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용감한 프란티첵
때때로 가장 슬픈 실종은 해결되어버린 실종이다. 오페레타 스타 나쟈 하르난쿠르는 인기 절정의 시기에 페레멘나야 베라 강에 투신자살했다. 수력발전소가 세워진 것은 나쟈 하르난쿠르가 투신한 이후였다. 나쟈는 환상적인 공연을 마친 어느 가을 저녁에 사라졌고, 천상의 소프라노는 여전히 오페라 하우스에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이브닝 가운을 입고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보았다는 노인의 말은 사실일까? 아니면, 일년후에 레바숄에서 그녀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광적인 추종자의 얘기는? 나쟈가 사실은 허무주의자이자 종말의 예언자이며, 메스쿠의 스파이었다는 통속소설속 이야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을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남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수지의 진흙탕 속에서 발견된, 이브닝 가운을 입은 나쟈의 유해는 누구도 볼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눈구멍의 홍합군락이나 반짝이는 금니, 혹은 수력발전소 건설직원의 충격받은 표정을 볼 필요는 없었다.
헛수고가 세상의 모양을 만든다. 역사는 헛수고에 관한 이야기이고, 진보는 헛수고의 연속에 불과하다. "진보!" 미래주의자는 말한다. "희생" 혁명가는 말한다. "복고!" 도덕주의자가 뒷줄에서 소리친다. "실패" 화난 혁명가가 말한다. "시간은 회색이다." 라고 그는 말한다. 혁명의 실패는 새 시대의 시작이다. 크라스 마조프는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을 하고, 아바다나이즈는 도브레프와 함께 오존네 섬에서 독약을 마신다. 바람이 야자수 아래 그들의 유골위로 모래를 날린다. 역사는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가? 한때 전세계에서 의인들이 모였다. 교사, 작가, 이주노동자들이 참호에 모였고, 젊은 군인들은 탈영해서 합류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역사책에 실릴 용감한 소년소녀들은 은색 뿔왕관을 쓴 채 하얀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했다.
반란은 진압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대초원의 집단매장지에 묻혔다. 그라드 이솔라에서 패배한 공산주의자들은 사마라로 후퇴하여 관료들이 통치하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가 되었다. 혁명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아바다나이즈와 도브레프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35년 후였는데, 이름없는 오존네의 섬에서 토요일 저녁 산책중이던 리체 르폼메의 8살난 아들 유진에 의해 발견된 둘의 유해는 여전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나비넥타이에 셔츠를 입은 그 소년은 탈색되고 무뎌진 과거의 유골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날까? 시간은 그들을 한 벌의 카드처럼 뒤섞어 놓았다. 그 후 리체는 그 땅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강센터와 함께 호텔을 세웠다.
그러나 가장 큰 실패는 마조프의 세계혁명이 유혈사태와 패배로 끝난 것이나, 지금은 아로마테라피 마사지 대기실에 전시되고 있는 두 혁명적 연인의 유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실패는 내부 불만을 억누르면서 세계 초강대국이 된 그라드였다. 그 도시들은 번성했고, 눈부신 성장은 궤도에서 반짝이는 네트워크처럼 빛났다. 사람들이 경멸적으로 "코이코스(kojkos)"라고 불렸던 국가인 지엠스크를 포함해서, 한때 많은 마조프 지지자를 거느렸던 모든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코이코스"라는 멸칭은 계속되어 결국에는 그들 스스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테레즈 마체젝은 7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모범적인 코이코이자 외교관, 그리고 부패한 아첨꾼으로, 그를 바사에 있는 학교로 보내기 전이았다. 그 도시는 생태학적 재앙 지역으로, 인구 백만명을 넘겨 붕괴를 향한 두번째 발전단계에 있는 인간정착지였다.그 도시는 지엠스크와 유고 국경에까지 확장됐다. 그 괴물은 역사적 중심지였던 페르디듀르크 왕실 구시가지와 렌카의 소나무 공원을 삼켰다. 여름이 시작되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어떤 이름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들은 집마당에서 외쳤다. 조용한 거리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고, 그 이름의 메아리만이 그라드 민병대의 귀에 울려퍼졌다.
"용감한 프란티첵..."
코이코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 스타이자 혁명가. 폭동이 잔인하게 진압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고, 두달동안 그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야쿠트 보호구역의 타이가에 숨어 그곳의 토착 사제들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습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초원 독수리같은 광대뼈와 형형한 눈빛, 마치 타이가 위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부드러운 미소, 진지한 눈썹이 걱정으로 찌푸려지는 드문 경우에만 나타나는 미소... 그의 대담한 얼굴은 용감한 여성들이 일하는 스웨터 공장에서 금지된 필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프란티첵이 사마라에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조만간 사마라 인민공화국의 군대와 돌아올 것이라고. 무슨 소리. 프란티첵은 저 멀리 콜라의 이그누스 닐센의 오두막에 있어. 결코 그를 찾을 수 없도록! 닥쳐! 용감한 프란티첵은 숨지 않아. 바로 어제, 고기를 사려는 줄에서 그를 봤어. 가짜 턱수염과 정육점 앞치마를 두르고 자신을 보잠 사르크라고 불렸지. 그 이름을 거꾸로 읽어보라구!
하지만 몇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도 없이 가을이 되었다. 산업지구의 분진은 금빛과 붉은빛 나뭇잎위에 애도의 베일처럼 내렸다. 10월에는 지엠스크에서 완전히 다른 소문이 조용하면서도 은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용감한 프란티첵은 쓰레기통 뒤에서 총을 맞았다고.
