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ZA/UM
애니-앨린 룬드가 선글라스를 벗자 갑자기 쏱아지는 태양빛에 잠시 눈이 멀었다. 소녀 홍채의 진홍색 소용돌이가 수축되었고, 스모키 아이 메이크업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애니는 작은 머리를 새끼고양이처럼 빠르게 흔들었다. 반짝이는 빛이 마치 토끼처럼 소녀의 눈을 따라서 소녀 잡지에서 모래로, 모래에서 파라솔로 뛰어다녔다.
"뭘 하고 있어?" 절벽끝에서 다리를 대롱거리면서 테레즈가 물었다.
"모르겠어. 매린도 저기 있네. 서 있는데..."
"걔가 서 있는 건 여기서도 보여." 칸이 조급하게 끼어들었다.
“저기 서 있는데, 빨간 점 수영복이 나쁘지 않은 걸. 요즘 대세인 투피스인데, 아! 저 애는 그냥… 젠장!" 쌍안경을 통해 보이는 매린의 미소가 능글맞은 웃음으로 바뀌었고, 그녀의 눈에서 장난끼가 반짝였다. 그녀는 보란듯이 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제스퍼가 가슴 아래로 위험한 렌즈를 내리자 그녀의 모습이 작아졌다.
"숙여, 모두 엎드려!"
칸은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꼇다. 팔이 떨렸다. 그의 몸은 가시투성이 로즈힙 덤불 속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재빨리 등을 대고 몸을 던진 테레즈는, 창백한 6월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독한 바다 독수리가 그 위로 높이 활공하는게 보였다.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칸, 독수리야!"
"뭔 놈의 독수리, 아야!" 로즈힙 덤불이 칸에게 자기 존재를 날카롭게 주장했다.
"움직이지 마. 덤불에서 소리가 나잖아." 제스퍼는 손에 쌍안경을 쥔 채 배 위에 올려놓고 둘 사이에서 투덜거렸다.
“뭐, 이미 우리를 봤으면 내가 소리를 내건 말건 별 차이 없지. 야, 쟤네들이 뭐하는지 좀 봐!"
"직접 보라구," 제스퍼는 쌍안경을 칸에게 넘겨주었다.
헐렁한 여름 셔츠를 입은 칸이 쌍안경을 손에 들고 덤불 밖으로 기어 나오자 덤불이 다시 바스락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고 키 큰 풀 뒤에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황급히 쌍안경의 초점을 해변 아래 빨간 꽃 무늬 파라솔로 옮기고 비치 타월 위에 멈췄다. 놀랍게도 작은 마즈 홀로 앉아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칸이 걱정으로 초조해지자 땀이 안경에 떨어졌다. 불안을 느끼며 아래쪽 바위로 더 가까이 초점을 옮기자, 작은 오페라 안경이 불과 100미터 거리에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적갈색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한 손을 엉덩이에 얹고 서 있는 것은, 자매 중 맏이인 날씬한 샬롯이었다. 9학년의 이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피조물은 칸의 이민자 무리로부터 의회 자리만큼이나 닿지 않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너무 가까워서 매린의 오페라 안경 없이도 그녀의 쏘는 시선이 칸의 비참한 눈을 꿰뚫는 것 같았다. 칸은 눈을 돌렸다.
“이런, 쟤들 작은 쌍안경을 갖고 있잖아." 칸이 긴급하게 알렸다.
"걔들이 어제 말해줬어. 너희들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뭐야, 테레즈?" 제스퍼는 갑자기 화를 냈다.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한 거야!"
“깜빡했어, 미안. 난 쟤네가 독수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둥지가 바로 이 절벽 근처거든…"
"독수리는 엿이나 먹으라고 해." 칸은 크게 웃었고 제스퍼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도 일어서서 쟤네한테 손을 흔들어야 해. 쌍안경을 갖고 한 이 짓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모르겠어."
