영역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 ‘백궁전(화이트 팰리스)’이라 불리는 층역은 이 계층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투기장(콜로세움)’이라는 ‘발생 장치’가 있는 이상, 이 계층에서 흩어진 몬스터의 영혼은 예외 없이 ‘백궁전(화이트 팰리스)’에 거두어진다. 그것이 노신(우라노스)과 상담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도 했다.
“그것들을 감안했을 때, 가장 먼저 파괴자(저거노트)의 일과, 네 얼굴이 떠올랐지, 벨 크라넬.”
“큭……”
“이 이단아(제노스)가 환생하게 된 소망이란, 아마 ‘아스테리오스’와 비슷한 것이겠지.”
“…… 그 사람과?”
“아아. 동경(동경)이 아니라, 굶주림(굶주림). …… 자아에까지 발전한, 유일한 살의.”
벨은, 눈을 크게 떴다.
류도 마찬가지였다.
재전, 아니 재살을 바라는 이단아(제노스).
자신을 부수고는 거꾸로 말린 흰 불꽃에 타오르는, 살육의 존재 이유(레종 데트르).
펠즈는 단장을 옷자락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까 반응을 보고, 나는 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지. 이 이단아(제노스)는, 너에게 가장 강하게 반응했다. …… 그래서 말이다, 벨 크라넬. 너에게 의견을 구하고 싶다.”
“의견……?”
“이 이단아(제노스)를 처리할지, 말지.”
“!!”
벨은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이 이단아(제노스)는 너무 위험하다. 행동 이유라는 의미에서도, 잠재 능력(포텐셜)이라는 의미에서도. 이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액재’가 될 가능성을 크게 품고 있지.”
살육이라는 소망을 품은 이단아(제노스)가, 참혹한 미래를 불러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존재 이유(레종 데트르)가, 단 한 사람의 존재를 향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숨겨진 힘을 입증할 필요도 없다. 이 ‘괴물’은 태어난 직후, Lv.5 상당의 레이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녀를 포함해 리드, 그로스, 펠즈의 네 명이 달려들어서, 간신히 진압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다.
“봉인을 풀고, 이대로 리드 일행의 공동체(커뮤니티)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파멸이 눈에 보인다. 이 이단아(제노스)의 흉측한 손톱은 ‘인류와의 융화’라는 리드 일행의 꿈을 부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살리는 게 아니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만약 살린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그때는 이 카일에게, 이곳의 ‘문지기’를 맡길 생각이다.”
고뇌를 숨기지 않고, 신음하듯 벨이 되묻자, 대답한 건 펠즈가 아니라 리드였다.
“이 녀석은 엄청난 장벽을 칠 수 있는 ‘카벙클’이거든. 그 동포가 봉인을 깨려고 해도, 분명 막아낼 수 있을 거야. 물론, 조금 더 강해질 필요는 있지만 말이지.”
‘큐큐!’
“펠즈의 마도구(매직 아이템)를 쓰는 녀석과 협력하면, 여기 봉인을 유지할 수 있다…… 는 게 우리 생각이야.”
도마뱀 인간(리저드맨)의 어깨 갑옷 위에, 가볍게 뛰어오른 칼이 ‘맡겨 줘!’라고 말하듯 울었다.
“그리고, 봉인을 유지할 수 있다면 바…… 저희는, 말을 걸어 보려고 합니다.”
“말을 건다……?”
“네. 그 동포는 지금, 살의라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순수한 존재일 겁니다. 이전의 용의 딸(비네)과 마찬가지로. 그러니, 잠들어 있는 그…… 혹은 그녀의 ‘꿈’에 속삭이는 겁니다. 저희의 마음이나, 지식을 전해 줘서……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거죠.”
태어나자마자 봉인된 이 이단아(제노스)는, 아직 새하얀 평원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람은 아직 아무것도 물들지 않았다. 그러니 살의에 침식당해, 붉거나 검게 물들기 전의 세계(캔버스)에, 다른 색을 칠해, 중화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레이는 그리 말하고 있다.
‘노래’를 조종하는 노래하는 새(레이), 그리고 인어(마리)라면, 자장가 삼아 영향을 주는 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수면 학습이 아닌, ‘수면 교육’이다.
벨은 눈을 크게 뜬 후, 아무 말 않고 생각에 잠겼다.
곧바로 답을 낼 수는 없었다. 벨은 지금, 고뇌해야만 했다.
일단 주위를 둘러본다.
펠즈는 처리파, 리드와 레이, 카일은 아마 비처리파.