07. 어굿난 세상, 뒤엉킨 시간
이나얏 칸은 지하실 창문 아래 자신의 침대에서 불안하게 뒤척였다.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가로등의 창백한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지하실은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오래된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회색 빛에 먼지입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테이블의 휘장 아래에는 색바랜 기념품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어두운 사각형 그림자를 드리우며 바닥에 떨어져 희미해졌다. 방 중앙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유리 케이스가 시선을 끌었다. 선반에는 수 많은 작은 물건들이 놓여져 있었다. [일어나, 수집가 양반. 얼마나 더 잘 생각이야? 안자고 있는 거 알아.] 칸의 손가락이 침대 머리쪽 주변을 더듬었다. 익숙하게 잡동사니를 뒤져 테이프 레코더 버튼을 찾았다. 그러나, 담요아래에 몸을 웅크리는 것이 더 기분좋을것 같았다. 퇴근하는 보행자들의 신발이 젖은 포장도로를 찰싹거렸고, 칸은 좀 더 자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 좀, 그러지 마!] 신이 난 장난감이 말한다. [기상 노래를 들려줘.] 칸의 긴장된 심장 근육이 따끔거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잠을 자는건 불가능했다. 그의 손은 다시 머리쪽을 더듬어 테이프 레코더의 상아 버튼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휘장 아래에는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딸깍 소리가 나고, 테이프에서 잠시 쉭쉭 소리가 들리더니, 기타의 부드러운 아르페지오와 오래된 전자오르간의 부드러운 소리가 시작되었다.
♫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어요...
베이스와 함께 시끄럽고 쿵쿵대는 드럼 비트가 왼쪽 채널에서 들려온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파자마를 입은 칸이 드럼이 울리는 소리에 맞춰 앉은 자세로 일어난다. 뱀 허물같은 이불을 밀어내고 끝이 뾰족한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는다. 면도하지 않은 턱으로 마지막 하품을 하고, 커다란 아몬드 모양의 눈을 크게 뜨고 안경을 낀다. 칸은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나른하게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 정말 오래 걸렸지만 당신을 찾아서 너무 기뻐요
파자마 상의 밑으로 털이 복슬복슬한 배를 드럼처럼 두드리며 다음 부분에 장단을 맞춘다.
♫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동시에 발로 스위치를 누른다. 오래된 전구가 드럼비트에 맞춰서 깜빡인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잠시 윙윙거리다가 꺼진다. 무명의 십이음 작곡가 콩트 드 페루즈-미트레스의 사인이 적힌 십이면체는 황금 빛을 내다가 어둠속으로 가라않는다. 전구에 다시 불이 들어오면서, 책 뒷면의 제목 "로스 데사파레이도스"(스페인어: 실종된 사람들)가 어둠속에 떠오른다.
♫ 눈물을 흘리며 찾았어요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어요
노래의 클라이막스에서 칸은 부끄러움을 던져버리고 큰소리로 노래하며 공연하듯 지하실을 돌아다닌다. 천장 조명을 따라서 테이블 위에 세심하게 한줄로 배열된 물건들이 보인다. 나무 서류철은 알파벳 순서로 정렬되어 있고, 벽에는 나쟈 하르난쿠르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녀는 신에게 간청하기 위해 라무트 카르자이가 순례했던 에르그 사막의 지도가 그려진 타원형 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그 순례에서 신비한 결말을 맞았으리라고 추정되는 장소에는 핀이 꽃혀 있다. 칸은 이곳을 지나면서 보드에서 커튼을 걷어내고 눈앞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견운모 광석으로 만든 손가락 크기의 용 조각이 부착된, 황금색과 녹색의 소형 선박 12척이 줄지어 서 있다. 흰색 물결 모양이 솟아오르는 진한 파란색 가짜 바다위에 노가 줄지어 서 있는 작은 배들에는 파피루스의 노란색 돛대가 자랑스럽게 드리워져 있다. 갈대 갑옷을 입은 남자 인형들이 창위에 깃발을 펄럭이며 배위에 서 있다. 천명의 곤추 원정대이다. 그들은 사프레 황제의 명령에 따라 3000여년 전에 사마라 해안에서 동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은 황제를 불사로 만들 복숭아를 찾고 있었다.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 것. 2500년 후, 그들이 정착했던 흔적이 동쪽 아니스 섬에서 발견되었다. 곤추 원정대는 돌아올 수 없었다. 황제는 잔인하고 사나운 폭군이었고, 사람을 불사로 만드는 복숭아가 있을리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 장신구들, 남겨진 것들이 칸의 마음을 짜릿하면서도 낯설게 사로잡는다. 그는 결코 그 의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기이하게도 칸의 입가에는 살찐 고양이에게 턱을 긁어주었을때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책상위, 초록색 전등 불빛 아래는 온통 소녀들에 관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신문 스크랩과 흩어진 메모들 사이에는 "매린의 편지" 사본도 있었다. 필체분석상 결과는 95% 일치였다. 편지는 샤를롯데얄 해변의 마지막 날로부터 일년 반 후에 소녀의 부모에게 도착했다. "우린 잘 있어요. 한 남자와 같이 지내요." 자신을 매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말한다. "사랑해요."
칸이 커피 포트를 불위에 올리자 노래는 초반부처럼 부드럽고 조용해진다. 칸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언제까지나 영원히 들을 수 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두 손을 가슴위에 얹는다.
♫ 이제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느낄 수 있어요 어떻게 당신을 잃어버렸던 걸까요?
집 바깥에서는, 모터 캐리지가 도착하면서 바퀴가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지하실 창문에 빗방울이 보인다. 녹음기에서 "찰칵" 소리가 나고 노래가 끝난다. 두 달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달력이 문에 붙어 있다. 아직 8월인데, 28일 아래에는 '세계 실종자의 날' 이라고 적혀 있다. 그날은 바로 그들을 기리는 8월28일이다. 바로 그 날이다.
"이니야, 네 친구 제스퍼가 왔다. 양치 해야지!" 칸의 어머니가 위층 부엌에서 소리친다. 남자는 가운을 입고 지하실 계단을 올라간다.