“나한테 생각이 있어." 테레즈가 단호하게 일어섰고, 칸은 말리려고 그의 바지를 잡았다. 그러나 아래 해변에 모여 있던 세 명의 날씬한 소녀들은 앙상한 금발 머리의 소년을 볼 수 있었고, 잠시 후 일마라에서 온 약간 뚱뚱한 소년이 어색하게 테레즈 옆에 나타났다.
"안녕 얘들아!" 테레즈가 외쳤다.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이 4층 건물 높이의 언덕에서 뛰어내리자, 매린은 숨을 들이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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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후의 다음날 아침.
남자의 지친 눈주름이 광대뼈를 휘감고 있다. 그의 눈 밑은 맹금류같이 가무잡잡하다. 양쪽 뺨의 그루브. 연합 경찰 사무실의 블라인드는 그의 흐릿한 눈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도 커튼 뒤쪽을 들여다보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연합 경찰 요원은 약간 앞으로 뻗은 갓 손질된 수염, 긴 회색 목, 흰색 드레스 셔츠에 흡연으로 지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셔츠 칼라에는 얇은 검은색 넥타이가 걸려 있었다. 밤새 내린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춥고 바람이 심했다. 요원은 왼손으로는 코트 깃을 더 가까이 당기면서 오른손으로 담배를 피웠다.
작은 국경 순찰선의 뱃머리에 선 테레즈 옆에서 젊은 바사 경관이 손에 김이 나는 커피잔을 들고 묻는다. “크론슈타트에는 무슨 일이죠?"
“미안하네만 말할 수 없어." 테레즈는 가을 지평선을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갈매기 떼가 항구의 갈대밭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고, 보트 엔진에 시동을 걸자 엔진이 차가운 물 위로 덜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엔진은 연료 냄새와 함께 물 위에 화학적 무지개를 남겼다.
"커피 드시겠어요?" 청년은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아니, 괜찮아."
테레즈는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상쾌했다. 오늘 아침, 낮은 회색 하늘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았고 비행선의 불빛만이 도시 위를 맴돌며, 대형 그라드 순양함의 강철 실루엣이 만에 유령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 배의 이름은 야른스포켄이지만 사람들은 강철 유령이라고 불렀다. 아무도 저 불길한 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령과의 조우. 방어용이라고는 하지만, 누구의 공격에 대비해서? 누가 누구에게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인가? 철의 장막속의 그라드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북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라드 남자처럼 말하고 그라드 남자처럼 담배를 피우는 테레즈조차도, 백년째 점령된 모국 지엠스크와 유고그라드의 학살에 대한 얘기를 꺼날 수 없다. 용감한 프란티첵애 대해서도.
물론 그는 용감한 프란티첵처럼 되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모든 코이코는 용감한 프란티첵처럼 되고 싶어한다. 자리를 찾고, 봉기하여, 지기스문트 대왕의 깃발을 다시 올려라. 천둥소리를 내는 트로이카처럼 대담하게, 삶의 기쁨을 누려라!
한 척의 국경 순찰선이 북해를 건너고 있다. 파도는 배를 심하게 흔들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조만간 담배를 꺼야 할 것이다.
어짜피 담배를 피우지 못 할 바에야 밖에서 추위에 떠는 것은 무의미했기에, 그는 객실 의자로 이동했다. 그는 샤를롯데얄 해변의 구불구불한 해안선 아래쪽의 그리운 도시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다. 한번은 창백을 통과하는 자기력 열차를 타고 그라드에서 4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 왔을때, 칸이나 제스퍼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곧장 샤를롯데얄 해변으로 가서 바보처럼 우두커니 않아 있기도 했다. 그리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창백을 통과했던 또 다른 한주. 그와 제스퍼는 제스퍼가 칸을 식당에서 무시한 문제로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칸과 단 둘이 어울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년전의 동지 휴가때였다. 부서의 정신과 의사는 일년동안 여행을 금지했다. 창백을 너무 자주 통과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마체젝은 지혈대를 입에 물고 유리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주사기로 손목에 선명하게 보이는 정맥을 뚫었다.
그는 여전히 바람에 눕는 갈대를 보고 싶었다. 바닷물이 해변을 부드럽고 차분하게 씼어 내리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먼 안개 속 어딘가에 바위 절벽의 윤곽이 보였다. 물, 차가운 물, 빗방울. 너무도 아름다웠다.