그로스는 드물게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 류 씨는……”
“…… 저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이 이단아(제노스)가 만약, 알리제들을 죽인 ‘액재’와 같다고 생각하면…… 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단죄의 옳고 그름을 물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
“27계층에서 수많은 목숨을 살육한 게 확실하다고 해도, 갓난아기에 불과한 존재에게 전생의 죄와 벌을 묻는다. 그게 얼마나 옳고, 혹은 불합리한지…… 알 수 있는 건, 신과 같은 존재뿐이겠죠.”
류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본 후, 하늘색 눈동자로 벨을 마주 보았다.
“저는 지금, 내걸어야 할 ‘정의’를 시험받는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정의’의 대부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저는 당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류는 분명,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도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건, 벨을 위해서다.
벨의 대답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녀는 조언만 해 주고 있다.
벨은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고민했다.
세계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류의 말을 빌리자면, 시험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궁(던전)이, 이쪽을 보고 있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벨……”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곁에 기대오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비네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배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청은색 머리카락에, 조용히 손을 뻗은 벨은, 답을 내놓았다.
“제 의견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이 이단아(제노스)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배 근처에서, 소녀의 몸이 작게 떨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게 느껴진다.
펠즈와, 리드 일행을 차례차례 둘러보고, 벨은 속마음을 말했다.
“만약, 이 이단아(제노스)를 여기서 죽이면…… 지금까지 비네와 함께했던 시간이, 전부, 거짓말이 되니까요.”
침대(침대) 속에서 비네에게 들었던, ‘꿈’ 이야기.
분명, 그녀의 ‘전생’ 이야기.
비네 또한 그곳에서 많은 목숨을 빼앗았다. 비네 또한 그곳에서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눈앞에서 봉인되어 있는 존재에게 죄를 묻고, 그 위협을 두려워하여 처리한다는 거라면, 비네와의 구별은 대체 무엇인가. 지금도 이마의 홍옥을 잃으면 폭주해,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용과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이 이단아(제노스)와, 지금 벨이 끌어안고 있는 비네는, 비슷한 존재다.
이 ‘용’을 죽인다는 건, ‘용(비네)’의 반신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보(벨 크라넬)에게는,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다.
── ‘괴물’은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만 한다.
지금 벨 일행도, 리드 일행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그렇다면, 증명하기도 전에 잘라내는 행위는, 분명 벨 일행의 패배다. 분명 벨 일행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각 하나라도, 존재 의의를 부정한 그 순간부터.
“만약, 이 이단아(제노스)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벨은, 결의를 담아, ‘살리는 것’을 바랐다.
“저는 이 이단아(제노스)와, 죽이는 것 이외의 길을 찾고 싶습니다.”
얼음덩어리 안쪽에 봉인된 존재가, 순간, 흔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화가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 또한 분명, 기분 탓이었을 것이다.
“…… 알았다. 이단아(제노스)를 구원해 온, 다름 아닌 네 의견이다. 서둘러 판단을 내리지 않고, 당분간 경과를 지켜보도록 하지.”
“죄송해요, 펠즈 씨……”
“아니, 괜찮다.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고, 비밀리에 처리하는 것도 우리는 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건…… 네가 그리 말해 주기를, 마음속 어딘가에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너무 감상적이고, 마술사(메이지)답지 않다고, 펠즈는 자조했다.
자조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소를 띠며.
리드와 레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과 날개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카일이 부츠 끝을 낼름 핥았다. 그로스가 눈빛만으로, 예를 표했다.
류는 작게, 미소 지어 주었다.
너 혼자 책임지게 하지는 않아. 리드 일행과 함께, 그리 말해 주었다.
“벨…… 고마워.”
마지막으로, 비네는 배에 안긴 채로, 그리 중얼거렸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괜찮아, 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옥, 작은 소녀는 더욱 끌어안았다.
“그럼, 일단 ‘마을’로 돌아갈까! 릴리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을 테니까!”
“펠즈, 이곳은……”
“아아, 당분간은 내가 맡도록 하지. 솔직히, 할 일은 산더미지만, 어쩔 수 없겠지. 칼이 빨리 성장하기를 바라야겠군.”
‘큐큐!’
“나도 마술사(펠즈)와 남겠다. 뭔 일 있으면 안구(오쿨루스)로 연락하지. 마도구(매직 아이템)를 쓸 수 있는 빨간 모자(레드)와 반인반사(라우라), 그리고 인어(마리)를 이곳(여기)에 데려올 셈을 해 둬, 리드, 레이.”
“레드들은 몰라도, 마리가 올까나……. 물의 미궁 도시(미야코)에 비하면, 엄청 좁은데, 여기 청류(강)……”
저마다 말하고 울고, 이 자리를 떠난다.
