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하고 끔찌한 공기]는 제가 읽은 많지 않은 소설중에 표현력이 으뜸인 소설중의 하나입니다. 저의 경우, 문장의 아름다움 - 단순히 묘사가 화려하다거나 과장이 많다는 의미가 아닌, 미학적인 의미에서 - 이 소설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중의 하나입니다. 소설의 내용이 아무리 참신하더라도 표현력이 부족하면 김이 새고 맙니다. 그래서 어슐러 르 귄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중의 하나입니다. 그녀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을 하게 되지요.
[신성하고 끔찌한 공기]은 특히나 중의적인 표현이 뛰어난데, 예를 들어, [14. 실종자 명단]에는 앤-마가렛 룬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She moves modestly in the shade of her family tree, from which all of the leaves have fallen.
저는 이 표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녀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가계도같은 나무 그늘에서 편안하게 움직인다.'
이 표현은 중의적인 표현으로, 쓸쓸한 심상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대가 끊겼음을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가계도 같은 나무 그늘' 로 표현합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중의적인 표현이 셀 수 없도록 많습니다.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죠. 작가의 정확한 의도롤 표현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소설을 읽은 분들이 초반에 어리둥절해 하셨을, [02. 동창회] 챕터의 '소녀들의 줄 중간 어딘가에서, 거대한 수소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 머나먼 별자리에서 번쩍인다.' 라는 부분이나, 칸이 뜬금없이 실종된 매린 룬드와 춤을 추는 장면같이 말입니다. (전자는 제스퍼가 학급사진속에서 애니의 사진을 보고 그녀의 등에 있던 별자리 모양 모반을 연상하는 장면으로, 그 뒤의 별자리 그림을 통한 실마리와 연결되기 때문에 다른 내용으로 의역이 불가능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칸이 20년동안 보이지 않는 동반자로 같이한, 그의 상상(정말 상상일까요?)속의 매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지요.) 저의 부족한 문학적 소양으로는 이정도가 최선이었습니다. 제 부족한 표현력때문에 고통받았을 모든 분들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보잘것없는 번역판을 끝까지 감상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작가의 중의적인 표현은 소설의 전체 주제에도 똑같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인류학적인 범위로 생각한다면, 소설의 전체 내용은 창백과 현실세계,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세인트-미로의 메스크와 여타 이솔라의 대결입니다. 사상적으로는 허무주의(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타 이데올로기 혹은 이상의 대결입니다. 개인의 레벨에서는, 소녀들을 잊어가는 사람들(소녀들의 어머니, 내사과 형사)과, 그들을 잊지 않으려 하고 어떻게든 찾으려고 하는 세 소년 및 지기의 대결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허무주의는 적극적이고 실체가 명확한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이상은 흐릿하고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룬드 소녀들은 그 잡히지 않는 이상을 상징하고, 세 소년은 어떻게든 그 소녀들, 즉 '포스트 공산주의'의 이상을 찾으려고 하지만, 찾을수가 없습니다. 여섯명의 소년소녀가 마.약.에 취해 파티를 하는 장면은, 젊은시절 혁명의 열기(굳이 우리나라 상황과 비교하자면, 80년대의 민주화 열기)에 취해 혁명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이 연상됩니다. 소설속에서도, 소설바깥의 현실 정치에서도 공산주의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은 보이지 않거나, 대중은 흥미를 잃었습니다. 마치 소녀들이 점점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처럼요. 소설의 쓸쓸한 정서, 패배자의 정서는 거기에서 옵니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이상에 배신당한 패배자이며, 디스코 엘리시움이 성공한 현재도 본인의 소설과 게임을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채, 저작권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덫에 묶여 패배자로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소설의 후속작이 계획되어 있다는 점에서, 후속 내용에서는 좀 더 희망적인 결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디스코 엘리시움의 대벌레처럼요. 이대로라면 너무 참혹하잖아요. 결국은 창백(허무주의, 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먹혀버리는 세상이라면요.
무척 뛰어난 소설이기에, 지적재산권이 무사히 작가에게 돌아가서 후속작이 출판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코멘트처럼, "해리와 킴이 이제까지 누구도 그렇게 격렬하게 추지 못했던 디스코를 최대로 격렬하게 추면서 레바숄에 떨어질 핵폭탄으로부터 [라 레바솔리에]를 구하는 후속편, 디스코 인페르노"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감상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혹시 저작권 혹은 후속작 관련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시거나, 본인의 감상을 공유하고 싶으신 분은 공유 바랍니다.
[잡담] [신성하고 끔찍한 공기] (스포있음) 번역후기-패배자들,그리고 잡히지 않는 기억
꿈꾸는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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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있습니다. 번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