테레즈의 투박한 손은 그의 무릎에 놓인 검은색 여행가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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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라무트카르사이(Haadramutkarsai)!" 어린 이나얏 칸이 절벽 가장자리에서 소리치며 뛰어내렸다. 태양이 빛났다. 백미터를 추락하는 것처럼 그의 신경이 찌릿찌릿했지만, 추락은 잠시뿐이었다. 갑자기 그의 발이 모래에 닿았다. 잠시 동안 그는 발뒤꿈치로 모래를 밀어냈고, 미끄러지는 속도가 느려졌다. 어린 칸은 나무뿌리가 엉덩이를 찌르고 등이 바위에 긁히는 것을 느꼈고, 그의 셔츠가 바지밖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안경이 그의 얼굴에서 튕겨나가자 테레즈가 환호성을 지르며 주으려 달려나갔다. 소녀들이 엉망이 된 그에게 달려갔다.
"너희들은 미쳤어!" 애니가 소리쳤다. 확실히, 응원을 받을 만 하다.
하지만, 어린 제스퍼는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홀로 절벽을, 그 다음에는 그의 흰 바지와 세일러 셔츠를, 그리고 다시 절벽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안 해." 그는 입술을 오무리고 칸이 두고 간 배낭을 챙겨 숲을 지나 돌아갔다. 품위를 잃지 않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소나무로 덮인 산책로에서 소년은 두 봉우리 사이 현수교로 방향을 틀었다가 반대편 산책로 나무계단을 내려갔다. 해변으로의 이동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바보같은 칸이 뭐라고 지껄였을지 벌싸 걱정이 되었다. 말을 맞추지 않고 어쩔 생각이란 말인가?
30분 후에 제스퍼는 아래쪽 해변에 도착하여 소녀들이 떠나간 비치 타올 옆에 무력하게 서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기에서 뛰어내린 애들 못 보셨나요?" 그는 절벽을 가리켰다. 노인은 소녀들의 물건을 봐 주고 있었다. 제스퍼는 그 애들이 어디로 갔든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뜨거운 태양을 잠시 만끽한 후, 꽃무늬 비치 타올 위에 앉았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셔츠를 벗어야 할 지 잠시 고민했지만, 세련되게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최대한 시원할 수 있도록 수건위에 누웠다. 머리 아래로 팔짱을 끼고 누우니 시원했다. 제스퍼는 구름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극소량의 향기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은방울꽃의 숨결이 그의 피부게 녹아들었다. 제스퍼는 머리를 돌려 베이지색 해변을 훓어 보았다: 향기롭고 이질적이며 여성적인 물건들이 가득했다. 넥타이가 아주 깔끔하게 접힌 흰색의 얇은 여름 드레스, 작은 벨트와 쓸모없어 보이는 장식품들, 애니의 고상한 팔찌. 바구니에는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 들어있었다. 제스퍼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그렇게 많지는 않았었다. 소녀들은 먹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제스퍼도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린 그는, 작은 가방에서 튀어나온 조그만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향수병은 석류 모양이었다. 라즈베리 색 유리병 안에서 황금빛 액체가 찰랑거리는 것을 매혹적으로 지켜보았다. 바깥세상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향수병을 손에 든 채로, 왜 그랬는지 자신도 이해하지 못 한 채, 작은 머리끈을 몰래 그의 세일러 셔츠의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등을 대고 누워서 향수병 유리를 통해서 태양을 바라보았다. 잠시동안 석류의 붉은 라즈베리 색 속에 빨려들어가는 듯 느껴졌으나, 곧 샬롯의 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막내 마즈가 테레즈의 어깨 위에 앉아서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애니언니, 언니 향수병이야!"
제스퍼의 머릿속 불타는 시냅스 다발은 마법이 깨어지자마자 연결되기 시작하여, 어떻게든 그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나타나지 않도록 제어했다.