방 중앙에는 유리 케이스 안에 "하르난쿠르"가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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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크리스탈 잔이 짤랑거렸다. 토요일 밤의 텔레풍켄 타워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떠들썩했다. 탁 트인 창문 뒤로는 날씬한 유령같은 사람들과 어둠, 눈과 빛의 바사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 음식은 가격만큼이나 맛이 있었다. 음식은 별 다섯개 짜리였고, 상류층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통신부의 대표가 그의 아내와 와 있었다. 그리고 프레이방크의 CEO가 매력적인 가수 페르닐라 룬드크비스트와 베스퍼의 사업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가수는 올리브가 곁들여진 샐러드를 먹고 있었고, CEO는 베스퍼의 비지니스 파트너에게 가재를 추천하고 있었다. 여기 맛있으니까, 꼭 드셔보세요! 그리고, 저기 수염 기른 교수 옆에 있는 사람은 오스카 조른 후보로 4번이나 지명된 콘라드 게셀 아닌가? 매우 똑똑한 사람이지...프라이방크의 CEO는 당연히 페르세우스 블랙을 입고 있다. 정신 나갔군...그리고, 세상에! 서른살짜리 얼간이가 있네! 얼간이는 아직도 엄마 집의 지하실에 살지. 얼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을때 입었던 하늘색 셔츠를 여전히 입고 있어.
[우리는 당신이 싫어, 얼간이.]
[누가 저 얼간이를 들여보냈어?]
[너무 슬퍼, 데이트중인가봐. 한심하군. 상대 여자는 10분동안 한 마디도 안했어...목을 매고 말지.]
[돈을 좀 주면 어떨까? 10 레알 정도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역겨운 얼간이한테 아무 것도 주지마. 정말 싫어.]
[식사값도 없을 거야, 분명히. 저 와인은 40레알은 할텐데, 하하-하!]
[네가 싫어, 얼간이, 나가 죽어, 정말 끔찍하게 싫어!]
칸은 땀을 흘리며 손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다...머리를 흔들고, 눈을 깜빡이면서, 이 굴욕의 공격을 끝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던 그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그의 맞은 편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갈색머리 여자가 와인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답답함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탁 트인 천장과 팔 아래 놓인 아름다운 암갈색 테이블을 힐끗 바라보다가 갑자기 할말이 떠 올랐다.
"여긴 정말 아름다워요. 내 생각에는 새로 디자인한 것 같아요.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는, 완전히 달랐었거든요."
칸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맞아요! 내 친구가 디자인했죠. 그 친구는 미니멀하고 깔끔한 걸 좋아해요.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그가 일종의 발명을 한 것 같아요. 그걸로 꽤 유명하죠."
"드 라 구아르디?"
"맞아요, 제스퍼요."
"그를 알아요? 그 사람 정말 재능있어요."
"물론 알지요. 제스퍼와 나는 오랬동안 친구였어요. 그가 유명해지기 전부터요. 솔직히 말하자면..." 칸이 초조한 미소를 지었다. "...저라면 여기에 예약 못했을 거에요. 만약, 그러니까..."
"아! 의문이 풀렸네요."
"무엇이 궁금했는데요?" 칸이 물었지만, 갈색 머리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칸이 저편의 손님들을 힐끔 쳐다봤지만, 그 손님은 돌아보지 않았는데, 칸에게는 경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콘라드 게셀의 테이블에서는, 한 여자가 다큐멘타리 제작자에게 금발의 날씬한 남자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한 웨이터가 "정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라임 조각을 넣은 얼음물을 들고 그 신사에게 달려갔다. 짙은 회색의 웨이스트컷 양복을 입고 치아 사이게 라임조각을 문 그 신사는 매우 젊어 보이고 우아했다. 수수한 티셔츠를 재킷속에 뽐내고 있는 그의 세련된 모습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의 스타일에 잘 어울렸다. 그의 셔츠에는 유명한 댄스 아티스트의 앨범 커버가 그려져 있었다.
"제스퍼!" 칸은 테이블 너머로 부적절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데이트 상대는 약간 움찔하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게셀과 제스퍼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저기 있네요." 칸이 안도하듯 테이블 건너편의 갈색 머리에게 유쾌하게 말했다. 칸은 그의 친구가 그가 어디 있는지 더 잘 볼 수 있도록 일어섰다.
"이봐, 제스퍼!"
프릴 셔츠의 겨드랑이가 땀 자국인 채로 텔레풍켄의 탁 트인 레스토랑 한 가운데 선 그는, 제스퍼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리고 콘라드 게셀을 향해 팔을 펼치는 것을 지켜봤다. 제스퍼는 그를 모르는 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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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18년전 더운 토요일 오후, 애니는 로즈힙 덤불에 짧은 치마 아래 다리를 긁혔다. 소녀가 화를 내면서 덤불에서 나오자, 제스퍼가 의사를 자처하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보여줘!" 애니는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려다가 그만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망할 덤불들...오!" 그녀는 말하는 중간에 멈췄고, 그녀의 입은 "너무 아름다워" 라고 말하려는 듯했다.
"아름다워," 어린 제스퍼는 마음속에 애니의 다리와 말려 올라가는 테니스 치마의 주름진 가장자리를 생각하며 말했다. 칸은 덤불을 밀쳤고, 샬롯과 매린은 입을 벌린 채 절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너희들이 왜 항상 여기로 오는지 이제 알겠어. 정말 바람이 상쾌해..." 바람이 샬롯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얼굴에 날렸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무심코 옆으로 넘기며 만끽했다. "으-음..."
바람이 하얀 꽃잎을 허공으로 흩뿌렸다. 날개 달린 드레스를 입은 작은 마즈는 마치 바스락거리는 덤불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요정 대모의 장난감 요술지팡이로 허공에 모양을 그리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로즈힙의 가시에 대해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테레즈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그는 로즈힙 덤불을 뚫고 나가서 마즈를 잔디위에 내려놓았다. 테레즈는 여기저기 긁힌 채 멍청하게 웃고 있었다. 짠 바람이 잦아들고, 공기는 시럽같은 꽃 향기로 가득했다. 곤충이 윙윙거렸다. 소년들의 은신처 잔디밭은 그 일곱 명이 겨우 들어갈 만큼 좁았고, 그게 계획이었다. 어쨌든 제스퍼는 만족했다. 소년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히죽거리며 다음날 계획을 상상하고 들떠서 돌아다녔다.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테레즈는 오르는데 걸리는 긴 시간과 덤불의 가시때문에 언덕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제스퍼는 칸과 함께, 그곳이 여전히 최고의 장소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소녀들은 경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칸은 수평선에서 빛나는 낡은 그라드 순양함의 사양, 창백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동력에 대해 설명했다. 다행히도 매린은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바람이 불지만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애니는 여전히 일광욕을 하고 싶어했다. 매린은 비치 타월의 포장을 풀고 뒤뚱뒤뚱 걷고 있는 마즈와 함께 칸 옆에 섰다. 칸은 기억을 뒤져보지만, 유감스럽게도 골동품 순양함에 대한 더 흥미로운 주제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테레즈와 제스퍼가 말하게 할 수 밖에.