류가 이단아(제노스)들 뒤를 따라가는 걸 본 벨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비네와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보랏빛 얼음덩어리와, 그 안에서 잠든 괴물.
신비와는 거리가 먼 자줏빛 환상이, 벨 일행의 얼굴을 비춘다.
“던전은, 대체 뭘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미궁(던전)의 시선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비네 님!”
금빛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우 소녀가 달려온다.
“하루히메!”
벨과 손을 잡고 있던 비네도 달려 나가 기쁨에 찬 채 포옹을 나누었다.
“보고 싶었어, 하루히메!”
“저도 그랬어요! 오랜만에 뵈었더니 키가 더 크신 것 같아요?”
“응! 벨도 그랬어!”
서로를 껴안은 소녀들은 미소도 함께 나눈다.
기쁨과 감동을 숨기지 않는 그 모습은 자매 같기도 하고, 모녀 같기도 했다.
20계층, ‘이단아(제노스)들의 은신처’.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는 하루히메 외에도 릴리 일행이 벨 일행을 마중 나온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벨 군! 너무 늦잖아! 설마 류 씨랑 수상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안 했어!? 아니, ‘심층’에서 그런 짓 할 수 있을 리가…”
“【프레이야 파밀리아】 녀석들은 어떻게 했어? 호위받고 있었잖아?”
“27계층으로 돌아갔을 때 ‘이제부터는 알아서 해라’는 말을 듣고 헤어졌어. 아마 지상으로 돌아갔을 거야.”
“확실히 그 녀석들과 같이 움직이는 게 더 눈에 띌 거야. 이 ‘은신처’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되니까. 어쨌든… 수고했어, 벨 군, 류 씨!”
곧바로 릴리의 끈적끈적 조사(체크)가 들어가고, 벨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벨프가 반쯤 질린 듯이 묻자, 복면을 입 아래로 내린 류가 대답하고 미코토가 미소를 지으며 노고를 위로한다.
‘심층’으로 향하는 벨 일행과 헤어진 릴리 일행은 예정대로 이 20계층의 ‘은신처’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물론 다른 모험가들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방문했다.
벨 일행의 37계층에서 돌아오는 방법도 조금 복잡해서 이단아(제노스)들과의 단체 행동은 피해야만 했다. 귀환 루트는 다른 길을 사용하여 20계층의 미개척 영역에서 다시 합류했다.
예전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 종유동을 닮은 거대한 방(룸)은 벨 일행이 돌아오자마자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좋아, 벨 녀석들이 다시 와 줬으니! 오랜만에 연회라도 열자고!!”
“““오오오오오오오!!”””
“또 이 패턴이냐…”
“벨 님들이 오기 전에도 하고 있었잖아요!”
왜 이렇게 북적거리는 건지, 리드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치자 이단아(제노스)들은 일제히 팔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본 벨프가 질린 듯한 목소리를 내고, 릴리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심층’에서 구출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이번 탐색에 참가했던 류는 뜻밖의 전개에 할 말을 잃는다. 아니, 몬스터들이 연회를 시작하는 것에 문화적 충격(컬처 쇼크)을 받았다. 벨은 보기 드문 류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신사인 척하는 붉은 모자(레드캡)가, 지상의 문화를 사랑하는 반인반조(하피)가, 유쾌한 일각토(아르미라지)와 흑견(헬하운드)이, 흥분하는 반인반사(라미아)와 대형급(트롤), 그리고 용의 딸(부이부르)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떠들썩하게 논다.
“하루히메, 춤추자!”
“네, 비네 님!”
가희조(세이렌)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도 괴물도 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예전에 어울렸던 적이 있는 미코토는 유쾌하게, 릴리와 벨프는 체념한 듯, 청결한 엘프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손을 잡고 억지로 춤추게 하려던 일각토(아르미라지)들을 조건반사로 튕겨낸다.
웃는 얼굴이 피어난다.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원이 만들어진다.
우애(필리아)가 종족의 벽을 뛰어넘는다.
“…던전이 무엇인진 모르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그래도…”
이 미궁이 ‘미지’인 채로 있는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사람도 괴물도 이곳에서 웃고 있다.
창부였던 소녀도, 배척당하려 했던 용의 딸도 벨의 시선 너머에서 계속 웃고 있다.
그렇다면 ‘위선자’가, ‘어리석은 자’가, ‘영웅’이 할 일은 하나다.
“벨도 빨리!”
“저희와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본 후 미소를 지으며 달려 나간다.
예전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을 했던 소녀들에게 소년은 뛰어들어 함께 춤을 추었다.
세 개의 손가락이 나눴던 ‘약속’을 다시 한번 이곳에서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