"레바숄리아." 그는 부드럽게 발음한 다음, 마치 노련한 프로처럼 마무리한다. "석류색 3번. 자연스러우면서도 강한 향나무의 상쾌한 느낌. 아주 탁월한 선택이야. 네 거야, 애니?"
제스퍼는 조용히 초연하게 앉아 있었다. 칸과 테레즈는 소녀들, 특히 미소를 지으며 라임 아이스크림을 핡고 있는 애니를 신이 나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내거야."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곧 예의바르게 말했다. "네 엄마는 향수를 만들어. 그렇지?"
"최근에는 만든다기보다는, 주로 수입을 하지. 난 말야, 석류가 어떻게 증류되는지 보기 위해 레바숄 향수공장에 간 적이 있어."
"레바숄에 가 봤다구?" 심지어 샬롯마저 감탄했다. 그녀는 값비싼 옷을 입고 다니는, 일반 고등학생 무리들과는 다른 레벨의, 학교의 여신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여신의 눈이 놀라서 크게 떠졌다. 제스퍼의 귀가 불타오르듯 붉게 변했다.
"엄마의 동료가 여행에 초대했거든."
긴장해 있던 테레즈는, 이제 위험은 지나갔다고 판단하고, 제스퍼를 다시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꽃향기가 났구만!"
테레즈의 어깨 위 막내 마즈는 소년이 말하는 모든 것에 깔깔거렸다. 운이 좋았다. 테레즈는 아이들이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나, 벌써 45분 동안이나 즐겁게 어울리고 있었다. 칸은 쓸모가 없었다. 그는 테레즈의 의도를 1/3쯤 파악했지만,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중얼거렸다.
애니는 얼굴이 붉어진 제스퍼 옆에 앉았다. "난 제스퍼 냄새가 좋아. 양말이나 탈의실에서 나는 냄새랑은 전혀 달라."
"끔찍하지." 매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솔직히, 냄새는 폰 페르센이 끔찍하지." 칸이 마침내 점수를 땄다. "페...페르센은 폴리에스텔 양말을 신는다구. 냄새가 안 나는게 정상이야."
테레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려는 줄은 상당히 길었다. 칸과 테레즈는 비상상황에서 최고의 달변가는 아니었으며, 테레즈의 계획은 제스퍼가 도착할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주제를 피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마즈가 테레즈의 어깨에 올라 타고는 끊임없는 수다로 모두를 웃게 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했다.
테레즈는 이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그는 마즈를 어깨에서 내려놓고 제스퍼를 곁눈질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담배랑 쌍안경, 네가 가져갔지?"
애니-앨린은 "담배"를 무시했다: "그 쌍안경은 뭐야? 어제 내내 작은 거울처럼 뭔가가 반짝이는 걸 봤거든. 아주 흥미로웠지."
"어-, 그냥 새를 관찰하고 있었어. 바다독수리 두마리가 둥지를 틀었거든..." 테레즈는 겨우 변명을 시작했지만, 매린조차도 심술궃게 웃었다: "새 관찰이라구?"
애니는 제스퍼 옆에서 낄낄 웃었고, 사악한 여신 샬롯은 비꼬며 말했다. "그래, 요즘 신사들 사이에서는 조류 관찰이 유행이지." 제스퍼는 붉게 달아올랐지만, 마체젝의 주근깨 얼굴속에 감춰져 있던 용감한 프란티첵이 용맹하게 앞으로 나섰다.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는 조심성을 던져버리고 그럴듯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을 걸었다. 으례 그렇듯이, 코이코에게는 전부 아니면 전무인 것이다.
“Goląbeczko moja,"(폴란드어: 나의 작은 비둘기) 테레즈 마제첵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더 희귀한 새롤 발견했을지도."
전부 아니면 전무는 종종 아무 효과가 없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20년 전, 그 무덥고 화창했던 날. 샬롯의 둥근 어깨가 앞으로 움직이자, 쇄골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의 눈썹 곡선 아래에서 머나먼 별빛처럼 차가운 녹색 눈이 미소를 지으며 빛났다. 테레즈를 위해서.
그건 기회였다!