그는 등을 대고 누워 눈을 감았다.
주황빛으로 반짝이는 태양, 물소리, 도구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조용히 멀어지면서, 소년의 공상과학 상상 안에는 우주궤도 위로 가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직한 진동이 칸의 소름을 돋게 했다. 얼굴도 없고 바닥도 없는 파장이 거대한 능선 너머로 퍼져나갔다. 하늘에서는 잊혀진 고대 통신위성이 지구의 곡률을 향해 자신의 녹슨 몸체를 조정했다. 성층권 가장자리에서 고대 통신위성은 두루미 떼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캐터펄트의 관절 위치를 조정하고, 통신장치가 에테르속에서 찰칵거렸다. 여러개의 측정장치로 이루어진 겹눈다발이 한여름 돌풍속에 잠깐 꽃이 피는 카틀라 이솔라의 남쪽 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꿈처럼,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륙은 태풍 소용돌이의 시원한 요람속에서 졸고 있었다. 창백은 어디든 둘러싸고 있었다. 과거는 다가와서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그러나 짙은 녹색의 숲과 하얀 해안선, 북해의 반짝이는 바다, 바사 군도와 샤를롯데얄 해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점점 줄어서 압축되는 면적이 작아질수록 실체는 더욱 더 기이하게 빛을 발했다.
일곱명은 바위 꼭대기에 녹색 돗자리를 깔고 반원형으로 누웠다. 아래쪽에서는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고, 위로는 공중정원의 솜뭉치같은 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도시들은 칸의 곡면 안경알에 비쳤고, 그는 눈을 떴다. 향기로운 물질만으로 만들어진 듯한 샬롯 룬드는 한 번에 여름 드레스를 머리 위로 끌어 당겨 벗었다. 그녀의 둥근 곡선과 햇빛에 그을린 매끈한 피부가 눈부셨다. 테레즈는 그녀의 가느다란 관절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더운 날씨였다. 애니는 자신의 반점을 부끄러워해서 선글라스를 머리띠처럼 쓰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제스퍼는 정말로 그 반점을 보고 싶었으나, 감히 보여달라고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린은 차분하게 드레스 벨트의 리본을 풀어 스커드 밑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옷자락이 돛처럼 펄럭였다. "사이다가 있어!" 상체를 드러낸 테레즈가 말했다. 그의 배낭 깊숙한 곳으로부터 어젯밤 전례없이 복잡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3리터짜리 용기가 나타났다. 유리병 위에서 물방울이 반짝거렸고, 밀봉된 뚜껑이 쉭 소리를 내며 열리자, 병 입구에서 작게 이산화탄소 증기가 올라왔다. 사과 사이다에서 거품이 올라와서 거품주위에 또 다른 거품이 쌓였다.
소녀들은 군침을 흘렸지만, 어린 마즈는 혼란스러워하며 레몬 조각이 떠 있는 레모네이드를 고집했다. 테레즈는 차가운 병을 샬롯의 뜨거운 빰에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그의 아버지는 문화협력 가든파티가 있는 다음주말에야 갤러리 주인들과 큐레이터들에게 제공할 사이다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테레즈는 신경쓰지 않았다. 샬롯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사이다가 얼마나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보라!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매판 지식인, 모범적인 코이코, 강탈자이며 사기꾼일 뿐이었다. 용감한 프란티첵은 그를 경멸할 것이다.
"너는 왜 그렇게 조용해?" 매린이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물으면서 칸을 향해 몸을 굴렸다.
귀가 밝은 애니가 듣고 말았다. "이상하게 말을 붙이네, 작은 양말!" 그녀가 놀렸다.
"아, 조용히 해." 매린은 칸의 귀에 닿을 듯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싱긋 웃었다. "얘기해 줘... 넌 항상 역사나 자연과학에 대해 멋지게 설명하잖아..."
칸은 마음속으로 학교 책상 뒤에서 벌떡 일어나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그거야! 그 복숭아 이야기는 정말 끝내줬어!"
"애니, 방해하지 마..." 매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무슨 복숭아 이야기?"
"말해봐, 칸. 정말 시끄럽네. 일마라와 함대, 그리고 황제에 대해서."
마침내 칸이 입을 열었다. "일마라 이솔라가 아니야, 친구. 사마라야." "아, 미안, 인종차별적인 의도는 없었어."
"정말 웃기는군, 제스퍼. 어쨌든..." 이제 칸도 매린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넌 발표때 아팠었지." 칸은 아주 잘 기억했다. 그는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발표를 연기하고 싶었지만, 교사는 상황의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마라, 정확히는 사프레에는 복숭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화가 있어. 아니세 섬에 체리가 있다면 사마라에는 복숭아가 있거든. 사마라에서는 복숭아가 야생으로 자라고, 숲에서 딸 수도 있어. 살구, 복숭아, 천도복숭아 모두 사마라에서 생산되지. 심지어 지금도 많은 과일이 창백을 통해서 SRV로부터 수입되고 있어." 매린은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래 전, 카틀라에 아직 사람이 살기도 전에 사프레의 황제가 자신을 불사로 만들어 줄 복숭아를 가져오라고 가장 유명한 탐험가인 곤추를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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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년 후.