테레즈는 정말 행복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하얀 모래가 노란색으로, 그 다음에는 주황색으로 변하더니 줄무늬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비치 타올을 어깨에 맸고, 작은 마즈는 하품을 하더니 담요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조용해졌다. 저 멀리에서는 말이 끄는 트램이 트랙위에서 비명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마당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해변은 텅 비고 하늘은 청자색 그라데이션으로 변했다. 테레즈는 소녀들에게 아버지의 사교 별장, 여름과 다음날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탈의시설은 똑바로 서서 시계바늘처럼 해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청록색, 자홍색, 그리고 차가운 진주황색의 응고된 라일락 꽃잎같은 구름 조각이 부드러운 물 위에 지평선으로 떠올랐다. 매린이 칸의 안경을 써 본다. 칸이 매린의 커다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거꾸로 뒤집힌 촛불처럼 소녀들의 형체만이 아른거렸다.
“사과 사이다 좀 줘!" 트램 문이 닫히자 애니-엘린이 소리쳤다. 네 마리의 창백한 말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객실은 저녁 황혼에 노랗게 빛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천사같은 막내 마즈가 매린의 무릎에서 자고 있었다. 요정 대모의 장난감 마술 지팡이가 그녀의 손에서 트램 바닥으로 떨어졌다.
트램이 모퉁이를 돌며 시야에서 사라지는 동안, 세 명의 소년은 트램 정류장에서 말문이 막힌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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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놀륨 판매원의 따뜻하고 시큼한 숨결이 하얀 호텔 침대보를 들썩였다.
리놀륨 판매원. 리놀륨 판매원. 리놀륨 판매원. 그는 왼손을 목덜미에 대고 목 주위에 리넨 이중 고리를 잡아당겨 매듭을 짓는다. 매듭은 복잡했고, 아주 잘 묶여 있었다. 8층 발코니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찬 공기가 하브생라르 호텔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발코니에서는 늦은 저녁까지 해변의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발코니의 갈대 바닥에는 도료가 칠해진 반사판이 달린 망원경이 베이스에서 분해되어 있었다. 정찰용이었다. 망원경 뒤쪽은 개조된 카메라였다. 옆방이나 복도가 아닌 오직 이 발코니에서만, 그 이외의 방법은 리놀륨 판매원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강렬한 악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여기 이 발코니에서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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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후, 저녁.
비드쿤 허드는 조사실의 창살문 앞에서 우울한 연합 경찰 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드는 회색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명찰에는 "비드쿤 허드"와 그의 죄수번호가 알파벳 약어로 적혀 있었다. 요원은 재킷을 벗어서 무심히 창문 앞에 던졌다. 셔츠의 겨드랑이 아래에 땀자국이 보였다. 요원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웠다. 셔츠 가슴에는 방문자의 식별 코드가 인쇄된 배지가 달려 있었다. 선풍기 날개가 윙윙거렸다.
“당신 취했군!" 비드쿤은 어깨 너머로 문을 지키고 있는 하사를 힐끗 쳐다봤다. "술 냄새가 지독하군…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면회할 기분이 아니야."
비드쿤은 마제첵과 교도관과의 대화 내용을 들으면서 히죽 웃었다.
"5분...10분...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워요..."
경비병 뒤에서 문이 닫히고, 테레즈의 손에서 복잡한 모양의 열쇠가 잠깐 반짝였다.
비드쿤은 "마-치이-젝"이라고 발음했다. "넌 코이코 놈이로군! 네놈들은 잡종 하등동물이야." 이번에는 허드의 팔과 다리 모두 수갑이 채워져 있었으며, 거대한 쇠사슬로 인해 팔이 등 뒤로 불편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귀족처럼 앉아 있었다.
"넌 거짓말을 했어. 그림은 누구한테서 받았나?" 테레즈의 눈은 흐릿했고, 남자는 화가 나서 눈을 깜박였다.
"이봐, 그라드 놈들의 겸손한 마음을 칭찬하는 우생학 연구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그림은 누구한테서 받았냐고, 이 새끼야?"
“한 학자는 너희 코이코 족속과 일 잘하는 깜둥이 노예를 짝지워야 한다고 했지."
"닥쳐!" 테레즈는 조사실 창문의 강철 블라인드를 내렸다. 철컹 소리와 함께 블라인드가 내려가자, 곧바로 교도관이 초조하게 자물쇠 열쇠를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감옥에 가고 싶어요? 여기에서는 협정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는 그라드같은 무정부 상태가 아니라구요."
창문 없는 방, 복도의 깨끗한 금속 불빛 아래 테레즈 마제첵이 책상 옆에 서서 서류 가방을 풀고 있었다. 내부 안감은 철제 상자 하나에 정확히 맞았고, 상자에는 흰색 글자로 "ZA/UM"이라고 적혀 있었다.
허드의 눈이 두려움으로 커졌다. 문 뒤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넌 그럴 권한이 없어! 허가증이 있어야 해! 허가증을 보여줘!"
"뭐라고? 어떤 돼지새끼가 꽥꽥거리네." 테레즈는 금속 상자로 허드의 얼굴을 때렸다. 회색 죄수복에 피가 쏟아졌다.
허드의 코에 작은 흰 뼈 조각이 보였다. 남자는 기절했다. 문 뒤에서 숨막히는 위협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의 견고한 열쇠가 자물쇠에서 덜거덕거렸다.
"나는 국제 연합 경찰 요원 테레즈 마체젝, 그라드의 미노바 소속입니다. 나에게는 심문할 법적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문을 다시 건드린다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 멈추고 ZA/UM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든 일이 빠르고 능숙하게 진행되었다. 테레즈는 상자의 폼 쿠션에서 약물 주입기가 달린 노란색 튜브를 꺼내고, 기괴한 풀무 모양의 장치를 벨트로 손목에 고정시킨 다음, 비드쿤 허드의 수갑찬 팔 주위로 고무 호스를 팽팽하게 당겼다. 호스를 살짝 흔들어서 장치에 고정한 다음, 바늘을 비드쿤의 정맥에 꽂았넣었다. 허드의 소위 우성인자가 담긴 작은 빨간색 방울이 주입기로 직접 흘러 들어갔다.
강철문 뒤에서는 달려오는 발소리가, 감옥 바닥에서는 무거운 부츠 소리가 들렸다. 지원군이 오고 있었다. 마체젝의 손목에서 장치 뚜껑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입술 아래로 담배 연기가 새어나오는 가지런한 의치처럼, 노란색 액체로 가득 찬 유리 병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테레즈의 얼굴로 무표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들릴듯 말듯 쉭쉭 소리가 나면서 첫 번째 약병이 딸깍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고정되었다. 뚜껑 위의 풀무가 잠시 흔들리더니, 마체젝의 손목에 있던 장치가 애완동물처럼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노란 소변 색깔의 액체가 비드쿤 히드의 손목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는 눈을 뜨고 공포에 질려 쌕쌕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뭔지 알아, 빌어먹을 돼지새끼야!" 테레즈는 비드쿤의 부은 얼굴 바로 앞에서 이빨 사이로 쉭쉭 소리를 냈다.
남자가 두려움에 눈을 굴리며 울부짖자, 남자의 입에서 약간의 피와 타액이 마제첵의 얼굴에 튀었다. “거짓말이야. 니 말이 맞아. 난… 그 애들을 몰라, 감방 동기…"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지금 말하잖아. 몇 년 전에 데렉이라는 감방 동기가 있었어…"
"나는 네놈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사실을 말 해." 테레즈의 눈이 흥분으로 팽창되고 있었다. 그가 비드쿤의 팔에서 고무 호스를 풀자, 메스칼린과 리세르그산으로 부풀어 올랐던 정맥이 눈에띄게 수축되는게 보였다.
갑자기 비드쿤이 이를 너무 꽉 깨물어 금방이라도 이빨이 부러질 것 같았다. “네놈은 나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이제 넌 나한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그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난 강하다구!"
문 뒤에서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네놈이 그렇게 생각할수록 좋아.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좋아." 테레즈는 헐떡거리며 또 다른 주입기를 기구에 부착했다. 손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늘을 자신의 정맥에 찔렀다.