바사의 도시는 푸른색이다. 퀘니그스말름의 러시아워 거리에는 화려한 불빛이 반짝인다. 짙은 회색의 하늘 아래를 북유럽 군중이 마치 동화속의 유령들처럼 지나간다. 테레즈의 머리가 핑핑 돈다. 그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둔해진 채 욱신거리고, 니코틴 부족이 그의 눈을 압박하는 가운데, 소음은 희미하면서 뭉개져서 들린다. 그는 코트자락을 깔고 경찰서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성긴 이슬비가 그의 졸린 얼굴을 촉촉하게 적신다.
5분전에 그는 쫓겨나듯이 풀려났다. 아직도 꿈의 마지막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 기억은 그의 마음속에 울려퍼지며, 깨어 있는 의식 아래, 찰랑이는 홀수선위로 미끄러지는 괴물이 되어 그에게 두통을 안겨준다. 그는 폭력에 단련되어 있지만, 인간성은 남아있다. 환상속에서 그는 로즈힙 덤불을 헤치고 절벽위 그들을 바라본다. 그는 당장 그들을 찢어발기고 싶지만, 참을성있게 기다린다. 담배를 피우던 소나무 숲에서 테레즈는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그가 몰래 숨어드는 것을 본다. 그는 칸의 쌍안경 구석에서 기어서 해변을 내려간 다음, 잠든 마즈를 안고 말이 끄는 트램의 문을 닫는다. 바닥없는 공허가 그를 삼켜버리려 한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곧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남은 생이 멀지 않았다. 거짓이고 끔찍하다. 그들이 마지막 밤에 소녀들의 비밀 해변에서 수영하러 물속에 들어갔을 때, 그는 소녀들의 자리로 다가와 소녀들 소지품의 냄새를 맡는다. 그 남자는 기름이 발라진 고기파이를 씹으며 차양 너머로 그들을 지켜본다. 테레즈는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 아그네타가 된다. 그의 시야 한쪽에서 남자가 창가를 지나갈 때마다 얼굴이 바뀐다. 그는 몇가지 이유때문에 테레즈가 무서워하는 어른이 된 칸이었다가, 옷을 바꿔 입듯이 비드쿤 허드가 된다. 때때로 테레즈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테레즈는 그 이후 그의 친구들을 만날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그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소심하게, 누군가와 부딪힐까봐, 누군가를 화나게 할까봐 두려워 군중속을 헤쳐 나간다.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흘러가고, 큰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빛나자 동력 자전차가 멈추고, 배기관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엔진이 고동친다. 순환 교차로에서 그는 군중들과 함께 흘러가고, 그의 위로는 은은한 네온 불빛 사이로 거대한 란제리 모델이 백화점 벽 위에서 웃고 있다. 줄지어 늘어선 택시 표시등의 불빛. 테레즈가 택시안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택시 창문은 젖어 가고, 비드쿤 허드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 혹은 꿈속에서. 테레즈는 확신할 수 없다. - 괴물이 쪼그려 앉아 소녀들의 찢겨진 몸을 다시 합쳐 키메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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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진눈깨비가 택시 바퀴 아래에서 뭉개지며 화강암 보도블럭이 덜컥거렸다. 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 가지 저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차가 살렘에 있는 그의 집 앞에 멈췄다. 갈색 머리의 여자는 무릎에 핸드백을 들고 있었고, 남자는 자기쪽의 문을 열었다. "이런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아요. 나는 잘 알아요. 그건 사실..." 그는 밖으로 나와 택시 안쪽 문에 기댔다 : "...나는 실종에 관한 최고 전문가란 말입니다."
칸은 택시 문을 쾅 닫고 세 걸음만에 인도를 건너 문 앞 계단에 도착해 열쇠를 꽃고 목조주택 복도로 들어섰다. 바깥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리고, 택시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택내부는 어둡고 따뜻했다. 부엌에서는 감자가 끓고 있었다. "엄마, 끔찍해요!" 칸은 벽에 걸린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정말 끔찍해요, 묻지도 마세요." 그의 노란색 손가락은 16자리 숫자를 차례로 눌렀다. 수신자 부담의 이솔라간 통화였다.
"암바르춤잔씨, 경매에서 당시 번호를 받았습니다."
"암바르춤잔씨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남자 비서의 목소리가 멀리서 조용히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나는 "하르난쿠르"때문에 전화했어요. 비행선 매뉴얼을 받기로 했단 말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여보세요, 내말 들려요?" 회선이 딸깍거리더니 통화음은 창백속으로 사라졌고, 시간의 소음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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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테레즈로부터 소식 들었어?" 제스퍼는 칸의 집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묻는다. 가난의 달콤한 냄새가 떠돌고 있다. 아마도 오래된 시나몬 빵 냄새일 것이다.
“아니, 아무 소식도 없었어. 너에게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이 모든게 걱정돼." 칸은 목욕 가운을 펄럭이며 제스퍼를 곧바로 지하실로 안내한다. "옷은 저기에 걸어." 그는 계단 위의 못을 가리킨다.
제스퍼는 불편함을 느낀다. 예전과 똑같은, 그가 싫어했던 이상한 냄새. 이 냄새를 참느니 차라리 이 모든 쓰레기를 태워버리고 길거리에서 사는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칸의 불쌍한 노모가 언제라도 어디선가 나타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칸은 단호했다. 자신은 도시까지 나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집에서 하지 않을 거면 아예 하지 않겠다고.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제스퍼는 반대할 수 없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하실을 향해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안의 소년이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와!"
"그래. 꽤 인상적이지."
“내 말은," 제스퍼의 큰 머리가 그의 목 위에서 회전한다. "오!" 그는 “곤추원정대!" 라고 외친다. 그는 사프레 함대 기함의 뱃머리에 서 있는 작은 남자를 검지로 건드린다. 손가락 끝 정도의 크기에 사마라의 용처럼 길게 처진 콧수염을 기른 작은 곤추는 황제의 문장이 달린 깃발을 들고 있다. 남자의 다른 손에는 압정 머리만 한 크기의, 그가 스스로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나침반이 들려져 있다.
“1년 전에 완성했어. 지난번에는 배만 있었고, 도색도 되지 않은 상태였지."
칸은 방 중앙에 자랑스럽게 서 있다.
“잠깐, 이건 뭐야 ?" 제스퍼는 뒤쪽의 반짝이는 진열장을 가리킨다.
“그게… 그게 보물1호지! 최고로 아끼는거야! 제스퍼, 그게 바로 '하르난쿠르'야!"
"진품?!" 제스퍼는 경건한 태도로 쇼케이스에 다가간다.
“당연히 아니지. 순진하게 굴지 마. 진품은 너무 비싸서 너도 못 사." 칸은 전문가의 우월감으로 웃는다. “모조품이야. 실존하는 두 개 중 하나야."
쇼케이스의 유리 패널 뒤에는 "하르난쿠르"의 연약한 실루엣이 투영되어 있다. 제스퍼는 자신보다 키가 큰 유리상자를 쓰다듬으며 불을 켜는 스위치를 찾는다.
"받침대 밑에 큰 스위치를 눌러봐."
제스퍼가 조명을 켜자 쇼케이스가 아니라 10층짜리 골동품 비행선 자체의 빛나는 조명이 켜진다. 모형은 쇼케이스 중앙에 매달려 있으며, 보이지 않는 와이어로 광택을 낸 은색의 나무 백조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다. 일등석 선실의 크리스탈 유리 벽 뒤에는 작은 샹들리에가 4층 홀을 통해 반짝인다. 작은 사람들이 얼어붙어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모형은 정말 가볍고 연약해 보인다. 은색 아치는 선체의 돛처럼 뻗어 있으며, 세스트 황후의 니켈 도금 백조 문장처럼 뱃머리를 향하고 있다.
“이런 걸로 창백을 넘어가려고 했다니, 놀랍지 않아? 봐! 여기 담요도 있어." 칸은 마침내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담요! 여기 이 작은 바구니에는 야외용 담요가 들어있어! 말도 안되지. 자기 여자와 함께 창백에 앉아있으려 했다니. 솔직히 난 하루 종일 이 모형을 쳐다볼 수도 있어!"
“그래, 이건, 뭐, 정말 인상적인데…" 칸은 마치 지난 2년간 한번도 그렇게 관찰한 적이 없는것처럼 모형 옆의 팔걸이의자에 않아서, 제스퍼가 진열장 주위를 맴돌며 그가 발견한 것들을 그와 공유할 때마다 맞장구친다.
“거기 앉아. 거기서 특히 잘 보여." 그가 의자를 가리킨다. 제스퍼는 의자에 앉을 시간이 없다. "잠깐만, 프로펠러가..."
"이제 스위치를 한 단계 더 높여 봐." 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제스퍼는 이마에 손을 얹고 입을 벌린다. 백조같은 커다란 은색 프로펠러는 칼처럼 날카롭다. 그 중 6개는 배 아래 측면에서 방향을 조정하기 위해 서로 다른 각도로 지면을 향하고 있으며, 선미에 있는 더 큰 2개의 프로펠러는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다가 점점 더 큰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회전한다. 개별 칼날은 사라지고, 빛나고 흐릿한 원반만이 남는다. 프로펠러가 너무 크고 역동적이어서 제스퍼는 배가 진열장에서 이륙하여 날아가다가 방과 역사에서 사라질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배의 선체에는 그라드 문자로 아름다운 비문 "하르난쿠르" 가 새겨져 있다.
제스퍼는 물병 뚜껑을 열고, 칸은 커피를 만든다. 그들은 진열장 가장자리,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배를 보면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이제 칸이 때때로 자신을 감명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어리석은 희망을 느낀다. 여전히 모닝 가운과 파자마 바지를 입은 채, 칸은 게으른 고양이같이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고 있고, 제스퍼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7시인데, 아직 안 자고 있었네?"
“좀 힘이 빠져서."
“그런 것 같아." 제스퍼는 우울한 웃음을 지으며 한참 동안 “하르난쿠르"를 쳐다본다. “테레즈 말이야, 왜 바로 전화하지 않는지 모르겠네. 이틀밤을 기다렸는데, 신경이 거슬려."
“나는 안 불안해. 나는 항상 야행성이었거든. 예술가 타입이지." 칸이 미소를 짓는다. "어쩌면 허드에게서 뭔가를 알아내서 바로 뛰어들었을수도."
"그럼 넌 허드가 뭔가 저질렀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
“...뭔가를 저질러? 흥! 퍽이나! 그 놈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놈들 이라구. 난 이것도 했어, 저것도 했고, 에르노 파스테르나크보다 더 많이 했어, 어쩌구 저쩌구. 유명해지려고 무슨말이든 지껄이지. 하지만, 그 그림은…"
"한번에 하나씩! 나도 알아!"
"맞아. 뭔가가 었어."
“그래, 뭔가가." 제스퍼는 일어나서 코트 행거에서 가방을 꺼냈다. “하지만 테레즈가 혼자서 행동할 것 같진 않아. 내가 아는 한, 우리는 합의를 했어. 그 애들에 관한 한, 같이 움직인다고."
"맞아..." 칸은 동의하지만, 여전히 신비하고 멍한 표정을 하고 부드러운 검정색 소포가 그의 무릎 위에 놓일 때까지 곁눈질로 "하르난쿠르"를 바라본다. . "꺼내봐! 어… 여자 지인이 갖다 준거야. 살 좀 찌라고. 너한테 맞을 것 같아." 칸은 "PB"라고 표시된 패키지에서 신상 블랙 페르세우스 드레스 셔츠를 꺼낸다.
“고마워!"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이제 그 주름 장식 달린 넝마는 던져버리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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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의 감자색 코이코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거의 검은색으로 보인다.
"실례합니다. 혹시 10 레알짜리 잔돈 있나요?" 그는 긴 코트를 입은채 키오스크 카운터 뒤에 웅크려 앉는다.
십대 소녀는 무관심하게 껌을 씹는다. “아니,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성냥갑처럼 가장 싼 물건을 살 테니, 동전으로 거슬러 주십시오."
"죄송하지만, 성냥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무뚝뚝한 십대 소녀보다 더 불쾌한 것은 없다. 소녀는 입과 손가락으로 치약색 껌을 잡아늘리고 있다.