첫 번째 약병은 비었고, 다음 약병을 비드쿤과 공유하며 그의 얼굴에 대고 신나서 읊조렸다. “이건 분쇄기야. 지금부터 내가 얼마나 세게 네놈에게 박아댈지 상상할 수 없을거다." 오줌처럼 노란 액체가 비드쿤의 뇌막을 뚫고 들어가 그의 머리와 두개골 아래에 공기 방울처럼 엄청난 압력이 형성된다. 남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테레즈는 소리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은 마치 백색소음처럼, 순수하게 울부짖는 폭력처럼 허드의 머리속에 밀려들어왔다.
"네놈은 백치가 될 거야, 알겠어?"
비드쿤의 두피는 요원의 손의 압력에 굴복해 꽃이 핀 것처럼 갈라졌다. 마치 뭔가가 탄생하는 것 같았다. 비드쿤의 수갑은 힘없이 덜거덕거렸고, 남자는 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내용물을 손으로 그러모으려 했지만, 그의 뇌 조각은 여전히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내용물이 너무 많고 미끌거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네놈의 구멍이 보여. 활짝 벌려져 있어. 내가 거기로 들어갈거야." 테레즈는 비드쿤 허드 전체가 그의 앞에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남자는 요원의 날카로운 손가락 아래서 떨며 온 힘을 다해 그가 찾고 있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입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테레즈가 물 속에서 헤엄치는 호랑이처럼 그의 머리 속을 헤쳐나가는 동안, 비드쿤은 테레즈라는 거울에 반사된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볼 수 있었다. 비드쿤이 자신의 머릿속에 닥친 파괴적인 살육에서 탈출하려는 그 서늘한 표면 위에서, 샬롯 룬드의 짙은 녹색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깊은 곳에서 빛이 일렁였다. 테레즈가 심문대 뒤로 지쳐서 쓰러지자, 너무 아름답고 한없는 슬픔에 비드쿤은 울기 시작했다.
바사 해안선이 그의 앞에서 반짝거렸고, 밤의 파도가 국경 경비선의 선체에 부딫혀 부서졌다. 저 멀리 도시 위로 노란색 빛의 무리가 빛나고 있었다. 도시의 모든 흰색과 노란색 불빛은 테레즈의 손에 꼭 들어갈만큼 작게 보였다. 추운데도 불구하고 그는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의 쟈켓이 바람에 펄럭거리자, 비드쿤 허드의 피가 튄 자국이 여전히 그의 흰색 드레스 셔츠에 남아있는게 보였다. 연합경찰 요원의 손에는 수갑이 느슨하게 채워져 있었고, 젊은 경관이 그가 갑판에 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거기서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경관이 물었다.
"만약 내가 교향곡을 쓴다면..."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틱틱거리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꺼내줘서 고맙네. 성과가 있었어."
"알겠습니다..." 경관은 히죽 웃었다.
"소리 좀 키워 줄 수 있나?"
"뭐라구요?"
"배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소리를 높여줘!"
"떨어질까봐 더 걱징이 되지만, 알겠습니다." 경관은 배의 선실로 들어갔다. 파도 소리와 엔진 소리 너머로, 웅장한 비트와 남자의 가성이 흘러나왔다. "만약 내가 교향곡을 쓴다면,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보여주기 위해..." 테레즈는 발로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오직 “ZA/UM"을 사용한 후에만 느낄 수 있는 안도감과 함께, 테레즈는 경관에게 말했다. "룬드가 아이들 실종사건을 방금 해결한 것 같아."
"무슨 사건요?"
"모르나? 아주 유명한 사건인데."
"언제 발생한 사건인가요?"
"아, 자네가 태어나기 전이겠군. 상관없어. 기분이 너무 좋아. 드디어 해결한 것 같아!" 테레즈가 웃었다. 그 웃음은 음울했지만 매우 진실했으며, 북해의 밤이 그를 향해 마주 웃어주는 것 같았다.
[잡담] [신성하고 끔찍한 공기] 05. Z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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