"'아스트라'는 있어요?"
"뭐라고요?"
"'아스트라'요."
"그게 뭔데요?"
"...막대사탕. 저쪽의 막대사탕을 주세요, 빨리." 캬라멜 소용돌이가 들어간 라즈베리 맛 막대사탕이 마체젝의 비뚤어진 이빨사이에서 달그락 소리를 낸다. 그는 공중전화 받침대에 동전을 와르르 쏟았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는 달콤한 흙냄새가 나고, 물방울이 유리창을 따라서 기분좋게 흐른다. 테레즈는 공중전화 박스를 좋아했다. 막대사탕도. 성냥을 팔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어깨와 귀로 수화기를 지탱하고 번호를 돌린다. 이제는 머리가 꽤 맑아져 있었다. 캬라멜은 달콤하고 라즈베리는 신맛이 났다. 제스퍼는 집에 없었다. 전화기 아래 테이블에 연합경찰 앰블럼이 새겨진 수첩을 전화번호 확인을 위해서 펼친다. 테레즈의 젖은 손가락이 그 위에 얼룩을 남긴다.
전화를 걸기전에 먼저 말할 준비를 한다. "크,크,카브로레바,칸." 바퀴가 덜거덕거리고, 부스 유리 밖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나와 트램으로 올라탄다. 프라이방크의 바다독수리 문양이 비를 맞으며 은행의 황금빛 간판에서 활공한다.
"안녕하세요, 이나얏 칸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테레즈, 너냐?" 칸의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끊어지며 들린다.
"예, 접니다. 이나얏 집에 있나요?"
"테레즈, 내 말 들아봐. 옜날 일로 괴로워 하지마. 얼마전에 그 애들 엄마를 봤는데..."
"예, 부인, 그런데요..."
"우린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흘려 듣기는 했지만, 칸의 어머니의 얘기는 유쾌하지 않았다. "부인! 이나얏에게 전화왔다고 전해주세요. 매우 급한 일입니다."
"엄마! 누구에요?" 칸의 외침이 멀리에서 들려온다. "테레즈에요?"
"아니, 니가 맨날 물고 빠는 페르닐라 룬드크비스트야." 나이 많은 여인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때문에 공중전화 부스의 문에 물이 튀긴다.
"테레즈!"
"안녕, 칸! 제스퍼는 어디에 있어? 급한 일이야."
"여기 있어." 제스퍼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온다. "나 제스퍼야." ZA/UM 사용후의 숙취에는 친구들의 목소리만큼 좋은 것이 없다.
"들어봐, 너희들 당장 로비사로 와야 해. '스카이밍'이라는 요양원이 있어. 전화번호부 같은 데를 찾아봐. 면회시간은 8시에 끝나."
"'스카이밍'. 알았어. 거기 누가 있지?"
"데렉 트렌트뮐러. 그리고, 내 생각에는, 켁스홀름의 모임이 있어."
"테레즈, 켁스홀름은 여자들이 무서워하라고 만든 괴담이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왜 괴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제스퍼가 전화기 뒤에서 끼어들려고 한다. "칸, 왜 괴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봐."
"왜 괴담이 아니라고 생각해?"
"일단 와서 얘기하지구, 알았어?"
"알았어. 택시를 탈께. 제스퍼, 택시값 있지?
"있어."
"좋아. 택시를 타고 갈께!"
택시 이동은 그저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연속이다. 어두운 옷을 입은 보행자, 회색 하늘,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이다. 테레즈 마체젝에게 가을의 순간은 순조로운 교통의 연속 같다. 그렇다, 칸의 어머니는 의사 대기실에서 소녀들의 어머니를 보았다. 만약 그들이 그녀의 네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애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어버리면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가시나요?" 그런데 이 여자가 소녀들을 찾기 위해 한 일이 있나? 그렇다면 그녀가 “평안을 찾았다"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전화기 속에서 칸의 어머니가 말한다: “그 애들의 어머니가 평안을 찾을 수 있다면, 너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소녀들을 사랑한다 ‒ 그렇다, 감히 말하자면 ‒ 우리는 그들을 더 사랑한다. 세상이 어긋나고 시간이 뒤엉킨 지금 이 순간, 택시 창밖으로 변함없이 미끄러져 지나가는 저녁 도시는 이렇게 평화로우면 안된다. 반드시 수정되고 해결되어야 한다. 분노 없이는 평화도 없고 진실도 없다.
귀를 기울여 보라! 옆 창문으로 지나가는 차량들, 멀리서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 제자리에서 벗어나는 긴 음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저녁, 이튿날 아침, 다음 주, 겨울, 봄, 일 년, 다음해, 십년, 이십년. 구름낀 하늘에서 시계처럼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비가 기억을 씻어내려는 듯 하다. 왜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거기 서서 징징대는 거지? 엔트로포넛들은 이솔라 사이의 창백을 탐험하며, 새로운 대지를 발견한다. 그들은 탐험가이나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일상의 느낌이 다시 스며들 때, 현재의 불타버린 껍질을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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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로 인해 공기가 무거워졌다. 제비가 물 위로 급습하여 곤충을 잡았다. 제스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몇 개의 무거운 물방울만이 눈에 띄지 않게 떨어졌다. 아직도 너무 더웠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하얀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사프레 고고학자들은 곤추 탐험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아니스 섬으로 떠났다. 하지만 제스퍼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항상 카틀라의 여름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제스퍼는 아침에 라디오를 몇시에 켜야할지 알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오늘의 날씨"를 알렸다. 그것은 모두 계획의 일부였다.
칸은 이야기를 하면서 매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이미 그녀의 치마 자락이 그의 정강이를 간지럽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칸의 이야기를 듣는동안 제스퍼는 해변을 살펴보았다.
덤불에서 우산이 솟아올랐다. 그는 햇볕이 비치는 구름 사이로 천둥이 울리자마자, 소녀들 위로 우산을 펼쳤다. 애니는 고개를 들고 웃었다. 햇빛에 흠뻑 젖은 비의 커튼이 해변과 절벽 위로 쏟아졌다. 제스퍼의 신호에 우산 두 개가 더 펼쳐졌다. 칸은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은 채 우산을 폈고, 테레즈는 턱을 손에 괴고 듣고 있는 샬롯과 화려한 작은 마즈를 모두 덮었다. 마즈는 소년 같이 자란 머리카락을 작은 술로 묶어 포니테일로 땋았다. 작전은 훌륭하게 실행되었다. 기사같이 우쭐해진 소년들은 소녀들의 웃음소리에 그저 히죽히죽 웃었다.
“정말 따뜻해! 봐!" 애니는 우산 아래에서 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등은 제스퍼 앞에서 아치 모양을 이뤘다. 소년은 대답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애니의 둥그렇게 굽어진 등에 새겨져 있는 모반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 별들을 만지고 싶었다. 비 냄새가 콧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 문양은 그의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오!" 애니는 목을 쭉 뻗고 빗속에서 머리를 흔들었다. “학교 밖에서 너는 다른 사람같아."
"맞아." 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준비가 철저한데!"
“경험이 좀 더 많다고나 할까?" 테레즈는 샬롯을 향해 눈썹을 치켜떴다.
“전에 점심 줄에 서 있는 걸 한 번 봤어." 소녀는 킬킬거리며 사과 사이다 잔의 빨대를 씹었다. “말을 걸진 않았지만."
“하지만 그 당시 테레즈는 아직 어린애였지." 제스퍼가 놀렸다. “이제는… 남자지만."
매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 번째 우산 아래에는 소녀가 몸을 웅크릴 수 있을 만큼밖에 공간이 없었다. 황금색 머리털이 칸의 무릎에 떨어지고, 비치파라솔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반짝이는 짙은 녹색 눈으로 외국인인 칸을 올려다봤다. 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매린은 사이다를 원하지 않는 유일한 소녀였다.
“그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 그녀의 목소리는 낯설게 들렸다.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았어?"
“글쎄, 그게 문제야." 칸이 기침했다.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
매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그녀의 기쁨에 짓굳은 보조개가 반짝였다. "그들은 어리석은 황제에게 불사의 복숭아를 주고 싶지 않았을거야!"
"바보." 칸이 자기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불사의 복숭아 같은 건 없어!"
샬롯이 자리에 앉았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 누가 알겠어? 곤추와 천명의 선원들은 황제가 그들을 죽일까봐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고 넌 생각하겠지. 하지만 만약 내가 곤추라면," 샬롯은 꼬마 마즈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용 수염을 그렸다. “나는 불사의 복숭아를 발견했도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비밀을 가장 친한 친구들과만 공유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년 동안 함께 세계를 여행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경이를 볼 것이다!"
“샬롯언니, 나에게도 불사의 복숭아를 줄거야?" 꼬마 마즈는 큰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이지. 네가 좀 더 크면 내가 좀 줄게."
"왜 커야 해?"
“그래야 작은 딱정벌레가 아니라 영원히 젊은 아가씨로 살 수 있으니까." 샬롯은 놀렸다.
"아니..." 테레즈는 고개를 저으며 샬롯의 머리카락이 붓처럼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올리는 것을 지켜봤다. "...그 자세는 별로인데."
테레즈의 갑작스러운 전략 변경에 놀란 칸과 제스퍼는 말문이 막혔다. 샬롯은 숨을 내쉬었고, 그녀의 가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뺨이 모세혈관이 터진것처럼 빨갛게 변했다.
테레즈가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나도 불사의 복숭아를 얻을 수 있을까?"
“어디 보자." 소녀는 싱긋 웃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먼저 나에게 뭔가를 가져와야 해."
“뭘 원해?"
칸은 매린이 곁눈질로 소녀들과 몰래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애니는 햇볕에 그을린 다리 위로 테니스 스커트를 끌어올렸다. “다음은 우리 차례지? 우리도 우리만의 비밀 장소가 있거든." 그녀의 눈이 제스퍼를 향해 반짝였다. “너희들 토요일에 뭐 해?"
소년들은 토요일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아무 것도 안해. 달력을 확인하나 마나야!"
“우리는 일주일 동안 정원을 가꾸러 시골로 갈 거야" 애니는 등을 굽히며 발끝으로 일어서서 스커트 허리를 뒤로 넘겼다. “토요일 저녁에 해변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물론. 물론이지. 당연하지." 소년들은 일제히 중얼거렸다.
샬롯의 지갑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녀들의 시선은 삼각함수처럼 소년들 사이를 오가며 반사됐다. 비는 그쳤지만 몇 방울은 여전히 반짝였다. 구름 뒤에서 밝은 태양이 떠오르고, 9학년의 여신이 그 빛줄기를 받으며 기지개를 켜더니 마즈의 귀에 손을 얹은채 눈을 가늘게 뜨고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우리 절반 몫이야, 체리 스피드를 가져와."
"뭐라고?!" 제스퍼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체리-스피-드" 애니가 말했다. 그녀의 빨간 혀는 "d"를 발음하면서 입천장에 닿았다.
"암페타민 같은거야." 샬롯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가 숨을 쉬면서 말할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했다. “그건 그냥…특별해. 정말 좋아. 우리는 너희들과 함께 하고 싶어."
조용했다.
비에 젖은 로즈힙이 햇빛을 받아 아지랭이를 피어 올렸다.
바다 독수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마즈는 집에 있는거지…" 테레즈는 아직도 머리에서 튀어나온 그 우스꽝스러운 머리띠를 생각하고 있었다. 칸과 제스퍼는 그가 샬롯 옆에서 "아스트라"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당연하지, 바보야!"
“그럼 이만, 끝내자!" 그는 소리쳤다.
매린은 칸을 바라보며 그녀의 눈에 무한한 기쁨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의 딸이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기의 전화번호는 지갑에 있어. 그에게 전화해, 알았지?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
[잡담] [신성하고 끔찍한 공기] 06. 용감한 프란티첵 07. 어긋난 세상, 뒤엉킨 시간
꿈꾸는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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